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예 어르신 (1944년) 적하리

메주 띄운 아랫목이 쿰쿰한 냄새로 덮였지만 해마다 이 맘 때쯤이면 수십 년을 맡아온 향기다. 겨울의 한 가운데라는 신호다. 다음해 밥상에 오를 수십 가지 반찬들의 맛을 이 녀석이 도맡을 것이다. 우리 집은 메주를 띄우고 곧 매달 것이다. 어느 집은 곶감이 대롱대롱 매달려 시골의 한적한 풍경을 그리고 있다. 80살을 맞은 나의 하루도 오랜 세월 고단했지만 지금은 따뜻한 아랫목에서 그저 평안한 날들이다. 

■ 농부의 아내로 살다

어린 시절 금강 안쪽마을에 살다가 소정리 읍내로 이사 나왔다. 2남2녀 중 위로 오빠가 있고 딸로는 장녀였다. 소정리에서 집안 농사와 살림을 도우며 여느 시골큰애기와 별반 다르지 않는 소녀시절을 보냈다. 남편의 이모가 우리 동네에 살며 이웃사촌으로 지냈는데 남편과 나를 중신 섰다. 24살 때 적하리 남자(박찬범)와 결혼을 했다. 중신애비 말은 절반, 거기서 다시 절반만 들으면 된다는 옛말이 있었다. 이모님도 역시나 “시집가서 밥만 하면 된다”며 먹고 살만한 집이라고 하셨다. 막상 시집을 와보니 밥만 해서는 어림도 없는 살림이었다. 내가 손을 걷어붙이고 나서야 할 판이었다. 

1939년생인 남편은 열두 살 때 6.25가 발발하고 시아버지는 전쟁 중에 전사하셨다. 가장의 부재는 남편에게 소년가장의 책임을 짊어지게 했다. 남편은 뼛속까지 성실하고 근면한 사람이었다. 나도 덩달아 순응하면서 농부의 아내로 내 운명인양 그렇게 살아왔다.

결혼하면서 분가를 했다. 윗동네에서 아랫동네로 분가했고 분가한 집에서 막내딸을 낳고 50년 가까이 살고 있다. 부모님한테 물려받은 것이 없는 우리는 당연히 맨손에 달 셋방부터 시작했다. 초라한 시작이었지만 우리 부부는 강직하고 근면하게 살았다. 지금은 남한테 아쉬운 소리 할 일 없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자존심을 지키며 살고 있다. 50년, 지난한 세월이지만 결실을 맺은 시간이라 뿌듯하고 흐뭇하다. 나는 젊은 날 남편과 농사를 같이 지었다. 과일농사도 손이 많이 간다. 봄 날 딸기 농사를 시작으로 복숭아 포도 등 줄줄이 농사를 지었다. 과일농사는 내 손을 많이 탔다. 남편은 나무를 전지하고 과일을 솎아내는 일을 하고 나는 과일을 닦고 파는 일을 했다. 큰 다라이에 딸기를 싣고 버스에 올라 대전역 중앙 시장에 내렸다. 그 무거운 걸 싣고 내리고 무릎이 성할 날이 없었다. 돌아보면 미련하게 살았다. 

농사가 천직인 남편은 동네 반장도 하고 새마을 운동이 한창 일 때는 새마을 지도자도 맡았다. 그 감투란 것이 보이지 않는 수고가 따르다보니 나도 그림자처럼 하는 일이 많았다. 사람들 모이면 밥상이라도 푸짐하게 봐야 했다. 워낙 손이 커서 밥 할 때 마다 두 세 사람 분은 넉넉하게 만들었다. 그 옛날에는 밥 얻어먹으러 다니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 사람들도 청해서 같이 밥을 나눠먹게 했다. 김장도 아직까지 큰 다리 2-3개 씩 하면서 큰집에도 드리고 우리 아이들 뿐 아니라 조카들까지 나눠 먹는다. 나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다. 돈도 안 생기는 일을 기꺼이 한다는 건 천성이다.  얼추 50년 넘게 농사를 지었다. 논농사부터 포도농사 딸기 자두 복숭아까지 과일농사는 두루 다 손을 댔다. 굵직한 농사는 포도와 복숭아 농사였다. 포도 농사는 20년 전까지 했지만 칠레산 포도가 수입되면서 가격 경쟁력이 약해지고 국가에서 보조금을 주고 폐농을 권장하게 되었다. 당연한 수순처럼 복숭아 농사로 전향했다. 물론 이제는 복숭아도 손을 떼었다.

이제는 나를 평안하게 쉬게 할 시간이다.

■ 가을날 시골 마을 불청객

한창 농부의 아내로 살 때는 몸이 아프기도 했지만 어지간해서는 아프다는 말을 안 하는 성격이라 죽을 만큼 아플 때 병원에 가곤 했다. 그때가 바로 20년 전인가 쯔쯔가무시병으로 한 번 크게 놀란 적이 있었다. 

가을날이라 몸이 으슬으슬 춥고 기운이 없었다. 목소리도 푹 잠기고 영락없는 감기라 읍내병원가서 감기약 처방을 받았다. 얼마나 기운이 없었는지 내가 내 돈 주고 링거를 다 맞았다. 어지간히 아파서는 꿈쩍도 안하는 내가 내 돈 내고 링거를 맞다니 죽을 만큼 힘들었다. 병세가 호전이 안 되서 결국 입원을 했다. 바로 가을철 시골에 찾아온 불청객, 쯔쯔가무시 병 이었다.

쯔쯔가무시는 쥐 소변이나 배설물이 매개체인 병인데 아침이면 시골일이 짚을 들어 올리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그 때 옮아 온 거 같다. 짚을 햇볕에 바짝 말렸어야 했는데 가을이라 습기를 머금고 있어서 그 사단이 났다. 나흘정도 입원했는데 죽다 살아날 만큼 힘들었던 때다.

■ 황후의 찬, 내 손맛이 낳은 손 두부

남편은 6.25전쟁 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버지 사랑이 갈급했던지 우리 3남매에게 자상한 아버지였다. 시장에 나가는 날이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 빈손으로 집에 오지 않았다. 나는 살갑게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남편은 아이들에게 자상했다. 남편은 명절 때 자식들 오기 전에 가래떡을 전날 밤에 다 썰어놓는다. 추석 때는 송편도 남편이 도맡아서 빚는다. 나도 옆에서 내 솜씨자랑을 한다. 손 두부를 직접 만든다. 밤 내내 불린 콩을 맷돌에 갈아 삼베 보자기에 걸러내면 맑은 콩국이 나온다. 그 국물을 뭉근히 졸이면 몽글몽글 끓었다. 널찍한 사각 판때기에 밥 수건 깔고 부은 뒤, 무거운 걸 눌러두면 굳었고, 그걸 칼질하여 바로 손 두부가 탄생한다. 내가 만든 손 두부 맛을 본 사람은 누구라도 그 맛을 찾고 또 찾는다. 두부모를 잘라 달래장에 찍어 한입 가득 베어 물면 황후의 찬이 부럽지 않다. 그 구수한 맛은 제 아무리 기교 있는 서양음식도 못 쫓아온다. 

아직 아궁이를 없애지 않아서 가마솥에 두부며 청국장을 만든다. 우리 집만의 별미로 객지에 나가있는 식구들이 오는 날이면 내 손맛이 곁들여진 시골음식으로 환영한다. 다 옛날 얘기가 되어 그만큼 억척같이 살았던 내 인생을 반추하고 있다. 내가 만든 손 두부만큼 입맛을 돋우는 건 바로 칼국수다. 홍두깨로 직접 밀고 멸치를 우려 육수를 내고 계절마다 고명을 달리 얹는다. 우리 아이들이나 동생들이 오면 손 두부며 칼국수부터 찾는다.

나는 투덜거리며 홍두깨를 밀고 칼국수를 내 온다. 귀찮고 싫어서 일까? 내 손맛을 아직도 찾는 이들이 반갑다는 내 투박한 마음을 표현 하는 내 방식이다. 후루룩 소리 내며 연신 칼국수를 넘기는 걸 옆에서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입 꼬리가 올라간다. 건강이 지금만큼만 계속 따라주기를 바라면 욕심일까. 우리 막내딸 선옥이가 집에 올 때마다 홍두깨를 밀어 손칼국수를 밥상에 올려줄 수 있다면 그저 족하다. 시골 할머니의 소박한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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