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시인 문학연구 박사 논문 발행
‘견인의 삶’을 산 정지용 시인의 재발견
“‘제 2, 제 3의 정지용’을 위한 발판 마련하고파”

옥천에 발을 붙인 지 어언 30년이었다. 1992년, 옥천으로 이사 오면서 마음에 ‘화두’ 하나를 깊게 새겼다. 늘 이곳에서 살을 맞대고 사는 옥천사람으로, 정지용 시인이 친근하고 가까운 지역 사람인 것을 언제든 말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그 화두였다. 교과서에서 보는 인물이나 신화적 존재가 아닌 지역에서 함께 숨 쉬는 사람, 정지용 시인으로 지닌 지역성도 살리고 싶었던 문학 장인. 정지용 시인의 삶과 문학 연구에 30년을 매달려 드디어 마침표를 찍은 김묘순 작가(58)를 지난 5일 만났다.

김 작가는 태생부터 옥천사람은 아니었다. 전라북도 진안군 동향면에서 나고 자랐다. 전주 근영여자고등학교를 나온 그가 옥천과 처음 인연을 맺은 건, 옥천으로 시집을 오면서부터였다. 남편(이문형 행정과장)과 신접살이는 청주에서 시작했지만 남편이 옥천군 청산면으로 발령나면서, 1992년 본격적으로 옥천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김 작가의 ‘화두’가 일렁였다.

김 작가의 화두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우석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사를 마친 뒤 정지용 시인의 유일한 소설 ‘삼인’을 연구해 석사 학위를 받았다. ‘원전으로 읽는 정지용 기행산문’, ‘정지용 만나러 가는 길’, ‘정지용 동시집’ 등 정지용과 관련된 모든 것을 책으로 써냈다. 옥천문인협회 회장까지 역임한 김 작가는 현재 옥천시내에서 중고등학생을 가르치는 보습학원 ‘훈민정음’을 운영하고 있다.

■8년을 몰입했던 박사 논문의 끝, 헛헛함

지난 24일 김 작가는 우석대학교 현대문학전공 정지용 문학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고 논문을 발행했다. 정지용 시인의 전기적 삶과 시, 소설, 수필을 아우르는 연구의 집대성이었다. 2013년 2월 정지용의 처음이자 마지막 소설인 ‘삼인’을 연구해 석사 학위를 받은 김 작가는 쉬지도 않고, 같은 해에 정지용 시인 관련 연구를 이어갔다. 그렇게 딱 8년이 걸렸다. 김 작가는 “처음 옥천에 올 때는 정지용 시인의 뒤를 잇는 시인이 돼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참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정지용 시인의 발자취를 쫓는 정지용 시인 연구자로 걸어온 길에 마침표를 하나 찍는 것 같아, 홀가분하고 좋을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헛헛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논문 집필을 끝내고 발행을 맡긴 날, 김 작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미용실에서 파마하기’였다. 김 작가는 “정지용 시인을 연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헤어스타일에 큰 변화를 준 적이 없었다. 열심히 묶고 다니다가, 더 이상 묶기 어려울 때 잘랐다. 그저 ‘자르고 묶고’의 연속이었다”며 바뀐 헤어스타일이 어색한 듯 머리를 매만졌다. 그는 “한껏 몰두했던 논문이 막상 다 끝나고 나니, 헛헛하고 답답하기도 해서 기분전환도 할 겸 헤어스타일을 바꿨다”고 덧붙였다. 김 작가가 정지용 시인 연구에 얼마나 몰입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정지용의, 정지용에 의한, 정지용을 위한 연구

정지용 시인의 진면목을 집대성하는 것, 김 작가가 박사 연구에서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한 부분이었다. 김 작가는 “정지용 시인의 생애에서 잘못된 부분들은 바로 잡으려고 했고, 교과서 외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것들도 다루려고 했다”며 “정지용의 시와 산문들이 어떻게 세상에 나오게 됐는지를 그 삶을 함께 조명하면서 인간 정지용을 조금 더 이해하는 방향으로 연구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김 작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정지용은 호화로운 생활을 한 귀공자나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은 지식인으로 보는 경우나, 시를 잘 썼기 때문에 때로는 부러움이나 시기의 대상으로 인식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며 연구의 지향점을 강조했다.

그렇게 뽑아낸 단어가 ‘견인(堅忍)’이었다. ‘인내하다’는 의미가 담긴 단어였다. 김 작가는 “연구를 하면 할수록 정지용 선생님이 평생을 괴로워하고 불안해하면서 살았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며 “오히려 시를 쓰면서 힘들고 굴곡졌던 삶 속의 불안과 괴로움을 견뎌냈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정지용 시인이 살았던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이 가졌던 시대상, 딸과 아들의 죽음을 봐야만 했던 가족사나 친우의 죽음 등이 그를 힘들게 할 수밖에 없었다”며 “신문사 주필에, 명성이 자자한 시인 등 표면적으로는 너무나 잘 산 것 같지만, 정지용의 내밀한 부분은 슬픈 것들이 잠재했고 항상 불안증과 외로움에 시달렸다. 그에게 시는 삶을 버티게 한 매개였다”고 언급했다. 참고 견디는 일의 연속이었다는 것, 김 작가가 ‘견인’을 논문의 한 축으로 본 이유였다.

김 작가는 정지용 시인의 산문에도 깊이를 더했다. 상대적으로 잘 알려진 시에 비해, 정지용 시인의 산문도 문학적으로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느꼈던 탓이었다. 김 작가는 “정지용 시인은 실제로 산문을 더 쓰고 싶어했다”며 “휘문고보를 함께 다녔던 이태준을 부러워했고 시기했던 감정이 있었던 게 글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고 서술했다. 특히 그는 “정지용 시인이 ”나도 산문을 쓰라면 쓴다. 태준만치 쓰라면 쓴다“고 말했다”며 “지인의 ‘시가 위에 있냐, 산문이 위에 있냐’는 질문에, 정지용 시인이 딱 말하지 않고 발을 뺀 모호한 대답을 했다”고 말했다. 산문에 대한 정지용 시인의 ‘남모를 짝사랑’도 함께 다루고자 김 작가의 노력이 빛을 발했다.

■“옥천 어디에서든 정지용을 만나도록 하고파”

정지용 시인이 지닌 옥천만의 색깔을 돋보이게 하면서도, 일상에서 쉽게 접하기 위한 고민이 늘 김 작가의 머릿속에 자리했다. 그 중 하나가 ‘지용 밥상’에 대한 제안이었다. 김 작가는 “2014년 괴산 유기농 엑스포 당시, 중원대학교에서 ‘21세기와 여성의 역할’이라는 논문 발표를 준비하면서, 벽초 홍명희 작가의 소설 ‘임꺽정’ 속 음식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며 “그때 떠오른 아이디어가 ‘지용 밥상’이었다. 문인들의 시나 산문과 같은 글고 책 외에 일상에서 입체적으로 정지용 시인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제안했는데, 잘 돼서 좋았다”고 말했다.

이런 행보가 김 작가는 처음이 아니었다. 원전 정지용 기행산문을 엮거나, 정지용 시인의 발자취를 따라 그대로 여행한 기행글로, 옥천 외의 지역이나 공간 곳곳에 묻어 있는 정지용 시인의 흔적들을 찾아보기 위한 작업을 이어갔다. 김 작가는 “통영이나 거제도에도 정지용 시인의 흔적이 있었다. 부산에서 회를 먹었다는 내용의 글이 산문에 실려 있기도 했다”며 “정지용 시인이 다녔던 곳의 흔적들을 모아 ‘정지용 여행코스’도 마련해보고 싶다”고 밝혔다.

그래서 김 작가의 고민은 다시 ‘옥천’으로 돌아왔다. 매년 5월이면 진행되는 지용문학제가 이벤트성 지역축제로 끝나는 것이 아쉬웠기 때문이다. 김 작가는 “정지용과 관련된 자료들을 모아서 지역 내 도서관이나 문학관 등을 마련하고 싶다”며 “정지용 시인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연구 서적을 구하기가 힘들거나 자료 찾기가 힘들 때 옥천의 지용문학관을 찾아오거나 모든 자료를 볼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그는 “그래야만 정지용 연구자들이 지금보다 더 많아질 수 있고, 옥천에서 제 2, 제 3의 정지용이 탄생할 수 있을 거라 본다”고 덧붙였다.

앞으로 정지용 연구총서도 만들고, 정지용 시인과 관련된 것들을 옥천군 내 어디서든 볼 수 있도록 주민 중심의 활동을 이어가고 싶다는 김 작가. 정지용 시인과 함께 한 지 30년이나 됐지만, 박사 학위 이후가 곧 정지용 시인과의 마침표는 아니었다. 여전히 그의 삶은 정지용 시인과 함께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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