김영렬(1937년생 85세)

 

겨울 한복판, 수분이 말라버린 나목(裸木)들 사이로 우뚝 선 소나무 같은 분을 만났다. 계절이 오가는 길목을 두려워하지 않는 김영렬 어르신을 만나 뵈러 가는 날은 마침 매서운 한파가 한풀 꺾인 날씨였다. 한파를 견뎌낸 포근한 날씨도 어르신을 닮았다. 축협 건물 건너서 직판장 옆 금구리 서일연립으로 향해 가는 나의 발걸음은 무척 가볍다. 멋쟁이 어르신으로 본받고 싶다는 소문이 자자하다고 이미 들었기 때문이다. 깔끔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반겨주시는 모습과 매너가 감동이었다. 얼른 코로나가 풀려서 복지관이 북적이고 배움의 열기로 다시 활짝 피어나기를 기도드린다. 

■ 일단 건강 자랑부터 해볼까

나의 새벽기상은 거뜬하다. 매일 4시30분에 벼락같이 일어난다. 간밤에 단잠을 잤다는 증거이다. 일어나자마자 요가와 실버 체조, 스트레칭을 1시간 30분 동안 안식구와 하고난 후 발마사지 서비스를 해주는데 30년 동안 명절만 쉬고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안식구하고 아침 먹고 나가서 미*의료기에 잠깐 들리고 무조건 운동 삼아 여기저기 2시간 정도 걷다가 들어와서 점심을 먹고 다시 산책을 나가서 하루에 1만5천보를 걷는다. 교통사고 2주 입원과 맹장 수술한 것 말고, 아픈데 하나도 없다. 당이나 고혈압도 나와는 거리가 멀다. 실크 피부에 손가락 한번 따면 선명한 붉은 피가 쭉 솟구친다. 뒷모습은 젊은이인데 앞에서는 60세 후반으로 보인다는 칭찬을 먹고 산다. 허허허, 부러우면 운동 하셔!!!

■ 먹고 살려고 고생 말도 못하게 했지

나는 영동군 용산면 한성리에서 6형제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때는 고구마가 주식이었다. 산에 가서 잔가지와 가랑잎 주워다 고구마죽을 끓여서 그걸로 1년 내내 먹고 살았다. 1시간 걸어서 재를 넘어 부삼국민학교와, 동네에서 2명만 진학한 심천중학교를 20리 걸어서 다녔다. 부모님이 영동 장에 대파를 팔러 20리를 걸어서 지게를 지고 따라갔던 추억이 있다. 내가 25살에 군대 휴가 나왔을 때 고모부 중매로 동이면 황새골 출신인 3살 어린 박군자 처녀와 혼인을 했다. 제대하고 61년도 6월에 몸만 가지고 옥천에서 우산 수선가게를 하고 있던 처삼촌을 믿고 무작정 왔다. 

방을 하나 얻어서 옥천 생활을 시작했다. 대한민국 어디에도 일거리가 없었고 민둥산에 땔감도 없었다. 살기가 대간해서 결혼반지 3돈을 영동장에서 팔아서 3,200원을 받았다. 400원짜리 사글세 6개월 치를 냈다. 남은 800원으로 쌀 1말 팔아놓고, 남의 집 똥통도 퍼주는 등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 아내가 배부른 상태에서 보자기로 아카시아 잔가지 몇 개를 훑어서 담아 오다가 보자기를 본 산 주인에게 뺏겼다. 이웃이 보고 전해주었을 때 자존심이 곤두박질치고 억장이 무너졌다. 나는 손마디가 다 꺾일 만큼 주먹을 불끈 쥐고 내 식구 굶기지 않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였다.

■ 나의 취업 일대기를 말해볼까

내 외가집 7촌 아저씨가 대한통운 총책임자로 있었기에, 자리가 나올 때 대한통운 마루보시 노가다를 다녔다. 일제강점기 때 대한통운을 마루보시(丸星)라고 부르다가 해방 후에 미창주식회사, 다시 대한통운으로 이름을 되찾았다.

각 철도 정거장마다 설치되어 물자 운송 및 하역을 취급하였다. 나도 하역노동자로서 정부미를 기차 곳간에 잔뜩 싣고서 서울로 호송하여 인수인계하고 돈을 받아오는 일을 몇 달간 해서 돈이 조금 생겼다. 그 당시에는 일자리도 별로 없어서 아는 사람이 있어야만 겨우 공장에서 써주었다.

외상을 못하는 처지라서 월급을 타면 갚기로 하고, 마루보시 십장이 보증을 서주고 보리쌀 1말을 샀다. 그런데 잠시 비운 사이에 그 보리쌀 1말을 누가 집어갔다. ‘벼룩의 간을 내어 먹지’ 기가 막혔다. 애 엄마가 꼼짝없이 굶고 있을 때 사글세 집주인이 국수라도 삶아먹으라며 “애 엄마가 굶으면 젖이 안 나올 텐데 국수라도 배부르게 먹으라.”고 건넨 따뜻한 말 한마디에 살아갈 희망이 생겼다. 안식구가 뜨끈한 국수를 다 비우니 배가 불뚝해졌다. 가장 힘들 때 마음 한 편 내어준 보시의 힘을 알기에 나도 항상 누군가를 도우려 하고 감사하며 살았다. 첫애가 2살 때 하도 못 먹어서 새끼문어를 바짝 말린 피딩어를 사다가 다린 물을 먹으면 입맛이 붙는다는 소리를 듣고 구해다 먹였다. 가장의 책무를 다하려 동분서주했던 그 시절이 아득하기만 하다. 

옥천에 은성산업이라는 누에고치 공장에서 일하다가 경비로 발탁되었다. 공장 경비실에 4명이 1조로 3교대씩 교대 근무했다. 24년을 성실하게 보내고 정년하고 나서 바로 담배원료 공장에 취업이 돼서 7년 동안 근무를 했다. 잎담배를 검사해서 선별 작업하고 신탄진에 전매청이 바로 생겨서 담배를 생산한다. 나이가 많아서 더이상 써 주지를 않는다. 나의 취업 일대기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안식구도 열심히 살았는데 대리점에서 화장품을 받아서 걸어 다니면서 팔다가, 나중에는 자전거를 끌고 다니며 가가호호 방문판매를 80세까지 장장 45년 동안 화장품 장사를 했다. 혼자 벌어서는 도저히 애들을 가르칠 수 없었기에, 안식구 피땀 흘린 발걸음이 모여 지금 우리 부부 평안을 만들었다.

■ 인생 3막, 옥천 복지관은 노년의 안식처

은퇴하니 한마디로 남는 게 시간이고 심심해서 옥천 복지관에 가서 회원신청을 했다. 내가 시작하던 때가 복지관 생긴 1년 후로 복지관 프로그램이 45개나 있었다. 나는 발 마사지와 전신 마사지를 1년 동안 배웠다. 내가 마사지 실습을 하니 안사람도 건강해지고 나도 공부가 되어서 좋았다. 내가 7개 정도 프로그램을 이수했다. 또 보건소와 읍사무소 3층에서 에어로빅 운동을 번갈아가며 참석해서 내 일상을 모두 운동으로 채웠다. 집이 가까워서 에어로빅과 실버 댄스와 스포츠 댄스를 걸어 다니면서 다 배웠다. 

에어로빅 수업은 여자들은 60명이 넘는데 남자들은 8명 정도뿐이라서 책임감도 더 높을 수 밖에 없다. 나는 몸이 부드럽고 유연하다고 칭찬을 많이 받았다. 각 면·군·도 단위 행사할 때면 경연 대회에 나갈 사람을 뽑는데 나는 자주 뽑혀서 나갔다. 옥천 대표로 강진 도자기 축제 때 24명이 참가했는데 일단 군 버스로 이동하였다. 종대 횡대 6줄에 나 포함 남자 2명을 세운다. 대열 한가운데 서서 하느라 딴 사람을 보고 할 수 없다. 관객이 쳐다보니 음악에 따라 뒤로 앞으로 이동하느라 신경을 엄청나게 집중해야 한다. 안동하회마을 행사에도 사뭇 따라 다녔는데 인기상으로 100만 원을 받아서 선수들 밥도 사 먹고 오가면서 행복하고 인생 재미나게 살았다. 보건소에서 추천해서 건강비결에 대해 종이 한 장 가득 썼더니 원고비로 5만 원도 받고 옥천신문에 크게 나와서 이름도 한번 떨쳤다. 아들 둘과 고명딸도 다 잘되어서 걱정거리가 하나도 없다. 요즘 코로나가 와서 갈 데가 없고 복지관도 중단되고 보건소 군청 아무 곳도 못가니 너무 갑갑하지만 지킬 건 지켜야 한다. 앞이 안 보였던 내 어려웠던 청춘이 끝나고 행복이 찾아온 것처럼 곧 정상적인 삶이 올 것이다.

“여기까지 굽이굽이 살아 보니, 잘 안 풀린다고 일찍 좌절할 필요는 없다.” 하신다. 열심히 성실하게 살다 보면 웃을 날이 반드시 온다고 덕담을 건네는 뿌리 깊은 나무의 잔향이 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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