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이선분 어르신

운명이나 팔자로 옷을 입혀도 위로가 안 되는 삶이 있다. 어르신은 스물한 살에 남편을 황망하게 떠나보내고 눈망울 맑은 두 살 아들과 험난한 세상에 달랑 남겨졌다. 열아홉에 시집가서 2년을 살고 어르신 인생은 앞길을 짐작할 수도 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지독하고 기막힌 세월을 거슬러 한 많은 삶은 아흔 두해를 지나고 있다. 그 세월을 어찌 살아내셨을까요. 존중합니다. 당신의 삶을...

■ 기구한 운명의 손아귀

이원에서 태어나 아버님은 광산에서 일하시다 사고로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동생을 낳고 산후 풍에 시달리다 다시 못 올 길로 떠나셨다. 여섯 살인 내가 2년 간격으로 감당하기엔 너무 큰 시련이었다. 눈물은 마르고 말라 더 이상 흘릴 눈물도 없었다. 그 때부터 기구한 운명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작은 아버지 댁에서 성장했다. 작은 아버지도 나무 장사 하시며 근근이 살던 살림이라 작은 어머니께서 하루는 나를 불러 마른 침을 삼키시며

“선분아 조령리 사는 6촌 언니네 아기 봐주러 며칠 다녀올래?”

버선 두 짝, 무명치마, 솜저고리를 곱게 접어서 보따리를 챙겨주셨다. 나를 직접 조령리에 데려다 주시던 작은 어머님의 축축한 손을 기억한다. 내 손을 꽉 잡아 주시던 손이다. 작은 어머니의 뒷모습이 희미해 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열 네 살의 나에게 유일한 후견인인 작은어머니가 나를 6촌 언니 집에 두고 돌아가셨다. 작은 어머니의 눈물을 보았기 때문에 나는 다시 작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서 야학 다니며 한글 공부를 했고 어른들이 하는 말은 귀동냥으로 열심히 들었다. 배우고 싶었지만 나에게는 여건이 허락하지 않았다. 배움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나는 동년배 친구들보다 문리가 먼저 트여 작은 어머니와 함께 6촌 언니 집으로 갔던 그날의 상황을 읽고 말았다.

살림이 어렵던 작은 어머니는 나를 6촌 언니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형부가 우체국에 다니고 있어서 끼니 걱정은 안하던 집이었다. 인심 좋던 작은 어머니는 어린 나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끝까지 나를 배려해주셨다.

6촌 언니 집에서 아이를 봐주고 살림을 살아주던 나는 열아홉 살에 세산리 남자와 결혼을 했다. 남편은 22살 농사꾼이었지만 머리가 너무 좋고 똑똑한 남자였다. 6남매 맏이였던 남편은 호롱불 아래서 나에게 줄곧 “우리 큰 물에 나가서 살아보면 어때” 라며 시골 살이가 답답하다고 말했다. 좁은 땅에서 살기엔 남편은 기개가 넘쳤다. 농사일도 열심이던 남편은 어느 날부터인가 마을 청년들과 밤에 공부하고 밤 마실이 잦아졌다.

조실부모한 나는 믿고 의지할 사람이 남편밖에 없었다. 인자한 시어머니 덕분에 부모 없이 자란 설움을 위로받으면서 나에게도 평범한 행복이 주어지려나 작은 설렘도 있었다. 운명은 나에게 그 평범한 행복도 안겨주지 않았다. 밤 마실 나갔던 남편은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돌아오지 않았다. 미친 듯이 백방으로 수소문 했지만 남편의 거취를 아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없었다. 물에 떠내려 오는 시체라도 건져보려고 강가에 매일 나가보았지만 남편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남편의 이야기는 흉흉한 소문에 묻혀 나에게 들리는 말은 한 마다 한 마디 모두 비수가 되어 꽂혔다. 보도연맹 사건으로 남편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결국 죽음으로 돌아왔다. 억울함은 호소할 수도 없었고 진위를 밝힐 수도 없이 그냥 그렇게 세상에 던져졌다. 그리고 나는 잊었다. 남편과 남편의 죽음을 잊은 것이 아니다. 남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하루하루 넋 나간 채 보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어서 속앓이를 지독하게 하며 외피만 두꺼워졌다. 

■ 갓난쟁이 아들을 업고 무작정 상경을 했다. 

눈물로 세월을 보낼 수 없어 큰 결단을 내렸다. 옥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렸다. 남대문 시장 국밥집에서 밥 한 그릇을 뜨고 아이를 들쳐 업고 일자리를 찾아 헤맸다. 시장을 다 뒤지며 찾아낸 일자리는 파출부였다. 주인집의 아이를 봐주고 살림을 살아주는 일, 집에서 기거하는 파출부인데 우리 아이를 데리고 가야 하는 조건 때문에 마땅한 집이 나타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인물이 곱던 나는 아이를 들쳐 업고 가면 

“이런 일 하겠냐” 며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수십 군데를 돌아 겨우 파출부 자리를 하나 얻고 부엌에 딸린 방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4년을 일했다. 일은 힘들었지만 교양 있는 주인 덕분에 험한 꼴 안보고 돈 모으는 재미로 버텨냈다. 다른 곳에 돈 쓸 일이 없어서 월급을 꼬박 꼬박 모았다. 변호사집이라 월급도 많았다

당시 80키로 쌀 한 가마니 가격이 5천 원 정도로 기억하는데 내 월급도 만 원 가량 되었다. 주인 여사장님 옷을 얻어 입고 삼시 세 끼 그 집에서 해결했다. 변호사집이라 매일 내 키만큼 쌓이는 선물의 절반은 나한테 안겨주셨다. 한 푼 안 쓰고 다 모았다. 인심 좋은 가족이라 나도 더 열심히 집안일을 야무지게 했다. 인지상정으로 마음이 통해서 대접받으면서 일했지만 자라는 아이와 같이 그 집살이를 계속 할 수 없어서 대전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 끝내 웃는 사람으로 기억되다. 

대전도 나에게 사고무친(四顧無親)의 망망대해와 같은 곳이었다. 그래도 옥천에서 가깝다는 위로 아닌 위로를 받았다. 마음이라도 고향 곁에서 머물고 싶어서 대전에서 정착하기로 마음먹었다. 대전 와서 소제동에 방 한 칸을 얻어서 살림을 마련했다. 미제 물건을 좀 팔다가 포목점에서 일을 배워서 역전 중앙시장에서 포목장사를 시작했다. 내가 한복을 입고 앉아있으면 다들 한복 맵시가 곱다며 손님이 하나둘 줄을 잇기 시작했다. 내 나이 서른여섯 살 때였다. 한 땀 한 땀 온갖 정성을 들여 한복을 만들었다. 내 솜씨로 지은 한복을 입고 시집 장가갔던 신랑 각시는 수를 헤아릴 수도 없다. 한창 포목경기가 좋을 때라 돈도 벌고 아들 하나도 잘 키워서 아들은 탱크를 만드는 연구원으로 은퇴했다.

지금은 나와 같이 영동에 살고 있다. 아들 내외의 보살핌 속에서 늙고 병든 내 몸을 운신중이다. 코흘리개 때부터 시작된 운명의 장난이 너무나 힘겨웠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그리고 세파에 흔들리지 않으려고 몸과 정신을 꿋꿋이 지켜냈다.

인내는 쓸고 열매는 달다더니 마치 내 인생을 얘기하는 것 같다. 비밀언덕 하나 없던 척박한 자갈밭이던 세상에 홀로 던져졌던 나, 아들하나 의지하면서 죽을 각오를 하면서 살아냈다. 운명이나 팔자로 옷을 입혀도 위로가 안 되는 삶이었는데 하루하루가 마지막 날인 듯이 살아냈더니 결국 끝내 웃는 사람으로 기억되게 됐다. 아, 여한(餘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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