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자서전 인생은 아름다워 (64)]미장이였던 내 삶의 방정식, 흙손처럼 하루하루 성실하게 마감하다
[은빛자서전 인생은 아름다워 (64)]미장이였던 내 삶의 방정식, 흙손처럼 하루하루 성실하게 마감하다
  • 김경희 시민기자
  • 승인 2021.02.05 11: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복래 어르신 (41년생. 80세. 백운리)

‘삶의 방정식이 성실’인 사람들의 얼굴이 있다. 어르신의 얼굴은 “나는 성실한 사람이오” 라고 말하고 있었다. 소복이 눈 쌓인 앞마당 장독대며, 나무장작 더미까지 어르신을 닮아 가지런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켜켜이 쌓인 눈까지 그림을 보태 한겨울에 보는 수채화를 연상케 했다. 

유복래 (41년생. 80세. 백운리)<br>
유복래 (41년생. 80세. 백운리)

■ 흙손, 내 삶의 지평을 열었던 회억의 흔적이 되다

나무가 쉬는 숨소리를 들었다. 산에 가면 나무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무 내음도 코끝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무를 평생 만지고 싶어서 목수가 되는 꿈도 꿔 보았다. 

내 본적은 청산면 백운리 301번지다. 백운리에서 태어나 돈 벌러 타지를 나간 몇 년을 제외하고 줄곧 내 주소는 백운리 301번지였다. 마을 밖의 주소에 내 이름을 심지 않았다.

일찍 아버님을 여의고 어머니와 삼형제가 어렵게 살았다. 비빌 언덕이 없어 식구들은 다들 제 밥벌이를 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시골마을의 여느 청년처럼 소꼴을 베고 돼지를 쳤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움직이지 않으면 쌀독은 금방 바닥을 보였다. 남들만큼 일해서는 끼니를 제대로 때우기도 어려웠다. 그저 하루하루 성실하게 사는 것이 내가 풀어갈 인생 숙제의 정답이었다. 

25살이 되었을 때 아는 형이 미장일을 같이 하자고 권했다. 황토 흙을 고르고 짚을 썰어 반죽하여 벽을 바르는 일을 배웠다. 처음에는, 마당 한 곳에 둥근 홈을 파고 맨발로 흙을 짓이겨는 것부터 시작했다. 무거운 황토 흙을 퍼 나르고, 작두로 볏짚을 자르고,  흙짐을 지기도 했다. 처음 일을 배우려면 가장 힘든 일, 가장 무거운 것부터 져야 하는 것이다.

차츰 일이 손에 익었다. 눈썰미가 있었고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라 재빠르게 일하는 모습을 보고 남들보다 먼저 일거리를 배당 받았다. 맡은 일을 게으름 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 처리했다. 

집을 한 채 한 채 지어나가는 기쁨은 아이를 낳는 것처럼 내 새끼들이 늘어나는 것 같았다.

상량식 날이면 몸을 단정히 하고 의미를 배가 시켰다.

온 힘과 정성을 다해 집을 짓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야무지게 흙손을 놀렸다.

흙손질에 손이 성할 날이 없고 어깨며 다리도 고달플 수밖에 없는 것이 미장일이다.

한 땀 한 땀 내 손으로 집이 올라가는 맛에 몸 상하는 줄 모르고 그 일을 수십 년을 했다. 어느 순간 온 몸 여기저기 상처가 훈장으로 남을 때 미장일에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유복래 어르신

■ 나도 열사의 나라에 꿈을 심었다

마흔 살 즈음에 5개년 계획을 세워 금오건설 소속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 갔다. 돈을 벌어서 땅도 사고 산도 사고 싶었다. 4남매의 학비도 마련하고 노후 준비도 할 요량이었다. 2년 동안 사우디의 흙먼지는 건조하고 지독했다. 저녁이면 일을 마친 동료들이 서로 때꾼한 얼굴을 바라보며 눈시울 붉어진 눈빛을 나누기도 했다.

내가 너의 심정을 다 안다는 마음으로.

그래도 가족들을 생각하며 쉬지 않고 일했다. 별이 총총히 박힌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고향에 두고 온 집사람과 4명의 아이들 얼굴이 별이 되어 내게로 쏟아져내려오는 것처럼 그리웠다. 5년의 세월을 쥘부채로 접고 싶었다. 2년이 지난 뒤에 기침이 나오고 가래가 끊더니 폐가 나빠졌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지만 더 이상은 열사의 사막에서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내에서 받는 월급보다 훨씬 많던 품삯이 아까웠지만 가방을 싸고 귀국을 서둘렀다. 

수십년간 해온 미장일이 성실한 내 삶의 방정식과 많이 닮았다.

■ 쉬지 않았던 삶의 책임감

돌아와서 전국을 돌며 객지 생활을 했다. 객지에 나갈 때마다 가족들이 그리웠다. 시간이 날 때면 밭에 감나무를 심었다. 100여주의 감나무를 심어 몇 년이 지나니 감이 열렸다. 미장일이 없는 겨울이 되면 곶감을 깎았다. 사그락사그락 감의 껍질을 벗겨내고, 줄줄이 매단 감들이 익어갈 때 그 주황빛 빛깔이 너무나 탐스러웠다. 일요일에는 온 식구가 매달려 감을 깎고 줄에 끼우고 매달며 오순도순 단란했다. 곶감을 팔면 아이들에게도 용돈을 넉넉히 주었다. 아이들은 스스로 용돈을 벌어 쓰는 재미를 알게 되어 다음 해에는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일했다. 가족이 함께 손을 모으고 아이들은 그 속에서 자기 역할의 책임을 지는 경험을 했다. 어린손이 모아진 작은 일이었지만 이렇게 키우면 제 밥벌이를 하는데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특히 사내아이들은 제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책임과 의무를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집안이 평안하다. 남자가 자기 몫을 못하면 분란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시간이 나면 산에 올랐다. 죽은 나무의 삭정이를 잘라 지게에 지고 내려와서 불을 피웠다. 불이 붙을 때 타닥타닥 내는 소리를 들으면 심장이 뜨거워졌다. 나무가 타면서 나오는 연기를 마시면 정신이 맑아지고 기분이 좋아졌다. 

산림청에서 나무를 벌목한다고 사람을 찾는다는 소리를 들었다. 자원해서 나무를 베는 일에 나섰다. 베어낸 나무를 가져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곧고 결이 단단한 나무들을 골라 집으로 가져왔다. 그 나무들을 알맞은 크기로 잘라 장작나뭇단을 쌓았다. 켜켜로 쌓이는 장작을 보니 안 먹어도 배가 불렀다. 보기에도 좋고 마음이 흐뭇해졌다. 통장에 돈이 쌓이는 것처럼 뿌듯하고 행복해졌다. 

겨우 내내 군불을 피우고 나면 장작더미가 헐빈해졌다. 그 자리에 다시 나무를 올렸다. 마당에 장작이 그득 쌓여야 안심이 되었다. 어릴때부터 원했던 목수는 되지 못했지만, 미장이로 밥벌이를 했지만 나무에 대한 애정은 버릴 수가 없었던 거였다.

이천 년이 되는 해 새 집을 짓기로 했다. 미리 마련해 둔 터에 내가 설계하여 고안한대로 집을 짓게 된 것이다. 백운리 11-6번지에 있던 낡은 오두막을 헐어내고 100평 땅을 어떻게 활용할지 한동안 고민한 뒤였다. 그동안 미장일을 하며 알았던 인맥을 총동원하여 누구보다 튼튼하고 야문 집을 지었다. 집을 짓기 위해서는 수많은 일손이 필요하고 각 공정마다 다른 일손이 필요로 한다. 터를 파고 철근 기초를 하고 벽돌을 쌓으며 기둥을 세우고, 수도와 전기, 배관공사를 하고, 지붕과 서까래를 올리고, 보일러를 깔며 미장을 하고, 전기를 연결하며 타일을 붙이고, 페인트와 마감재를 하고, 벽지를 바르고 장판을 깔아야 한다. 중간중간 들어가는 공정 또한 만만찮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내가 알고 있으니 어느 하나 빠진 것 없이 꼼꼼히 챙겨가며 집을 지었다. 어디든 내 손이 거치지 않은 곳 없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허술하지 않도록 두 번 세 번 점검하다보니 일이 느리게 진행되었지만 공정은 한 곳도 빈틈이 없었다.  

유복래 어르신

■ 곶감한테 배우는 인생의 마감질 

옥상엔 곶감을 말리는 덕장을 따로 올렸다. 1층에 비해 바람도 자유롭게 드나들고 사방이 틔여 햇볕바라기도 좋았다. 농촌의 겨울은 농한기라서 일감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비어있는 시간을 놀거나 마실 다니기에 열중할 시기였지만 쉬지 않고 곶감을 말렸다. 

내 나이 70살이 되던 해 흙손을 놓기로 했다. 45년 동안 살던 미장이의 삶을 내려놓기로 한 것이었다. 남은 것은 골병든 몸 뿐이었다. 무거운 벽돌을 쌓고 무거운 흙과 시멘트를 개어 바르는 동안 몸이 망가졌다. 미련없이 버릴 때와 떠날 때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70이 넘으면서 곶감에 매달렸다. 일하던 몸이라 가만 있을 순 없었던 것이다. 쉬고 있으면 편안한게 아니라 더 몸이 쑤시고 아팠다. 1월부터 설 전에 감나무를 전정하고 거름을 뿌렸다. 4월에 꽃이 피면 5월부터 감을 솎았다. 가을이 되면 꼭지를 알맞게 잘라 감을 땄다. 우리 과수원의 감이 부족하다 싶으면 주위의 감밭에서 주문하여 수량을 확보했다.

많이 할 때는 곶감을 10동까지 했다. 100접이 한 동이니 1천접까지 깎아서 말린 거였다. 대부분은 가락동 공판장으로 보내고 특상품은 명절 선물용으로 비싼 값에 팔았다. 작년까지 곶감을 깎았으나 올해부터는 그만두기로 했다. 

집사람이 교통사고로 많이 다쳤다. 병원에 입원했다가 5개월만에 퇴원 했는데 오른쪽 움직임이 둔해졌다. 얼굴에도 흉터가 남았고 팔고 다리도 성치 않아서 움직임이 불편하다. 병원에서는 재수술을 하라는데 집사람은 그냥 살겠단다. 걸어다닐 수 있으니 지금보다 더 아프지만 않으면 된다고 한다.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사람 특유의 여유와 인내심이라고나 할까? 평생 호강을 시켜주기는커녕 이제 아프고 저린 상처만 남은 몸이 되었다.

묵묵히 뒤따르며 일만 하던 사람, 한 번도 대들거나 바가지 긁거나 잔소리 하지 않던 사람, 내가 하던 일이면 뭐든지 인정하고 믿어주던 사람, 네 명의 자식들도 살뜰히 보듬어 키운 사람, 아픈 몸이지만 나를 위해 따끈한 밥을 짓고 구수한 숭늉을 끓이는 사람.

나무처럼 뿌리를 깊이 내린 우리, 나무 향처럼 은은한 우리, 곶감처럼 깊은 단내로 생을 마감하는 우리가 되자고 아내와 소리 없이 약속한다. 나도 약속을 지킬 것이며 당신도 나를 따라와 주오. 고마운 사람, 나도 내내 보답하리다. 

해마다 백운리를 찾는 철새들, 아직 청정지역을 지켜내고 있는 내 고향 백운리.
해마다 백운리를 찾는 철새들, 아직 청정지역을 지켜내고 있는 내 고향 백운리.

 

이 기사를 후원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