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군인의 회고 “1953년 7월27일 내 인생 가장 기뻤던 그날, 휴전”
늙은 군인의 회고 “1953년 7월27일 내 인생 가장 기뻤던 그날, 휴전”
  • 이현경 기자
  • 승인 2021.01.07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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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복용 (90, 군북면 증약리)
‘1950년 7월 그렇게 전쟁에 내몰렸다’
군북면 증약리에 사는 국가유공자 강복용씨.

 

이번에 만난 사람은 군북면 증약리에 사는 강복용(90)씨입니다. 50여년 전 지은 낡은 흙집을 옥천군적십자 회원들이 재능 기부로 수리하던 그 날 만났습니다. 별도 주방이 없어 불편을 겪던 강복용씨에게 적십자 회원들은 싱크대 설비를 갖춘 자그마한 주방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별채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주방으로 눈길을 돌리던 그 때 낡은 흙집 벽면에 걸려있던 ‘국가유공자의 집’ 문패가 눈에 들어와 심란해졌습니다. 6.25 전쟁에 참전한 상이군경 강복용씨는 나라 지켰던 공로를 인정받아 월에 약60만원씩 나오는 연금과 충북도·옥천군이 지급하는 수당 12만원을 받는 것이 “자랑스럽고,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낡은 집에 살지만 자녀를 다 키워낸 지금 연금과 수당으로 걱정 없는 여생을 보내고 있다며 웃는 강복용씨의 삶을 들어봤습니다. 

자신의 밭에서 콩을 까고 있는 강복용씨. 

■ 엄혹했던 그 시절 조선어를 배우지 못한 증약초 2회 졸업생 

나는 1932년 옥천군 군북면 증약리에서 태어났다.

전쟁만 아니었어도 태어나 지금껏 내 고향 증약리를 지키고 있었을 거다. 6.25 전쟁을 제외하고 마을을 떠난 적 없다. 참 어려웠던 그 시절에도 배웠다. 증약초등학교 2회 졸업생이다. 엄혹했던 일제강점기 조선 학교에 조선 선생이 있었지만 ‘가갸거겨’를 배울 수 없었다. 조선어 책이 없었다. 그 시절 문맹률이 높았던 이유는 학교를 가도 조선어를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조선어를 배우지 못했다. 조선어는 스스로 배우고 익혀야 했다. 얼마나 문맹률이 심각했냐면 6.25 전쟁 중에 징집된 군인 중 한글을 아는 사람은 절반 정도라고 보면 된다. 휴전 됐을 때 전투 나갈 일이 없어지니 시간도 남고 부대 안에서 야학을 만들어 한글을 가르칠 정도였다.

고등교육은 포기했다.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고등교육을 받을 만큼 넉넉한 형편은 되지 못했다. 예나 지금이나 농민의 자식은 서럽다. 증약초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죽향초등학교로 진학했다. 죽향초에는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2년제 고등과가 있었다. 일본말로는 고토과. 편입하고 싶었다. 하지만, 다달이 내야 하는 45원 교육비는 이런 마음을 접게 만들었다. 지금은 의무교육이라고 해서 무조건 교육을 받도록 하고 있다. 게다가 무상교육이라고 한다. 이게 맞는 거다.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았다. 증약초 졸업한 해에 해방을 맞았다.  

해방 이후에는 아버지를 도와 논밭 붙였다. 나락 농사와 콩 농사는 기본이고 그때는 목화도 했었고 형님들과 힘닿는 대로 일했다. 마을마다 호곡군(예비군)이 생기고 대한청년단이 만들어져서 군사 훈련을 했다. 목총으로 입으로 ‘땅’ 소리 내가면서 군사 훈련을 받았다. 총검술도 배웠다. 그때는 몰랐다. 진짜로 전쟁이 나리라고는.
1950년 7월15일 그렇게 전쟁에 내몰렸다.

강복용씨가 간직해 온 앨범을 꺼내보이고 있다.

 

강복용씨의 전쟁 당시 사진(왼쪽)과 젊은 시절.
강복용씨의 전쟁 당시 사진(왼쪽)과 젊은 시절.

■ “전쟁이란, 죽은 사람만 억울한 것”

6.25 전쟁 전에 3.8선은 이미 그어져 있었다. 전쟁 나서 가보니 3.8선 경계는 펜스가 쳐져 있는 정도였다. 울타리라고 보면 된다. 

부상으로 소속을 옮기기 전까지 제1사단 제11연대에 있었다. 두 번의 부상으로 제21사단 제66연대로 옮겼다. 참 많은 전투에 참가했다. 한국전쟁 때 114개 전투가 있었는데 고량포 전투, 낙동강 방어 작전, 노리고지 전투, 다부동 전투, 덕천 전투, 문산 전투, 박천 전투, 서울탈환작전, 영변 전투, 영천 전투, 운산 전투에 나갔다. 

전쟁 나면 사병들만 고생한다. 전쟁 책임은 정치인들한테 있다. 그런데 전쟁 때 안 보이는 게 정치인이다. 장교들도 고생 안 한다. 사병들만 그렇게 죽어간다. 장교들도 사병들이 하는 고생에 비할 바 못된다. 전쟁의 참혹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정신 줄 놓는 이들이 많았다. 정신병, 열병 앓다가 후방으로 배치됐다. 드라마 보면 전쟁 중에 어머니 그리워 울고 하던데 거짓말이다. 어머니 얼굴을 그릴 수 없을 정도로 하루하루가 생과 사의 갈림길에 놓여있다. 소총 들고 싸운 나는 그런 감정을 느낄 조금의 여유도 없었다.

겨울이면 더 서럽다. 뜨신 밥 한 번 못 먹는다. 쌀을 찬 물에 적셔 불린 다음 뭉친다. 겉이 하얗게 언 밥 한 덩이 먹고 전쟁 치렀다. 서럽다 생각들겠지만 서러운 감정 느낄 수 없는 게 전쟁이다. 전쟁 없는 지금은 겨울이 참 춥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전쟁 중이 더 추웠는데 어떻게 견뎌냈을까 싶다. 

한국전쟁 중 멀쩡히 살아남은 이들은 대부분 후방에서 포를 쏘는 병사들로 생각된다. 소총 들고 돌격하는 병사들은 죽거나, 크게 다치거나 두 가지다. 돌격선에서 다친 전우를 들쳐 엎고 나온다? 어머니 얼굴이 그립다는 말만큼 거짓말이다. 내 목숨, 내가 책임지는 게 전쟁이다. 군북면 자모리 사는 매형은 결국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전쟁 중 죽은 이들은 손톱이나 발톱, 머리카락 정도가 가족에게 전달된다. 그거 가지고 제사 지내라는 의미다. 다친 전우를 데리고 올 수 없듯이 전장에서 죽은 병사를 수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돌격 앞으로” 구호에 따라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뛰어들어가는 것은 무사히 간다. 후방에서 포와 기관총을 뒤에서 쏘아 대니까. 그 다음은 사람과 사람 간 싸움이다. 알아서 살아 남아야 한다.  

다부동(칠곡군 일원) 전투를 잊을 수 없다. 다부동 전투는 낙동강 전선을 지켜내야만 했던 한국군 입장에서는 중요했던 전투다. 북한군 역시 낙동강 전선이 중요했다. 이북이 쏘아대는 포가 마치 장대비가 쏟아지는 듯 했다. 낙동강 전선을 지키는 동시에 인천상륙작전이 실시됐다. 살았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북한군은 보급로가 끊어져 인천부터 낙동강 사이 전 부대가 사실상 포위 됐다. 밥 가져다주는 놈 없으면 전쟁은 진다. 산에 숨어있던 북한군이 새까맣게 내려왔다. 

강복용씨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국가유공증
매일 타고다니는 사륜오토바이로 강복용씨의 위치를 알 수 있다.
낡은 흙집 앞 걸린 국가유공자의 집 문패

■ 중공군의 개입, 포로 위기 넘기며 살아남았던 그 때

임진강에서 참 많이 죽었다. 중공군이 넘어왔다. 그때부터는 인해전이다. 운산(평안북도) 전투에 참가했다. 악전고투가 운산 전투다. 아군은 뿔뿔이 흩어졌고 참 많이 죽고, 참 많이 붙잡혔다. 포위당했다. 후퇴 했다. 소총 다 못 가지고 내려오니 방아쇠만 따로 빼서 버렸다. 어디로 후퇴해야 하나 막막한 사이 아군 포 소리를 들었다. 포가 날아온 방향으로 가면 한국군이 있겠거니 했다. 수 십 명이 함께 후퇴했지만 조각조각 갈라져 나중에 보니 4~5명 밖에 안 되더라. 
야속하게도 개가 울었다. 중의적삼에 한복도 입어보고 민간인 행색을 하면서 아군이 빠져나왔지만 낯선 사람보고 짖어대는 개 때문에 많이 잡혔다. 영변(평안북도) 야산에 1사단 15연대가 배치돼 있었고 나는 무장을 한 채 도달할 수 있었다. 와중에 15연대 앞에 북한군 복병을 사살하기도 했다. 

문산-고랑포 전투 때 얼굴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했다. 수류탄피를 얼굴에 맞았다. 천만다행으로 눈을 살짝 빗겨갔다. 서울 병원에서 치료하고 원대복귀 했다. 수류탄피에 또 부상을 당했다. 이번에는 엉덩이에 박혔다. 전쟁은 총으로 하는 게 아니다. 화염방사기, 수류탄, 다이너마이트로 했다. 토굴에 숨어 있는 적군을 소탕하는 용도다. 두 번째 부상에 부산 병원으로 이송됐다가 치료 후 신설된 제21사단 66연대로 배치 받았다. 강원도 고성으로 갔다. 향로봉(강원도 고성군)에서 휴전 됐다. 

1953년 7월27일. 그날이, 살아오면서 그날이 가장 기뻤다. 

조명탄이 하늘을 날았다. 휴전을 알리고, 기쁨을 표현하는 일종의 폭죽과도 같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내 생애 가장 기쁜 날이다. 

나는 참 기쁜데 ‘잃어버린 30년’ 이야기 하며 우는 이산가족들 보면 안 됐다. 지금은 30년도 더 됐다. 혈육이 갈렸다. 통일은 어렵다고 본다. 

통일이 안 된다 하더라도 이들은 만나게 해줘야 한다. 시급하게 풀어야 할 문제다.

1954년 6월1일 일등중사(육군하사) 강복용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열심히 살았다. 전쟁 끝났다고 고생 끝난 건 아니더라. 천여평은 내 땅이고 이것만 가지고는 먹고 살 수 없으니 논 반마지기 밭 500평은 빌려서 붙였다. 들깨, 목화, 콩, 나락 농사 많이 지었다. 철도 회사도 다녔는데 정규직이 아니라 1년 정도 밖에 못 다녔다. 농사만 지어서는 먹고 살 수 없어 막일도 나갔다. 군북에서 대전 넘어가는 4번 국도 만들 때 한 여름에 아스팔트 깔면서 도로 닦는 일꾼으로 돈 벌었다. 그렇게 아들, 딸 키웠다. 

6.25전쟁 참전용사로 증서를 받은 게 1996년이다. 전상군경(직무수행 중 부상을 입고 전역한 사람)으로 인정받은 것이 2008년이다. 전상군경으로 인정된 뒤로 국가보훈처에서 매달 60만2천원 수당을 준다. 충청북도에서 2만원, 옥천군에서 10만원 이렇게 받는다. 노인연금까지 합치면 월97만원 정도 되는데 90살 바라보는 노인이 한 달 먹고 살기 충분한 돈이다. 전상군경인정 받고 나서 살림살이 나아졌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여생 더 바랄 것 없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남긴다.

“전쟁에서 죽은 사람만 억울하다. 정치인이 잘못해 젊은 군인 사지로 내몰았다. 보상 받을 때는 (최전선에) 없었던 사람이 나타나서 먼저 타가더라. 사병들 북진할 때 상사들 전부 피난 가 있었다. 나는 살아 남아 국가 덕 보며 산다. 죽은 사병들만 억울하다. 전쟁은 없어야 한다.”

6·25 60주년 기념 호국영웅기장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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