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해서 못했던 공부, 옥천으로 시집온 지 43년 만에 시작
손주 돌봐주러 상경했다가 만학도 학교수업 등록하게 돼
서울 고시원 생활 2년 끝에 충북도립대 사회복지학과 진학
사회복지대학원 진학하고파 유원대학교 학사 편입까지 합격
“사회복지학을 배운 만큼 봉사로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파”

알지 못함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답답함이 싫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밤새 읽었다. 신문을 매일 챙겨보기 위해 읍내를 오갔다. 손주를 봐주느라 미처 못 본 신문에 대한 미련은 물에 젖은 채 버려진 신문꾸러미에 닿았다. 3개월 전 기사를 한 장씩 말리면서 읽었다. 그때 눈에 들어온 단어가 ‘만학도 수업’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50년 만에 ‘배움에 대한 열망’이 싹텄다. 환갑이 지난 나이에도 옥천과 서울을 오가며 ‘늦은 공부’를 시작했다. 학교 앞 고시원에서 대학을 가기 위해 평생 몰랐던 영어를 밤새 공부했고, 레포트 제출을 위해 컴퓨터도 배웠다. 하면 할수록 공부 욕심은 커졌다. 올 2월이면 충북도립대학교까지 졸업하고 3월엔 유원대학교에서 공부를 이어갈 예정인 만학도계 끝판왕. 박옥순(67, 안남면 청정리)씨를 안남 배바우작은도서관에서 지난 18일에 만났다.

박옥순씨가 안남면 연주리 보리밭에서 오카리나를 연주하는 모습을 사진작가가 찍어준 사진 (출처:박옥순씨 제공)
박옥순씨가 안남면 연주리 보리밭에서 오카리나를 연주하는 모습을 사진작가가 찍어준 사진 (출처:박옥순씨 제공)

박옥순 씨는 영동군 상촌면에서 나고 자랐다. 칠남매 중 둘째 딸이었던 그는 상촌초등학교를 졸업했다. 흰 블라우스에 까만 치마를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올린 채, 면사무소에서 일하는 여자 사무원이 참 부러웠다던 어머니는 박 씨가 공부를 곧잘 하는 것을 보고 가르치고자 했지만 가정 형편상 그러지 못했다. 그저 ‘너를 가르쳤다면, 손에 흙 안 묻히고 살았을 텐데, 지금보다 훌륭하게 됐을 텐데’라는 말이 박 씨의 응어리로 남았다. 그렇게 집안일과 농사일만 하다가 옥천으로 시집온 지 43년이나 됐다.

박 씨의 공부를 향한 열망은 서울에서 발현됐다. 갓 태어난 손주를 봐주기 위해 ‘서울살이’를 해야 했다. 그때 아파트 바깥에 버려진 물에 젖은 신문을 들춰보다가 발견한 ‘진형중고등학교 만학도를 위한 학교수업’이란 단어는 그가 공부를 하도록 한 원동력이 됐다. 2015년에 진형중고등학교에 입학해 중고등교육과정(4년)을 거쳤다. 2019년에는 만학도 특별전형으로 충북도립대학교까지 진학했다. 그래도 박 씨의 공부 욕심은 멈추지 않았다. 지난 12월 유원대학교로 학사 편입시험까지 합격한 것. 올 2월에 충북도립대학교를 졸업한다는 박 씨는 이제 유원대학교에서의 캠퍼스 라이프를 꿈꾸고 있다.

안남 배바우 작은도서관에서 만난 만학도 박옥순(67)씨.

■ ‘10대 이후부터 공부는 제 의지’라는 말과 물에 젖은 신문에서 잡은 기회, 만학도 수업 

알고 싶은 게 많았고, 배우고 싶은 것은 넘쳐났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공부를 놓지 못했던 건, 43년 만에 터져버린 ‘배우지 못한 한(恨)’때문이었다. 박 씨는 “겉모습은 초라해도 공부를 참 많이 해서 똑똑한 사람이 참 부러웠다”며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공부를 많이 한 티가 나는 사람들에게 괜스레 말을 붙이곤 했는데, 그때 만난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교수가 ‘부모가 자식이 공부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줘야 한다는 점에서 10대까지는 공부가 부모의 책임이지만, 그 이후에 공부를 하지 못한 건 본인의 의지’라고 했던 말이 참 기억에 남았다”고 말했다.

길 한가운데서 들은 말 한마디는 박 씨의 공부에 대한 의지에 불씨를 당겼다. 의지는 ‘배울 기회’를 잡도록 했다. 손주를 돌봐주고자 상경한 박 씨는 아파트 바깥에 버려진 신문꾸러미를 발견했다. 지식을 쌓기 위해 신문 사설을 읽는 습관을 들이고자 노력했던 터라, 신문은 박 씨에게 ‘최고의 교과서’였다. 박 씨는 “경비아저씨에게 신문을 들고 가도 되는지 물어보고, 물에 젖어 퉁퉁 불은 신문을 한 자씩 말리면서 읽던 때 ‘진형중고등학교 만학도’ 기사를 읽게 됐다”며 “아들에게 만학도를 위한 교육과정 등록을 부탁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박 씨의 ‘만학도 수업듣기’는 등록부터 녹록치 않았다. 박 씨가 읽은 기사는 무려 3개월 전에 나온 보도였기 때문에 진형중고등학교의 만학도 수업은 곧 시작할 예정이었다. 등록도 내년에야 가능했다. 일성여중고 만학도 과정도 상황은 비슷했다. 이미 수강인원은 다 찼기 에 더 이상 충원이 불가능하다는 답뿐이었던 것. 야간수업도 손주를 돌봐야 하는 시간과 겹쳐서 등록조차 할 수 없었다. 박 씨는 “나는 왜 이리 공부할 기회가 없을까, 공부할 팔자가 아닌가 라는 생각에, 희망도 잃고 안남면 집 근처 보리밭에서 눈물만 흘렸다”고 회상했다. 집에서 조용히 손주를 봐주던 때, 진형중고등학교에서 만학도 수업 등록이 가능하다는 전화가 왔다. 그렇게 2015년 3월23일부터 박 씨는 진형중고등학교에서 만학도 수업을 듣게 됐다. 

박옥순씨가 오카리나를 연주할때 보기 위해 적은 악보 계이름들. 종이에 글이 빼곡하다.
박옥순씨가 오카리나를 연주할때 보기 위해 적은 악보 계이름들. 종이에 글이 빼곡하다.
박옥순씨가 오카리나를 연주할때 보기 위해 적은 악보 계이름들. 종이에 글이 빼곡하다.
박옥순씨가 오카리나를 연주할때 보기 위해 적은 악보 계이름들. 종이에 글이 빼곡하다.

■ 2년간 고시원생활로 이뤄낸 대학입학과 심리치료사자격증 1급을 따기까지의 집념 

“학교 앞 고시원에서 지내겠다.” 중등교육과정 2년을 마치고 박 씨가 아들 부부에게 꺼낸 ‘폭탄선언’이었다. 박 씨는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가고 싶다는 말로 아들 부부에게 양해를 구했다. 손주를 돌보는 시간을 제외하고 매일 두 시간씩 공부하는 걸로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아들 부부는 ‘대학을 위한 고시원 살이’를 반대했지만, 박 씨는 “환갑이 넘은 나이에 이제야 공부해서 뭐하냐는 말엔 배운 것을 남들에게 봉사하겠다고 했고, 검정고시를 보면 안 되겠냐는 말엔 선생님의 가르침도 잘 모르는데 혼자 공부하는 건 어렵다”며 미안한 마음과 함께 완고한 의사를 밝혔다. 그렇게 박 씨는 고시원에서 고등교육과정 2년을 다녔다.

박 씨는 동묘의 한 고시원에서 50명이 넘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공부에 대한 집념을 불태웠다. 특히 영어공부에 대한 집념은 남달랐다. 평생 마주할 일이 없었던 영어였던 터라, 이해가 될 때까지 영어 교재를 봤다. 화장실을 다닐 때도 여느 고등학교 수험생들처럼 조그만 수첩에 영단어를 적어 가지고 다니면서 공부했다. 박 씨는 “내 이름을 쓰는 게 영어 수행평가였는데, ‘A(에이)’도 모를 때였다”며 “모른다는 게 얼마나 답답한지 깨닫고는, 밤을 새서라도 영어만큼은 깨우치려고 다짐했다”고 강조했다. 이제는 영어책 한 권은 거뜬히 읽는 박 씨는 2년의 고등교육과정을 마치고, 충북도립대학교에 입학했다. 

무엇이든 제 능력껏 해보겠다는 집념은 영어뿐만이 아니었다. 인생에 풍파가 많았다던 박 씨는 한때 옥천 집을 떠나 청주에서 생활했다. 근처 교회에서 한 달 정도 몸을 의탁했고, 인력센터에서 주는 아침밥으로 끼니를 해결하기도 했다. 청주의 한 도서관에 청소를 하러 다녔고, 김치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몸은 고단했지만 배움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 청주대학교 평생교육원 야간수업으로 웃음치료사 강의를 들었다. 웃음치료사 자격증 2급과 심리치료사자격증 2급을 딴 박 씨는 심리치료사자격증 1급을 따기 위해 공부에 매진했다. 하지만 박 씨는 응시자격에 미달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해야만 해당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던 것.

당시 초등학교만 졸업했던 박 씨는 자격증 공부를 그만두려했지만 청주대학교 지침 덕분에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청주대학교 지침에 일단 평생교육원에 들어와 공부한 수강생에 한해서는 1급 시험 응시도 할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박 씨는 “전체 60명 수강생 중에 40명이 준비했던 심리치료사자격증 2급과는 달리, 1급은 혼자만 응시했다”며 “그때 함께 수학했던 수강생 중 심리치료사자격증 1급을 딴 사람은 나 혼자였다”고 밝혔다. 배운 것을 게을리 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한 집념이 만든 값진 결과였다.

■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파’ 선택한 사회복지학과에서 배운 컴퓨터와 봉사정신

충북도립대학교에서 박 씨가 선택한 전공은 ‘사회복지학과’였다. 박 씨는 “집이 너무 가난해서 제때 마음껏 공부할 기회도 놓치고, 인간 대 인간으로 도움도 받지 못하고 살았다. 그때 느꼈던 울분과 애환을 봉사로 승화하고 싶었다”며 사회복지학과를 선택한 이유를 밝혔다. 특히 봉사를 하는 주체도, 봉사를 받는 대상도 모두 사람이기 때문에, 성향도 다르고 같은 행동에 대해 갖는 심리도 다 다르다고 느꼈던 박 씨는 “남을 돕는 마음도 중요하지만, 무엇이든 알고 배운 뒤 봉사를 해야 제대로 봉사했다고 여겼다”며 “공부하고 배운 만큼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알맞은 봉사를 해드리지 않을까 싶었다”고 단언했다.

올 2월9일이면 충북도립대학교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할 예정인 박 씨의 대학생활은 ‘배움투성이’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때문에 비대면 교육이 한창이었던 지난해에는 스마트폰으로 교육영상을 보는 법도 익혔다. 과제 제출도 컴퓨터로 작성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타자를 치는 법도 배우기 위해 노력했다. 박 씨는 “배바우작은도서관을 자주 찾은 이유 중 하나가 컴퓨터였다”며 “스마트폰으로 수업을 보는 건 상대적으로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인터넷이 잘 터지지 않는 집에서는 컴퓨터를 할 수가 없고, 컴퓨터를 제대로 다룰 줄 몰라서 도서관에 상주하셨던 박연화 선생님의 도움을 참 많이 받았다”는 말로 고마움을 표했다.

컴퓨터뿐만 아니라 봉사활동도 박 씨에게는 ‘신세계’였다. 박 씨는 “사회복지학과는 실습과 봉사가 필수인데, 봉사를 신청하는 시스템도 잘 몰라서 무작정 봉사를 하겠다고 복지관이나 여성회관을 찾아갔지만 막상 봉사활동을 할 데가 없었다”며 “봉사단체는 가입도 안 되고 당장 120시간은 어떻게 채워야 할지 막막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박 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장애인복지관을 찾아가 사정을 한 끝에, 간신히 복지관측 허락을 받아 봉사를 하게 됐다. 경로식당에서 어르신들을 위한 음식들을 배식하고 서빙하는 봉사를 했다던 박 씨는 “수업이 끝남과 동시에 바로 복지관으로 달려가서 봉사했다”며 “매일 봉사를 했던 때였다”고 덧붙였다.

장애인복지관에서의 봉사를 끝으로 박 씨는 굿모닝너싱홈요양원과 광진어린이집, 두 곳에서 사회복지 실습을 이어갔다. 실습 현장에서 박 씨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대장암 말기였던 어르신이었다.

박 씨는 “그 어르신이 요양원에 오시면서, 요양원장님이 어르신 곁에서 요양보호사 일을 해줄 수 없겠냐고 요청했다. 어르신이 돌아가시는 날까지 수발을 들고 그 곁에서 함께 했다”며 “실습이 끝날 때쯤엔 다리가 엄청 붓고 통증이 왔지만 정말 최선을 다해 돌봐드렸다”고 언급했다. 특히 그는 “어르신은 늘 제게 ‘복 받고, 잘 살아, 행복하게. 내가 똑똑한 여사님 만나서 이렇게 행복하게 지내다가 간다’는 말을 해주셨는데 그 말이 가슴에 참 깊게 남았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박옥순씨가 안남면 연주리 보리밭 한가운데에 서서 오카리나를 연주하는 모습을 사진작가가 찍어준 사진 (출처:박옥순씨 제공)

■ 여전히 배우고픈 것도 많고 사회복지대학원 진학까지 꿈꾸는 ‘열정 부자’ 

‘봉사’를 하기 위해 시작한 공부였지만, 봉사 외에도 배우고 싶은 게 많았다. 진형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한국화와 민요를 배웠다. 악기를 하나 배우고 싶다는 생각에, 지난해에는 안남면행정복지센터에서 오카리나 연주법을 배우기도 했다. 등주봉에 오르면서부터는 숲이 좋고, 사람들과 대화하는 게 좋아서 ‘숲 해설가’도 해보고 싶었다. 그만큼 여전히 하고 싶은 것도, 배우고 싶은 것도 참 많은 만학도였다.

진형중고등학교 만학도 수업을 듣게 되면서 가장 먼저 바뀐 것은 ‘책을 대하는 자세’였다. 박 씨는 “예전엔 연예 관련 잡지를 주로 읽었는데, 고등학교 수업을 들으면서부터는 현대문학이나 소설책에 빠져 살았다”며 “3일에 한 권은 꼭 읽어야겠다며 다짐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최고의 자산은 책인 것 같다”고 표현했다. 특히 평전을 좋아한다던 그는 “인물의 삶 속에서 ‘저렇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곤 했다”며 “전태일 평전에서 ‘내가 대학생 친구 하나만 있었으면 행복하겠다’는 글귀와 ‘산이 나한테 못 오니, 내가 산을 가라’라는 글귀가 참 인상 깊었다”고 덧붙였다.

졸업을 할 때면 박 씨는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쓰는 ‘전상서’를 속으로 쓰곤 했다. 진형중고등학교에서 졸업장을 받았을 때엔 밤새워서 영어도 극복해 대학에 갈 거라는 다짐을, 충북도립대학교 졸업을 앞두고는 어머니의 소원을 조금이나마 풀어줬다는 안도감을 표했다. 이제 박 씨는 또 다른 꿈을 꾸고 있다. 바로, 사회복지대학원에 진학하는 것. 박 씨가 2년제 충북도립대학교에서 영동군에 위치한 4년제 유원대학교로 학사 편입한 이유였다. 박 씨는 “대학에 오는 게 쉽지 않았던 만큼, 대학원도 가보고 싶었다”며 “‘꼴찌하면 어때’라는 마음으로 유원대학교 편입시험을 봤고 합격했다”고 말했다.

석박사까지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순간순간 본인에게 주어진 배움의 기회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박옥순 씨. 제대로 배우고 공부한 만큼 지역주민들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를 하고 싶다는 박 씨의 열정 앞에, 나이는 한낱 숫자에 불과했다.

 

저작권자 © 옥천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