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인 (53년생 69세)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인상 좋은 영인님이 반겨주신다. 
“낯선 사람인데 괜찮으세요?”
“남자분이라면 조심스럽겠지만, 여성분한테 이길 정도의 힘은 있는걸요. 하하”
“식탁 위에 약봉지가 많네요. 누가 편찮으신가요?”
“내가 종합병원에 세 든 사람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혹시 고혈압이나 당뇨병 합병증 같은 건가요?”
 “허허 그런건 약과지요. 성인병은 모두들 하나 이상 가지고 있잖아요?”
영인님은 직장암, 폐암, 췌장암, 등뼈가 내려앉아 수술, 고관절 수술까지 남들은 하나만 있어도 주저앉을 병들을 여러 개 몸에 지니고 있다. 그러면서도 평온하고 밝은 얼굴이다.
깜짝 놀랄 만큼 중증의 병을 여러 개 앓으시면서 마치 감기와 몸살에 걸렸다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말씀하신다. 병이 내 몸에 들어와 자신의 집이라고 들어앉았는데 함께 살아야지 어쩌겠냐. 토닥토닥 다스려 가면서 동반 중이란다.
영인님이 웃으며 말씀 하시길래 듣는 사람까지 지나가는 말로 들린다. 사람마다 평화와 안정을 찾아가는 방법이 다르지만, 영인님이 가진 특별함이 새삼스럽다.

■ 객지 생활의 설움도 오래된 추억으로 묻다 

나는 7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졸업한 뒤에 나무하고 논 갈고 밭작물 키우며 돼지도 기르고 부모님 시키는 대로 살았다. 이렇게 살면 평생 가난을 못 벗어나겠다 싶어 17살부터 객지 생활을 시작했다.  

신탄진의 연초제조창에서 5년 근무 했다. 담배 만드는 곳에서 일했지만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5년쯤 근무하고 신탄진 출신의 처녀와 결혼을 했다. 마침 인천에 살던 친구들이 길가의 보도블록을 찍어서 파는 일을 하면 돈이 된다길래 그걸 시작했다가 망했다. 사회생활 경험도 부족하고, 블록을 납품했지만 돈을 떼이기도 하고, 불량품이 생겨 죄다 버리기도 하고 문제가 많았다.

사촌형님의 잡곡 도매상에서 배달 일도 도왔고, 친구가 책장사 하는 것도 도와주다가, 먹고 살기 힘들고 도시 생활에 진저리가 나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부모님이 하시던 벼농사를 도우며 그동안 인간관계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치유해 나갔다.

그 시절을 생각하는 영인님의 눈빛은 먼 곳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세종시 (현재의 금남면)에서 한일시멘트에 다니던 처고모부의 주선으로 흉관 만드는 일을 1년 정도 하고 청주에 나가서 연탄 장사를 9년 동안 했다. 그 동안 아들 둘을 낳았다.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다른 일을 하고 싶었다. 대형 면허증을 취득하여 관광버스와 시외버스 기사를 7~8년 했다.

나는 무슨 일이든 신명나게 한다. 기왕하려면 짜증 부리지 말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해야한다. 버스를 운전하며 전국을 돌아다녔다. 지방마다 다른 환경과 맛있는 먹거리가 있다. 사람들의 습성과 생활 모습도 차이가 있고 그런 것들을 살피며 다니는 게 좋았다. 전라도 쪽은 음식이 맛나고 종류도 무척 많다. 전라도에 가면 어찌나 밥맛이 좋던지 지금도 게장과 갖가지 젓갈 넣은 음식들이 떠오른다. 생각만 해도 입맛이 돈다.

강원도는 산악지대라서인지 사람들이 조용하고 깊다. 경상도 쪽은 바닷가에서 먹던 생선회와 생선구이가 특별했다.

마산에서는 아구찜이 맛있었고 통영이나 거제가면 멸치와 굴(석화) 요리가 많았다. 지리산 청학동에서 맛본 벌집에 담근 약초주가 생각난다. 향도 좋았고 맛도 달달했다. 해운대 파도, 포항 지나 강릉까지 가는 해안선 길, 파도소리도 참 시원했다.

■ 고단한 시간이 몸에 남긴 생채기가 피고름이 되다.

동생이 김포에서 사업을 하는데 나한테 도와달라는 거다. 남들에게 맡기는 것 보다는 형이 옆에서 챙겨주면 훨씬 안심이 되겠다고 한다. 혈육이 부탁하는데 거절할 수 없었다. 2000년부터 동생 회사 일도 봐 주고, 운전도 도와주면서 16년을 보냈다.

자주 피곤하고 어지럽고 의욕이 없어지는 증상이 나타났다. 일도 돈도 싫어졌다. 2016년에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낙향을 결심했다. 그동안 모은 돈으로 고향에 집을 지었다. 부부가 살아갈 집, 사용하기 편하고 볕 잘 들면 된다.
올 4월이면 귀향한 지 5년이다. 18년부터 병을 앓게 됐다. 직장암이 먼저 왔고 폐암과 췌장암까지 친구처럼 손잡고 내 몸에 찾아왔다. 그러던 중에 등뼈가 내려앉아 수술, 고관절이 안 좋아서 수술, 이젠 수술도 약도 지긋지긋하다. 그러나 어쩌겠나 내 인생인데. 

열심히 산다고 살았건만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듯이 허물어져 벼랑 끝에 서게 됐을 때는 눈앞이 캄캄했다. 누구나 인생에 고락을 피할 수 없지만 한 번에 몰려오는 폭풍우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나를 위로하는 방법을 찾아 성당에 나가 열심히 기도하고 스스로 평화를 구축하고 있다. 누굴 원망하지도 내 몸에 찾아온 병도 미워하지도 않는다. 나이 들면 암도 찾아오고 성인병과 치매도 찾아오는 게 인지상정이다. 60년 넘게 사용하면 여기저기 병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려니 하면서 살고 있다.

아내는 면사무소에 공공근로 나갔다. 짬짬이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내 수발도 해 주고 바쁘다. 고마운 사람이다. 두 아들은 한화그룹에 다니고 있다. 큰 아들은 결혼하여 손주가 둘이고 둘째는 아직 미혼이다. 가족들이 자기 자리를 잃지 않은 것도 나에게 큰 위안이다.

영인씨의 목소리는 끝까지 쾌활했다. 식탁 위의 고구마를 맛보라고 권해주기도 하고, 따끈한 차를 끓여 마시라고 권하기도 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맑음을 잃지 않는 목소리는 노래 잘하는 음악선생님처럼 투명했다. 마치 인생이란 버스를 타고 가다가 잠시 멀미가 나서 멀미약을 먹는 것처럼. 자동차 운전 중에 졸음이 와서 갓길에 차를 세우고 주머니 속의 간식을 챙겨 먹는 것처럼. 약봉지 수북한 영인씨 식탁 위에 햇살이 내리는 것을 보며 집을 나섰다. 그를 위해 오래오래 기도하게 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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