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숙제 (옥천작가회의 회원/동이면 세산리)

지구촌이 유사 이래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다. 찬란한 문명을 지향하던 인류 앞에 대재앙이 급습했다. 누구의 탓일까, 묻는다는 자체가 자가당착(自家撞着)이며 책임 전가다. 웃을 일이 아니다. 소소한 일상이 무너지고 있다는 자체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지 못한다는 방증이다. 자연의 준엄한 경고 앞에 인간들은 특단의 비책을 강구 중이다. 백신만이 정답일까, 아닐 것이다. 첨단 문명을 추구할수록 인간은 본질과는 거리가 먼 길을 자청하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사항이다.

자연은 인간의 영원한 모태다. ‘고로 자연이 답이다.’ 자연이 답인 이유는 간단명료하다. 자연은 시비와 분별을 모른다. 고로 위대할 수밖에 없다. 인간도 본래는 위대했었다.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말아라. 그것을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

이것이 하늘 길의 섭리요, 준엄한 교시였다. 하느님이 인간(아담)에게 계명이라는 바가지를 주면서, 그 바가지에 가득히 ‘본성의 자유’라는 물을 담아 주셨다. 인간의 교활한 마음은 이때부터 태동하기 시작했다. 바가지를 깨트린 것이다. 이후 인간의 역사는 고난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한다.

장자(莊子)도 ‘제물론(齊物論)’에서 강조한다. 거대한 긍정은 하늘이 내린 온전한 마음을 제대로 모실 때, 아니 제 뜻을 꺾고 자연의 순리를 따를 때, 사람은 모든 시비에서 벗어나서, ‘내 안의 긍정의 힘’을 성취할 수 있다고. 시비는 분별이다. 모든 병은 이곳에서 시작된다. 고로 만병의 근원이다.

지극한 도는 전혀 어렵지 않단다. 중국 선종(禪宗)의 3대 大宗師인 승찬(僧璨) 선사는 『신심명』에서 이것을 간단하게 설파하신다. 지극한 도는 무난(至道無難)이다. 유혐간택( 唯嫌揀擇), 즉 간택하는 시비를 버리라. 그리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도 버리라 한다. 그러면 아무것도 아닌 것, 즉 도가 문득 환하게 밝아진단다(洞然明白). 이렇게 쉬운 것이 도(道)란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쉬운 물건을 잡지 못하고, 스스로 권세와 부귀, 영화와 허명 앞에 무릎을 꿇다가 패가망신을 한단 말인가.

하늘이 부여한 온전한 마음, 이분을 기독교 언어로는 하느님이요, 불교 용어는 부처다. 노자와 장자의 말로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이렇듯 표현 양식만 다를 뿐 진리는 하나다. 진리가 둘이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이 자연의 뜻과 ‘하늘의 음성’을 우리네 인간이 제대로 받들어 모시질 못할 때, 아니 하늘의 뜻을 거역하고, 제 뜻을 앞세우려고 할 때, 사단이 발생하는 것이다. 너와 나를 구분하고 문자에 집착하는 병을 놓지 못하는 일이 발생한단다. 이 병이 인간의 끝을 갈수록 묘연하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고구 정녕히 성인들은 말씀하신다. 자연의 울림, 즉 거대한 긍정을 수용하면서 ‘웅장한 자기 부정’을 온몸으로 시현하신 분들이 바로 예수님이요, 부처다.

그러면 자연은 어떠한가. 정말로 위대할 뿐이다. 위대한 일을 해 놓고도 자기주장을 모른다. 모든 것을 낳고, 품고, 기르면서도 자기를 표현할 줄 모른다. 하찮아 보이는 물건에도 그 스스로 ‘존재의 가치’를 부여할 줄 안다. 공을 성취했음에도 공을 이야기할 줄 모른다. 모든 것들이 자기에게로 회귀함에도 거부할 줄 모른다. 모든 일을 하늘의 숨결로 표현한다. 고로 인간의 언어로 범접할 수 없는 경계에 위치한다. 이에 인간의 영원한 귀의처(歸依處)이면서 자신을 영구히 보존한다. 유위(有爲)는 인간이 머리로 쥐어짠 색깔이고, 무위(無爲)는 하늘 길 본연의 성질이다. 그러므로 사람도 시비를 버릴 때, 다시 자연의 품으로 회향(回向)하는 이치가, 인류를 구원할 영원한 메시지라 생각한다.

중국의 탕왕(湯王)은 세숫대야에 다음과 같은 글을 새겨놓았다고 한다. “구일신(苟日新) 일일신(日日新) 우일신(又日新)”하라고. 진실로 하루를 새롭게 살아라. 그리고 날마다 새롭고 또 새로운 자세로 하루를 맞이하라. 이 문구를 황제가 세숫대야에 새겨놓고서 아침마다 가슴에 새기면서 하루를 열고, 잠자리에서 하루를 반성하였다니, 무슨 설화의 한 대목인 것 같다. 

이러한 좌우명(座右銘)을 실천으로 옮기다 보니, 성군이 아니 될 도리가 있겠는가. 이런 마음으로 나라를 다스리니 백성이, 초목이, 아니 미물들도 스승으로 보이더란다. 나의 스승은 누구인가. 나를 나답게 깨우쳐 주는 분이다. 하찮은 미물일지언정, 아니 어제는 평범해 보이던 것이, 내가 마음의 창을 여니, 모두가 나의 스승이요, 벗이며, 위대한 가르침이 아닌 것이 없었다는 탕왕의 ‘무언의 설파’가 이 병든 말법 시대를 구원해줄 유일한 명약이 아닐까?

우리는 지금 너무 바쁘다. 할 일도 너무 많고 채워야 할 곳간도 수없이 많다. 남에게 지는 것은 죽음뿐이다. 고속으로 질주하는 우리네 ‘무상열차(無常列車)’는 브레이크가 파열된 것 같다. 모든 것에서 나를 주장해야 살아남을 수 있고, 내가 없는 세상은 돌아갈 수 없다고 주창하는 무리가 대세를 이루는 말세다. 먹는 음식도 입는 의복도 거처하는 집도 남들과 비교해서 내가 우위를 점해야, 그래도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요지경 환란 속을 걷고 있다. 

해 지는 황혼 녘 들판을 떠도는 잠자리 떼처럼 정처를 잡지 못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현상에 너무 집착을 하다 보니 본질을 망각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오늘과 같은 ‘코로나 환란’을 자처한 것이다. 스스로 우리네 삶을 망가트리고 있다. 현상에만 집착하는 불나비가 되지 말고, 보이지 않는 곳에 충실을 기할 때, 우리의 미래는 무한 가능성이지 않을까.

하늘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도 자연의 일부다. 고로 인간의 목숨이나 파리의 목숨은 같다. 내 목숨이 소중하듯 남의 목숨의 소중함을 스스로 자각하고, 이제부터는 기어를 후진으로 놓아야 한다. 그 후진 기어 속에는, 아니 거꾸로 볼 줄 아는 세상은 모두가 아름답다. 귀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길이 자연만이 가진 핍진(逼眞)한 섭리며 하늘의 울림이고, 너와 내가 함께 꿈꾸며 가꾸어 나가야 할 미래의 가치관이다. 

거꾸로 볼 줄 아는 안목이 설 때, 우리가 사는 땅이 행복으로 충만할 것이며, 사람과 사람을 통해서 울리는 교감이 ‘하늘의 소리’와 접하는 공간이 될 것이다. 이 길이 인류 공존의 길이며, 너와 내가 함께 아름다운 동행을 꿈꿀 길일 것이다.

직선은 죽음의 길이다. 추억을 낳는 시골길은 사유의 곡선이다. 자연의 길은 후진 기어이며, 거꾸로 보는 시야며, 천천히 내려놓을 줄 아는 공존의 논리다. 이곳이 바로 땅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땅이 될 수 있는 조화로움 속에, 사람 사는 이유가 존재 가치로 빛나는 살맛나는 세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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