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희 어머니 1938년

옛것을 버리지 못한다. 나는 다듬이질을 여든 살 까지 했다. 세탁한 옷감을 다듬이돌에 올려놓고 방망이로 두들기면 옷감의 씨줄날줄이 제자리를 찾아간다. 현대식 다리미가 따라 올수 없는 다듬이질의 정교한 질서가 있다. 우리 노인들의 지혜가 바로 그것이다. 배움이 짧고 우물 안 개구리로 여든 넘게 살아왔지만 학식 많은 젊은 사람들이 범접할 수 없는 인생의 비밀병기를 갖고 있다.

■ 그리운 고향 

석탄리에서 태어난 나는 80여년 가까이 옥천에서 살다가 건강이 안 좋아져서 대전 아들집으로 이사 나온 지 4년이 되었다.

누군가 나에게 “당신 언제가 제일 행복 했소?” 라고 묻는다면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안내면 살 때라고 바로 답할 것이다. 엄마 품에 안긴 것 같은 작은 마을에서 평화롭던 시절이다. 젊은 시절 교사의 아내로 살면서 박봉에 시달리며 풍족하지 않았지만 소박한 선생님의 아내로, 안내면 사는 여자로 내 인생에 아름답던 시절이다.

겨울이면 낚시 좋아하는 남편 따라 강태공들이 북적거리는 수북리 빙어 낚시터에 가서 세상 근심을 내려놓기도 했다. 코로나로 거리두기가 한창인 지금 수북리 빙어낚시터는 어떤 풍경일지 생각하면 그림이 떠오르지 않는다. 낚시터에 들렀다가 정지용문학관으로 발길을 옮겨 가슴을 촉촉이 적시는 ‘향수’ 한번 읊조리며 잠시 교양 있는 할미가 되는 호사도 누렸다.

옥천을 그리워하듯이 내 마음속의 고향을 그려 본다. 

향수(鄕愁) : 정지용 시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 무심한 세월의 강을 건너왔다. 

나는 삼양국민학교, 남편은 죽향국민학교를 다녔다. 나는 스물 셋, 남편은 스물여섯에 결혼을 했다. 아버님 친구 분의 중신으로 만나 수줍은 첫 대면으로 하고 두 번째 만나는 날이 시집가는 날이 되었다.

나는 부모님 슬하에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얼굴도 안보고 데려간다는 셋째 딸이었다. 옥천 여중에 다녔다. 남편은 옥천 중학교 대전 사범학교 출신이다. 시골의 많은 학교들이 폐교의 수순으로 몰리고 있지만 아직도 나와 남편이 졸업한 우리 학교는 예전의 명성은 사그라들었지만 아직도 건재하다. 국민학교 교정은 그 시절의 우리에게 고향 같은 곳이다. 유년기의 6년을 보낸 곳이다. 친정집 같은 학교다. 졸업한 국민학교가 폐교 되는 건 친정 동네가 수몰되는 것처럼 가슴 아픈 일이다. 

1945년 삼양국민학교 1학년 때 해방을 맞이했다. 광복 전에 오빠가 대동아 전쟁 (태평양전쟁)에 끌려가게 돼서 엄마는 밤마다 정안수를 떠놓고 오빠가 살아 돌아오기를 기도했다. 해방 무렵에 오빠가 살아 돌아와 꿈인지 생시인지 다들 분간을 못했다. 오빠는 후에 사범학교를 나와 학교 교사로 퇴직을 했다. 

나는 시골마을에서 중학교에 다니던 몇 안 되는 아이였다. 친구들이 집안 농사 도울 때 교복 입고 학교를 다녔다. 부모님은 유복하지 않았지만 딸 아들 구별하지 않으시고 평등하게 키워주셨다. 시집갈 때만해도 오동나무 장롱에 양단 이불을 해서 혼수로 들려 보내주셨다. 

그 당시 최고의 신혼여행지는 하와이나 진배없는 온양온천이었다. 온천도 서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라 일생에 한 번 결혼식 때 누리는 호사였다. 그 조차도 없이 신혼을 시작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부자로 살지는 않았지만 소박하고 안정된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대전 예식원과 온양온천은 향수 깃든 추억의 장소로 남았다. 교사의 아내로 소박한 신혼을 시작했다.안내중학교는 당시만 해도 한 학년에 6반, 한 학급에 60명이내의 학생들이 있었다. 1960년대 후반만 해도 안내는 시골 동네지만 읍내는 장터가 활성화되었고 공무원들이 많아서 젊은 사람들도 그 마을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지금처럼 나이든 마을이 아니었다.  남편은 옥천의 중고등학교에서 40여 년간 교편생활을 했다. 나는 박봉을 쪼개가며 우리 5남매를 건사하고 남편을 내조했다. 그때만 해도 교사의 처우가 너무 박해서 박봉을 쥐꼬리만한 월급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우리 아이들도 어릴 때는 언니 오빠 구분 없이 옷을 다 물려 입으면서 자랐다. 막내딸이 오빠가 물려준 반바지입고 나갔다가 남자아이들한테 놀림 받고 울면서 들어오는 일은 부지기수였다. 막내딸이 그 시절을 돌아보면서 과거 이야기를 들먹이는 나이다. 이미 우리 부부는 겨울의 끝자락에 와 있다.

소란한 시대를 지나고 있다. 서로 조금씩 양보하면서 힘을 보태야 위기를 넘길 수 있다. 우리가 어려운 그 시절을 살던 삶의 방식을 다시 써먹는 날이 왔다. 인생이 돌고 돈다는 말이 맞다. 그렇다면 이 위기도 극복하고 또 좋은 날을 맞을 것이다. 새롭게 맞을 좋은 시절에 나도 동행할지 알 수는 없으나 우리 자식들이 그 날을 맞아 우리 부부를 간간이 기억해준다면 멀리서 웃음 머금은 채로 바라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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