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용 (안남 화인산림욕장 대표)

한국인들이 대거 일본으로 이주한 계기는 대략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1910년 한일합병에 따라 보다 나은 삶을 찾아 도일 했으며, 둘째는 태평양전쟁이 확대되자 강제징용이란 올가미를 씌워 1939년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전쟁터와 탄광등으로 끌고 갔고, 셋째는 1950년 6.25 남침으로 전란을 피해 일본과 한국의 혼란기를 틈타 밀선을 타고 도일한 경우이다.

​한일합병 이후 일본은 차별이 없는 내선(일본과 조선이란 뜻)일체 라는 미명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자기들은 내지인 이라며 모든 면에서 차별과 불평등은 항상 존재했으며, 이 보이지 않는 선은 어느 누구도 끊을 수 없었다.

​재일 한국인 중에서 제주도 출신들이 유별나게 많은 것은 전란중에 지리적 이점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선박, 손에 익은 항해술을 이용하여 도일할 수 있어 교포사회에서는 제주출신을 흔히 해적 이라고 비하하여 부르기도 한다.

​이런 연유로 제주도에는 두 집에 한집 꼴로 재일교포와 관계가 있고, 오사카(大板) 이쿠노구(生野區)와 도쿄 우에노(上野) 뒷골목 한국시장을 가면 억센 제주인들을 무더기로 만날 수 있다. 한국시장에 있는 것은 모두 다 구할 수 있는 곳이며, 특히 이쿠노구는 한국인들의 모자리터로 일본 행정력이 거의 미치지 않는 낙후된 곳이다. 육여사를 저격한 문세광이 바로 이 이쿠노구 출신이다.

한국전쟁 이후 밀려드는 밀선을 나포하여 수용한 곳이 악명 높았던 나가사키(長崎)현에 있는 오무라(大村)수용소로 한국인이 항상 95% 이상 점하고 있었다. 지금은 한국인은 전무하며 동남아와 세계 각처에서 흘러온 난민이 수용되어 있다.

어렵게 도일 하여 생활터전을 잡았지만 이들은 언제, 어디서나 일본 정부가 발행한 외국인등록증을 휴대해야 하는 외국인이자 임시 거주자에 불과했다.

이 불안한 삶은 1965년 한일협정에 따라 일본정부는 우선 민단계는 자손까지 영주권을 부여해 줬다. 조총련계는 1982년에야 민단계와 동일한 대우를 해주었다. 1965년 이전까지만 해도 조총련계가 압도적으로 우세하여 초,중,고,대학까지 세우며 민족교육을 시키면서 체제의 우월함을 선전 했으나, 협정 이후로부터 점진적으로 약화되어 2002년을 기준으로 재일동포 총 62만5천422명 중에서 민단계가 41만1천711명으로 역전되어 그 수는 점차적으로 늘고있는 추세이다.

조총련은 차별없는 지상낙원 이라는 북한의 선전에 속아 1959년부터 1984년까지 9만3천명이 북송 되었다.

그중에는 한국인과 결혼한 일본인처도 6천여명이나 되는데도, 그들중 고급 당간부의 부인으로 겨우 8명만이 현재까지 가족방문차 도일했을 뿐이다.

일본인처 모국방문을 위해 북송일본인처모국방문추진위원장인 이케다 후미코(池田文子) 여사가 수시로 임진각에 와서 북을 향해 목청을 높여도 허공에서 메아리만 들려올 뿐이다.

북송된 교포들이 느낀 북한의 현실은 예상과는 너무나 판이하게 달라,그로 인한 상흔은 현재까지도 동포사회 곳곳에 응어리져 남아있다.

한국인들은 타고난 근면성과 교육열로 세계 어디를 가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가요계에서는 우리의 국민가수 이미자 이상 유명한 미소라히바라(美空ひばり)가 있고, 가네다 마사이치(金田正一)는 일본프로야구계의 명감독,명해설자로 이름을 날렸으며, 프로시절에는 일본야구 사상 최고의 기록인 400승을 이룩한 거인이다. 프로레슬링에서도 역도산이 전설의 레슬러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다.

재계로는 손정의(孫正義) 회장이 소프트 뱅크(SOFT BANK)와 세계적인 IT 재벌로 등극하여 포브스가 손회장의 재산을 24조 5,000억원으로 발표하여 2018년 9월 일본 최고의 부자로 자리매김 해주었다.

우리는 흔히 미국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얻으면 경사 났다고 서로가 떠들썩하며 축하해 주지만, 재일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귀화하면 가문의 수치라고 함구하고 일본 내에서도 교포들은 귀화했다고 백안시하는데다 일본인들은 귀화한 한국인 이라고 여전히 차별한다.

그리고 미국인이 되고 싶어 만삭의 몸으로 기나긴 끔찍한 태평양 여정을 감수하면서 미국으로 건너가 출산하면 아기의 장래를 보장 받은양 의기양양들 한다.

더구나 요즘 젊은이들은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고자 서양식 이름을 즐겨 명함에 표기한다.

재일한국인들은 자기들이 일본인으로 귀화하고 개명하면 색안경을 끼고 보면서도, 미국인이 되고 스스로 서양식 이름을 써도 왜 아무말 못하고 오히려 축하해 주느냐고 이유있는 항변들을 한다.

1990년대 들면서 한국의 민주화가 진전되고 국제사회에서 경제적지위가 향상되자 한일간의 교류가 눈에 띄게 활발해 졌다.

이것에 도화선이 된 것은 “한류” 였다.

한류 덕택으로 도쿄의 신오쿠보(新大久保) 지역은 한국의 도시를 그대로 옮겨놓은 착각을 일으키게 하고, 전자제품의 거리로 유명한 아키하바라(秋葉原) 매장에는 삼성, LG제품이 주인 노릇을 하게 됐다.

미국으로 이민가서 산전수전 다 겪어 겨우 어느정도 안정이 되자마자 수구초심을 이길 수 없어 요즘은 황혼 역이민이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재일한국인 중에서 역이민 온다는 얘기는 들을 수 없으니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저작권자 © 옥천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