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이수암

텃밭에서 잡초를 뽑고 있다. 오랜 가뭄철에 성장을 멈추고 모질게도 엎드려 있더니 이번 장맛비에 경쟁이나 하듯 우쑥우쑥 자라서 고추, 가지, 토마토 등의 채소 영역을 침범하고 있다. 왜 이것들은 가꾸어야 할 채소이고 저것들은 뽑아버려야 할 잡초이어야 할까?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선택된 것은 채소이고 선택받지 못한 풀들은 잡초라고 통칭하고 제기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것은 바랭이 이것은 쇠비름, 도꼬마리, 명아주, 개망초, 그들에게도 이름이 있는 것을 보면 각각 쓰임새가 있고 탄생의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뽑아도 뽑아도 다시 솟아나는 끈질긴 생명력은 인간의 의지를 측정하는 잣대가 되기도 하고 나약한 모습을 일깨워 주는 가르침이 되기도 한다.

잡초는 무참하게 뽑아지고 베어져도 항변할 힘이 없다. 다만 더욱 끈질긴 생명력으로 다시 솟아날 뿐이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잡초들은 성장을 멈추고 추운 겨울을 버티어 낼 씨앗을 만들기에 바쁘다. 햇볕이 충분한 여름에는 한길씩이나 자라던 바랭이도 한 뼘도 자라지 못한 채 설익은 씨를 맺고 죽음을 맞는다. 간혹 제초제를 살포하여 집단 살상을 해도 다음해엔 다시 싹을 틔우고 힘차게 땅을 열고 솟아난다. 그 것이 잡초다.

인간에게도 하느님의 성전에 선택받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잡초처럼 밞히고 버려지는 사람들의 무리도 있다. 지배층의 대열에 끼지 못한 이들은 항상 밟히고 깨어지고 하면서도 끈질기게 꿈틀거리고 있다. 하느님의 대답은 <너는 잡초다>이다.

그래서 민초의 노래는 부딪치고 깨어지는 울부짖음이다. 다하지 못한 한의 노래이다.

내 마음 속에도 잡초는 있다. 잡초는 내가 가야할 길을 가로막고 어긋나게 한다. 마음의 잡초는 무성하게 자라 마음 밭을 더럽히고 있다. 수신을 한다고 애를 써도 쉽게 제거되지 않는다. 번거로움인가 괴로움인가 부처님은 이를 번뇌라고 한 것 같다.

세상과 떨어져 산중생활을 즐기는 자연인은 번뇌로부터 해방된 삶을 누리는 것일까. 인간세계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선녀탕에 몸을 씻고 약초 캐고 산채 뜯는 은둔의 삶은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잡초의 표본인데. 그를 미화해서 멋지게 사는 아름다움으로 둔갑시켜 고달픈 삶에 지쳐있는 민초들의 마음을 흔들어대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생로병사의 윤회의 사슬을 끊을 수가 없다. 늙고 병들어서 활동이 제한되어 있어도 살기 위한 몸부림이 대단하다. 병원에 가길 어린 아이들 학교 가듯한다. 그런 속에서도 사랑할 것 사랑하고 미워할 것 미워하는 그 마음의 잡초는 무성하게 엉겨 있다. 무엇이 애별이고 무엇이 원중인가? 어머님 가실 때에 서럽게 울었던 생각이 난다. 다 받지 못한 사랑이 그립고 보답하지 못한 은혜가 한이 되어 울었다. 정말 잡초처럼 밟히고 서러움 많은 삶이었다. 이건 아닌데 어머니를 생각할수록 살아계신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아버님 가신 후에도 서럽게 울었다. 아버님은 원망의 대상이 아닌데도 그렇게 믿고 싶었던 세월이 부끄럽다. 이번에는 죄송스럽다는 참회의 눈물이었다.

살아 있는 친구보다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들이 많은 나이다. 만나는 친구마다 반가워야 하는데 그저 덤덤하다. 저승 가는 경쟁에서 낙오된 무리들이다. 먹은 나이가 부끄럽지 않게 남은 삶이 아름답게 빛나길 바라지만 <글쎄올시다>란 여운만 남긴다. 혹은 예쁘게 혹은 얄밉게 가슴 한편에 자리 잡고 있다. 마치 서리를 기다리는 잡초처럼 말이다.

왜 사랑의 대상은 멀어지고 미움의 대상은 주변에 가득한가? 내 마음은 가을 하늘 같은데 구해도 얻어지지 않고 찾아도 찾을 수 없는 먹구름 같은 잡초는 자꾸 생겨나는 것일까? 한 줌의 잡초가 넓고 넓은 초원을 이루고 이제는 제거할 수 없는 힘으로 다가온다.

다시 호밋자루에 힘을 주어 본다. 호미 날에 찍혀 나오는 잡초가 누구를 닮은 것 같아 움찔 놀란다. 잡초는 뽑아야 하는가.

저작권자 © 옥천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