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 생애사 연대기] 부창부수의 길, 장작에 남은 나뭇결처럼 따스하고 정겹다.
[어르신 생애사 연대기] 부창부수의 길, 장작에 남은 나뭇결처럼 따스하고 정겹다.
  • 추억의 뜰 남외경 시민기자
  • 승인 2021.01.29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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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자 (1945년생~ )

 

대한(大寒)을 앞두고 중부지방에 눈이 펑펑 쏟아졌고 수북이 쌓였다는 뉴스를 접했지만 청산면 백운리 골목은 조용했다. 바람은 따끈따끈 매서운 손길로 살갗을 스쳤지만 따스한 볕살이 쥘부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봄눈처럼 금방 녹아내리지는 않았지만 햇살에 대적할 자 그 누구랴, 골목길 가장자리엔 아직 눈이 착하게 쌓여있고 작고 앙증맞은 발자국들이 나란하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인상 좋은 이은자어르신이 반겨주신다. 대문 오른쪽은 작은 마당이다. 코끝을 간질이는 마른 나무의 냄새, 숲을 휘감아 도는 바람이 안고 오는 나무의 이야기, 켜켜이 쌓인 자른 통나무의 무늬는 소박하다. 벽을 향해 쌓여있는 장작들은 길손을 향해 섬세하고 부드러운 나이테를 보이고 있다. 

왼쪽을 보니 가마솥이 먼저 눈에 띈다. 김이 모락모락 솟는 솥을 앞에 두고 아궁이에 불을 때는 중이셨다. 반가운 마음에 와락 달려가서 부지깽이를 집어 들었다. 안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고 함부로 부엌의 부지깽이를 만지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겠지만 이렇게 불을 때는 게 얼마만인가!

“마당이랑 텃밭에 눈이 쌓였네요. 여러 발자국들이 보입니다.” 

“눈 위에 찍힌 짐승들의 발자국이예요. 저건 고양이, 저건 족제비, 까치랑 참새.....”

“눈은 참 정직하네요. 햇볕이 나면 녹고, 하얀 몸 위에 발자국 선명히 남겨주고요.”

“그렇지요? 우리 사람들도 저렇게 정직하게 살아야 하는데....”

“사람들이 다니는 동네 골목엔 눈이 거의 녹았어요. 어제까지는 수북이 쌓였다면서요?”

“사람이 못하는 게 없으니 그 기운으로 눈도 죄다 녹이는 거잖아요.”

눈 이야기로 시작하였으니 다른 이야기들도 눈처럼 수북하고 나직하다.

나는 청산면 지전리에서 태어났다. 우리 때야 여식으로 사는 삶은 대부분 비슷했다. 부모님이 시키면 죽은 시늉이라도 내야 했다. 나는 조용한 편이었으니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지도 않았고 어머니 따라 다니며 우물물 길어오고 샘터에서 빨래하는 게 작은 일상이었다. 집에서는 수도 놓고 빨래를 잘 개켜서 다듬이로 두드리고 인두에 숯을 넣어 벌겋게 달궈서 다림질도 했다.

“살강에는 함지박에 담긴 삶은 보리가 놓여 있었고, 부엌 한 쪽에서 콩나물을 길렀어요. 아래쪽 대야에는 물이 담겼고 삼발이를 걸친 뒤 그 위에 콩나물시루를 올렸지요. 시루에 잘 골라서 물에 불린 콩을 넣었고 검은 천을 덮어 빛을 가려주어야 했다우. 하루에도 몇 번씩 물을 끼얹어 주면 콩나물은 하루가 다르게 발을 뻗었는데 꼬물꼬물 자라는 모습이 예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부엌을 들락거리며 콩나물을 키웠다우.”

부모님 슬하에서 엄전하게 살다가 22살에 백운리로 시집을 왔다. 시부님은 돌아가시고 시모님만 살아계신 3형제 중의 맏이인 신랑은 말 없이 속 깊은 사람이었다. 

“새댁이니까 늦잠은 언감생심, 새벽에 일어나 부엌으로 나갔다우. 저녁에 삶아 시렁에 얹어둔 소쿠리에서 보리쌀을 두어 됫박 퍼고, 쌀을 한 줌 얹어 솥에 안쳤어요. 불쏘시개로 불을 지피고, 장작을 몇 개 넣어 밥이 보글보글 끓어오르길 기다리는 동안 손바닥으로 비벼 까끌한 솜털을 털어낸 호박잎과, 꼭지를 따 내어 십자로 칼집을 넣은 가지를, 밀가루에 살짝 버무린 풋고추 옆에는 들깨잎을 얹었어요. 밥물이 잦아들기를 기다려 잉걸불을 아궁이 앞으로 당겨 된장을 지졌고 멸치 몇 마리에 고추를 덤성덤성 썰고 호박잎 줄기를 잘라 넣은 뚝배기에 쌀뜨물을 부었다우. 그렇게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며 시동생 둘 수발도 들었지요.”

남편은 천성이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잠시도 앉아 있지를 못하고 새벽부터 한 밤까지 움직이고 또 움직였다. 첫새벽에 일어나 소를 몰고 나가면, 식전에 소꼴을 한 짐 지고 마당에 들어섰다. 그는 언덕에 소를 방목하고는 소가 배를 불리는 동안 논둑을 베었다. 사이사이 논두렁콩을 돌보고, 풀들을 죄다 모아서 지게에 얹어 집으로 돌아왔다. 

이른 아침을 먹고 남편의 본격적인 하루가 시작되었다. 논을 매고 밭을 갈았다. 해거름녘이면 산에 올라 나무를 했다.

소나무를 귀히 여겨 솔을 치던 시절이라 잡목을 베어야 했다. 굴참나무 졸참나무와 오리나무를 베었고 소나무의 잔 가지를 쳤다. 삭정이와 마른 그루터기를 포대에 담았다. 갈비를 긁었고 솔방울을 주웠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 동행했다. 

“감나무 밭이 있었어요. 가을에 감을 따면 곶감을 깎았어요. 곶감을 하려면 제일 중요한게 감꼭지거든요. 곶감을 하려면 애초에 감나무에서 감을 제대로 잘 잘라야 하는 거라우. 그 일을 남편을 도와서 열심히 했수. 우리 감으로 부족하면 이웃 동네에서 꼭지를 잘 자른 감을 사 오거나 주문해서 가져오기도 했지요.”

■ 곶감을 만드는 비결이라면...

“일이란게 그렇다우.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진심으로 하면 잘 되게 마련이라우. 껍질도 어디 한 곳 남은데 없이 말끔하게 같은 두께로 벗겨야 한다우. 계속 정성을 다해 하면 되는거 아니겠수? 떫은 감을 깎으면 손에 감물이 들어서 갈색이 오래토록 남았지만 뭐 어떠우? 일 하느라 물든 염색인데 그건 훈장과 같은 거 아니우?”

곶감은 깎아서 말린 뒤에 또 잘 주물러서 모양을 만들어야 하니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다.

바람이 잘 통하게 사방을 틔워주고, 어느 정도 마르면 손으로 꼭꼭 눌러가며 모양을 잡아줘야 한다. 겨울 날씨가 너무 따뜻하면 녹아내려서 꼭지가 떨어지면 큰일 난다.

간간이 팔삭 동이 곶감들은 남편은 말랭이로 만들어 시장에서 소매하는 장사꾼에게 넘기기도 했다. 세상 물정에 빠르고 이치가 밝은 사람이라 손해보지 않고 파는 방법을 잘 찾아냈다.

셈법에 빠른 남편 덕에 고민하지 않고 순둥순둥 살았다. 남편이 앞에서 이끌어 주는대로 뒤에서 따라만 가면 되는 삶이 순박하고 정직했다.

남편이 특히 좋아하는 일이 나무를 만지는 일이었다. 목수가 되지 못했지만 산에서 베어온 나무를 자르고 쪼개어 차곡차곡 포개는 일을 즐겨했다. 마당 여기저기 장작을 쌓고 나뭇가지를 묶어 불을 지피며 따뜻한 내음을 집안 곳곳에 쟁여갔다. 나무를 베는 것도 지게에 나뭇짐을 지고 오는 것도 장작을 만들어 쌓는 것도 모두 남편이 했다. 다만 옆에서 연장을 찾아주고 그 위에 쌓을 장작을 들어주고 새참을 만들어 주는 일들만 하면 되었으니 고생하지 않고 산 셈이다.

“2남 2녀를 낳아 모두 결혼하였고 손주만 일곱이라우. 막내 딸은 쌍둥이를 낳아 얼마나 이쁜지 몰라. 이번 설에는 볼 수 있을라나요?”

웃음 짓는 모습에 수줍음이 가득하다. 9988하면서 동네 한 바퀴를 운동삼아 도는 삶. 남편을 위해 구수한 밥을 짓고 군불을 피워 방을 덥히는 삶. 남편이 하는 말씀을 허투루 듣지 않고 감사하고 존중하며 사는 삶. 부창부수의 길을 걸어온 이은자어르신의 생은 부엌 아궁이 앞의 온기처럼 따스하고 훈훈하다. 따뜻한 부부의 정에 겨울 한파가 무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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