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순진 어르신(옥천읍 가화리, 1946~)

인생극장 ‘산 넘어 산’의 은막스타는 이제 ‘커튼콜’에서 자유로워졌다.

어르신이 주인공을 맡았던 인생극장의 제목은 ‘산 넘어 산’ 이었다고 고백하셨다. 물론 한 마디 곁들이셨다. “어디 나 뿐이겠어, 다들 인생극장 ‘산 넘어 산’의 주인공들이지” 

세상이 내 것 인양 환희에 전율하던 때도, 속울음 삼키며 피눈물을 흘리던 날도 수없이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다는 어르신.

서울내기인 어르신은 꿈 많은 학창시절 서울 후암동이야기, 치열했던 삶의 현장 대전, 시골집 툇마루의 나무 향이 배인 옥천에서의 나날들이 모여 추억이 한가득이라고 하시며  당신을 추억 부자라고 소개하셨다. 더불어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은 가슴에 간직하고 속내를 터놓는 사람들이 불러주는 이름, ‘안순진’으로도 기억되기를 바라셨다. 

■ 후암동 예쁜이 

후암동 골목길에 쭉 늘어섰던 일본식 가옥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방귀 꽤나 뀌던 사람들이 모여 살던 후암동, 정부 기관의 관사들이 행렬로 늘어섰고 담장은 내 키를 넘고 또 넘어 안을 들여다 볼 수도 없던 집들이 즐비했다. 그들만큼은 아니어도 나도 의식주 걱정 없이 까르르 웃으면서 후암국민학교, 상명여중과 상명여고를 다녔다.

전쟁 후에 폭격을 맞아 어수선한 동네에 새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할 즈음이라 동네는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과 2층 양옥집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전쟁의 상흔과 개발의 설렘을 한 번에 맛보는 현장에 섰던 우리들은 시대의 변화를 온몸으로 체득하며 성장 통을 앓았다.

유년시절에는 어머니와 검찰청 수사과장이던 외삼촌 슬하에서 성장했다. 본시 아버님은 평안북도 출신인데 1.4 후퇴 때 가족들이 내려오다 아버지는 임진강 전투에서 할 수 없이 다시 올라가게 되었다. 아버님은 쌀 한말 지고 내려오다가 끝내 남녘땅을 밟지 못하셨다. 우리 가족의 아픔은 거기서부터 비롯됐다. 이산가족 찾기를 통해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결국 만날 수 없었다. 시대의 아픔으로 아버지 품에서 성장하지 못하는 유년을 보내면서 인생은 양손에 땅콩이 쥐어지지 않는 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힘 있는 외삼촌 슬하에서 성장하면서 어려움 없이 자랐지만 상명여중시절 큰 오빠의 도미(渡美)로 이별의 쓴맛을 알게 되었다. 당시 26살인 오빠는 공무원신분으로 공보부 장관 비서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경복고등학교 출신중 수재로 인정받았다. 미국에 나가있던 친구들이 오빠를 미국으로 불러들였고 오빠도 워낙 대단한 분이라 미국이 오빠의 꿈을 펼칠 땅이라는 판단으로 도미를 결정했다. 아버지 없이 성장한 나에게 큰 오빠는 아버지와 다름없는 존재였다. 팔 한 짝이 떨어져나가는 것처럼 아팠지만 나도 오빠의 갈 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오빠는 아메리칸 드림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다. 

큰 오빠의 부재는 사춘기의 나에게 텅 빈자리를 남겼지만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사랑받으면서 그 외로움을 달래기도 했다.

사춘기 때 예쁘지 않은 소녀들이 있을까 만은 통통한 볼 살에 보조개가 트레이드 마크였던 나는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남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많아서 어린마음에 우쭐한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 일게다. 보조개가 네 개씩 이나 들어가 한번 웃으면 다들  나를 주목해주었다. 상명여중 다닐 때는 생물 선생님이 ‘백곰’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셨다. 성이 백씨였고 볼 살이 통통하게 올라 귀엽다고 붙여주신 이름인데 친구들도 덩달아 ‘상명 백곰’이라고 나를 불러줬다. 사랑 많이 받던 학창시절을 뒤로하고 나에게도 인생의 풍파는 여지없이 다가왔다. 누구도 예외일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나도 장미 꽃길과 가시밭길을 번갈아 걷게 되었다. 

‘딸들과 함께’
‘딸들과 함께’
‘치열하고 뜨거웠던 청춘’
‘치열하고 뜨거웠던 청춘’

■ 스무 살, 후암동에서 대전 삼성동 빨간 벽돌집으로.

여고를 졸업하고 어머니가 편찮으시면서 외삼촌 계시는 대전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스무살 어린 나에게 대전행은 잠시 귀향 살이 같은 마음이었다. 이내 위로의 마음을 얻은 건 삼성동 삼성국민학교 옆에 지어진 우리 집, 나는 서울에서 이사 온 빨간 벽돌집 딸이었다. 동네에서는 보기 드문 집이라 나는 대전에 와서도 눈길을 끄는 아가씨였다. 엄마를 간호하면서 20대를 보내고 있을 때 이웃에서 중신이 들어왔다.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는 앞뒷집 사이로 이웃사촌이었다.

언니집 딸, 우리 집 아들 결혼시키자며 어른들의 혼담으로 남편을 만났다.

내 나이 스물여덟, 조금은 늦은 결혼을 하게 됐다. 남편은 대전의 명문 D 고등학교와 서울 H대 공대를 나온 실력자로 사업을 하고 있었다. 결혼이 말처럼 달콤하지는 않았다. 그 시대를 살았던 먹물이 든 사람들의 특징인 실리적이지 못한 성향에 집안의 단도리를 내가 맡으면서 생활을 꾸려나갔다.

여성이라는 이름들이 운명처럼 걷게 되는 고단한 여정들이 나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묵묵히 참고 견뎌내면서 내 길을 걸었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줄 알았지만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 하지는 않았다. 나도 경제활동 현장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성격상 섬세한 여성의 일보다는 배포 크던 시절이라 부동산이 활황이었을 때 집을 지어서 팔고 수익을 내곤했다. 허름한 집을 사서 예쁘게 고쳐서 팔고 수익금을 남겼다.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는 운명을 받아들였다. 인생의 이면은 다 고단하다. 내색하지 않을 뿐이다.

허름한 집을 구하러 다니려면 수많은 발걸음으로 발품을 팔아야 했다. 권위적인 남자들은 바깥세상에서 자기 이름 남기기를 원하지, 가정은 그림자 같은 존재라 아내에게 맡기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남편도 예외일 수 없었다.
내가 아이들을 챙기고 거두었다. 여자들의 희생이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지금 내 트레이드 마크가 된 도르르 말린 앞머리는 그 때 만들어졌어. 앞머리를 구리포로 말고 뒷머리는 올려 핀으로 고정 시켰지. 남들 보기에는 영화배우 같은 스타일이지만 숨겨진 이유가 있어. 알고 보면 미용실에 가주 가지 않아도 되는 머리 스타일이야. 아이들 키우고 경제 활동하는 일들이 쉽지 않아서 내가 절약할 수 있는 것들은 절약을 해야 했어. 그때 멋도 놓치고 싶지 않고 생활인으로서도 살아야 해서 만들어진 헤어스타일인데 지금 나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어. 가려진 이면은 다 애잔하고 아파.”

한창 건설 경기가 붐을 이루던 시기라 남편도 사우디에 1년을 다녀오고 나도 집을 사고파는 일을 계속하면서 우리는 남부러울 것 없이 한 시대를 풍미했다. 물론 화려한 외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남모르는 속앓이를 담보로 해야 했다. 

나만의 자녀 교육 방식도 시간이 흘러 돌이켜보면 결과적으로 옳았다. 딸 셋을 키우면서 한 번도 공부를 강요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고등학교 졸업하면 한 달씩 해외여행을 시켰다. 강요된 공부보다 넓은 세상에 발을 디디고 손으로 만져 보는 것이 아이들의 미래에 더 좋은 자양분이 될 것이라 믿었다. 딸 셋은 각각 큰 딸은 캐나다에서 당당하게 입지를 굳혔고, 대전에서 살고 있는 딸은 나에게 좋은 친구로 내가 병원에 갈 때마다 좋은 벗이 되어준다. 막내딸도 상해에서 본인이름을 알리면서 음악가로 활동하고 있다. 큰 딸이 “엄마 나 결혼자금으로 외국에 나가서 제 꿈을 펼쳐볼게요.”

라고 선전포고를 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우리 큰 딸이 50을 바라보면서 캐나다에서 입지를 굳힌 여성이 되었다. 

당시는 몰아치는 폭풍우에 힘들었지만 견뎌낸 시간이 주는 보상은 달콤하다.

■ 황홀한 안식처 옥천

대전에서 치열한 현역을 마치고 옥천에 정착한지 8년이 되었다. 서울에서의 유년과 학창시절 추억은 달콤하다. 대전에서의 치열한 삶의 현장도 짠 내 나지만 끝 맛은 달콤했다.

옥천에서 8년, 석양아래 반짝이는 윤슬처럼 보드랍고 따뜻하다. 고즈넉한 하루하루는 나에게 큰 휴식이다. 나에게 큰 관심 안 가져주는 이곳이 이렇게 편안할 줄 미처 몰랐다.

연고가 없던 옥천은 돌아가신 엄마가 사후에 화장(火葬)을 원치 않으셔서 매장지를 찾다가 우연히 발견한 곳이다. 안남면에 땅을 사고 나무를 심었다. 아직 운전대를 잡고 있는 나는 가화리에서 안남을 오가며 내 땅에 나무 한 그루씩 심다보니 어느새 야산을 이뤘다. 

100세 시대라지만 지금 우리나이는 연장전에 들어간 나이다. 현역에서 전반 전 후반전 치열한 승부를 펼치고 이제 막 연장전에 돌입했다. 결과를 예측할 수 없지만 그저 별 탈 없이 노년을 보내면 그게 바로 나와의 승부에서 진정한 승자가 되는 것이다.

복지관에서 영어 중국어를 배우고 인문학 강의를 들으면서 내실 있는 소일을 하고 있었다. 코로나가 잠잠해져 다시 강의를 듣는 기쁨을 누리고 싶다. 아파트 앞 로컬푸드 직매장에서 건강빵을 사들고 산보를 한다. 고소한 빵을 식탁에 올리고 창가로 내비치는 햇살을 마주 한다. 홍차 한 잔 곁들이는 이 고즈넉함이면 됐지 더 이상 무엇을 바랄까.

속이 불덩어리처럼 열망으로 가득 했을 때 애써 태연한척 버티느라 힘들었던 때도 견뎌냈다. 분홍빛깔 홍연을 감추느라 타들어가는 속도 달랬다. 

돌아보면 고비가 아닌 때가 없었다. 인생은 산 넘어 산 이었다.

감정은 시시때때로 오선지의 음표처럼 오르내렸다. 힘줄은 팽팽해지고 시선은 끝 모를 위를 향하느라 다리가 휘청거렸다.  

하루에도 수 십 번씩 번뇌의 널을 뛰던 날들을 뒤로하고 이제는 그저 고요하다. 이 고요함이 곧 행복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아 차렸다.

이름처럼 예쁜 곳 가화리, 내가 여정을 마치고 여생을 보내는 곳이다.

이제 무대에서 내려와 커튼콜이 없어도 서운한 감정이 일지 않는다. 시시때때의 감정 선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저 지그시 내가 섰던 무대를 바라볼 수 있다. 이제 진짜 나를 만났다. 이제 진짜 나를 만났다. 커튼콜을 꿈꾸지 않아도 되는 소박한 하루하루는 황홀한 안식처 옥천이 안겨준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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