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숙제 옥천작가회의 회원 동이면 세산리

춘추전국시대는 일상이 전쟁 상황이었다. 강한 나라는 강한 대로, 약자는 약자대로의 위험이 산재돼 있는 사회구조였다. 진(晋)나라의 영공(靈公)은 7세에 왕의를 계승한 폭군이었다. 그는 간언을 하는 재상 조순((趙盾) 을 죽이려 했다. 그러자 조순은 살고자 국경을 넘으려다 폭군 영공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는 그리던 조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사관인 동호(董狐)가 “조순 대감이 영공을 시해했다”라고 적었다. 조순 대감이 강력 항의하자 사관 동호는 이렇게 강변한다.

“조순 대감이 영공을 직접 시해를 하지는 않았지만, 시해 당시 엄연히 나라 안에 계셨고, 돌아와서도 범인을 처벌하지 않았기에 시해자에 포함된다”고.

이렇듯 조순 대감은 법을 지키기 위해서 누명을 참았듯이, 사관 동호는 사관으로서 임무를, 권력 앞에서 주저함 없이 정론직필(正論直筆)을 고수했다. 춘추의 주석서 『춘추좌씨전』에서 공자는 동호를 가리켜, 역사 앞에 진실을 왜곡하지 않았으며 그 기개를 높이 평가했다. 이후 서릿발 같은  사관을 논할 때 동호지필(董狐之筆)이라 칭하게 됐다.

동호지필(董狐之筆), 그 추상같은 기상을 가졌던 분이 송건호(宋建浩) 선생이다. 그분은 1926년 음력 9월27일, 옥천군 군북면 비야리에서 태어났다. 부친 송재찬과 어머니 박재호 사이에서, 3남5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께서 닦아 놓은 재산 덕택에 아버지는 중농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 놈들이 설쳐대는 시국의 혼란함을 피해서, 두메산골 비야리로 은둔하신 것 같다.

아버지의 성품은 온유하셨고 어머니는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셨다. 송건호 선생의 강직성과 청렴함은 어머니의 숨결인 것 같다. 학교는 잠시 증약 사립보통학교를 다니다가, 다시 대전시 대덕구 동면의 동명 공립학교로 전학을 했고, 대전시 욱정공립 보통학교로 옮기게 된다. 성적은 우수했고 부친의 뜻에 따라서 경성 사립 상업학교에 진학을 하게 된다. 그는 타고난 성품이 거짓말을 몰랐다. 중학교 때부터 고서점에서 책을 읽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다. 평생을 열광적인 독서에 몰입하는 자세로 일관한다. 상업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잠시 고향에 내려와 일본군 식량창고 사무원 노릇을 하셨는데, 이때 해방이 된다. 다시 상경하여 서울대학교 법대의 전신인 경성 법학전문학교에 입학을 하게 된다. 자취하면서 신문 배달과 노동일을 하면서 학비를 조달한다. 그러나 전공인 법학은 그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당시 청계천 변의 고서점에서 굶주린 사자처럼 책에 몰입했던 것 같다. 

하지만 6·25전쟁으로 학업은 중단되고 형님의 영향을 받아서 철도국 통역관으로 취직을 하게 된다. 당시 국제정세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기에 영어에 몰두한 결과다. 철도국 미군부서에서 통역과 번역을 담당했던 것 같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선생은 곧장 언론사 외신부 기자로 이력을 바꾼다. 선생의 품성과 민족주의 성향이 열매를 맺어, 이때부터 언론사에 없어서는 안 될 인물로 부각되기 시작한다. 대한민국의 유수의 언론사 편집장과 논객이 된 것이다.

이때부터 선생의 진면목이 발휘되면서 형극의 길을 걷게 된다. 철저한 원칙주의자에 민족사관이 불붙기 시작한 선생의 논지는, 가히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칼날이 그를 방치할 리 없다. 온갖 회유와 압박으로 선생을 절체절명의 위기로 내몰았지만, 선생의 의지는 역경 앞에서 더욱더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하다가, ‘자유언론 실천선언’으로 동료들과 함께 해직의 길로 접어든다. 선생이 인생을 걸고서 주창하는 언론자유와 편집권 독립의 주장을 수용해 줄 권력자와 경영자는 없었다. 선생의 높은 이상을 말년 한겨레신문 창간으로 염원을 다소 성취한다.

당연히 정부의 요시찰 인물이요, 막막한 호구지책 앞에 선생은 다시 밥상을 책상으로 쓰면서,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자처하게 된다. 이때부터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이, 불후의 명저 ‘한국 현대사’를 집필하게 된다. 그 길은 가혹한 금기의 대상이었다. 선생은 어떠한 권력과 유혹 앞에서도, 추상같은 의지로 민족의 앞날을 예견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의 좌표를 준엄한 논지로 저술 활동에 매진하기 시작한다. 냉전을 교묘하게 편승하면서, 친일·반민족 주의자들과 이승만 정권의 부당함을, 도도하게 민족의 역사 앞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역설하기 시작한 것이다. 권력자들이 이를 가만히 둘 리가 없다. 박정희 독재정권은 그래도 최후의 양심은 있었다. 선생의 가치를 볼 줄 아는 안목은 있었다. 그러나 전두환의 구둣발은 영락없이 선생의 영혼을 짓뭉갰다. 선생이 주장하는 이론 앞에서 숨도 쉴 수 없는 광란자 전두환은, 선생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과 연루시키는 한 편의 소설 같은 작품으로 목에 올가미를 채웠다.

결과는 참담함 그 자체였다. 남영동 대공 분실로 개처럼 끌려가서 모진 고문 끝에 거짓 자백을 했지만, 이미 육신은 모래성처럼 만신창이가 된 뒤였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3년 6개월을 선고받고 수형 생활을 하다가, 파킨슨병을 얻게 된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8년간 불치의 병마와 투병 끝에 ‘언론계의 횃불’은, 역사의 암흑 속으로 잠기는 비운을 맞는다.
선생의 이상과 논지는 오직 ‘분단과 민족’ 앞에서, 한민족의 나아갈 미래를 추상같이 제기하셨다. 권력이 짓누를수록 의지는 불타올랐고, 겨울 추위가 매서울수록 매화 향기를 예견할 줄 아는 올곧은 선비셨다. 이런 분이 우리 옥천 출신이다. 이것이 작은 동기 부여일까. 고로 ‘이제는 송건호 선생이다.’ 그의 얼과 숭고한 가치를 지역 사회가 받들어 선양함은 당연한 도리요, 의무다.

복지관을 건립해서 현생을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선생의 불굴의 기상을 ‘옥천의 미래의 가치관’으로, 받들어 모시인 줄 아는 것도 작은 일은 아닐 것이다. 이것을 지역사회의 정치하시는 분들이 선두에 서서, 화두로 삼아야 함은 논할 재론의 여지가 없다. 어려울수록 답은 가까이에 있다. 비전이 답이다. 예산 타령은 궁색한 변명이다. 선생의 지고한 가치를 ‘언론문화제’로 승화시키는 작업이, 제2의 도약으로 갈 수 있는 옥천만의 향상일로(向上一路)의 노정(路程)이다.

이제는 송건호 선생을 정지용 선생의 위상과 걸맞게 선양시켜야 된다. 그 길이 옥천을 문향과 언론의 성지로 부각해, 옥천을 옥천답게 살찌우는 길이요, 미래의 비전이다. 그럴 때 국민들은 당연히 옥천을 다시 주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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