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의 힘/김명희

올해 초 뜻하지 않게 병원에 가서 큰 수술을 받은 일이 있다. 그 후 사람들은 내게 말한다. 먹고 싶은 거 먹고 놀러도 가고 옷도 사 입고 한마디로 인생을 즐기라고 한다. 죽으면 말짱 헛일이라고 한다. 맞는 말 같기도 해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과연 그런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있을까? 물질이든 시간이든 욕구를 소비하는 삶이 인생의 최대 목표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특별히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래서 기를 쓰고 무언가 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누구와 경쟁을 해서 이겨야 된다는 생각도 없었고 나 자신조차도 이겨야 된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았다.

초등이나 중학교 다닐 때 이런저런 대회에 나가라고 하면 ‘아~ 왜 하필 나보고 이런 걸 시키나’ 하고 꽤나 힘들어했다. 물론 못하겠다고 당당하게 말을 못 해서 꾸역꾸역 나가기는 했다. 작은 일이라도 무슨 직책을 맡으라고 하면 질색을 했다. 지금처럼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야 알아주는 사회에는 잘 맞지 않은 성격이다.

거창한 인생의 목표 같은 것도 없었다. 학교는 가라고 하니까 무조건 열심히 다녔고, 무얼 해서 성공을 해보겠다고 악착같이 시도하지도 않았다. 막연하게 우리 집이 가난하니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서’라는 개념은 없었다. 누구와 경쟁을 해야 하는 달리기 같은 것을 제일 싫어했다. 달리는 것을 잘하지도 못했지만 출발선에서 기다릴 때의 그 초조감을 견디기 힘들어 했다.

엄마 말씀이 갓난아기였을 때 배가 고프거나 아플 때도 울지 않아서 동네에 안고 나가서 “야가 아무래도 등신인가 봐요~” 했다고 한다. 지금도 누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걸 잘하지 못한다. 처음부터 세상에 맞서서 싸울 용기가 없었던 것 같다. 이길 자신이 없으니 일찌감치 패배주의에 빠졌는지도 모른다. 시험 보는 것에는 그다지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던 걸 보면 누굴 이겨야 된다는 부담이 없었으니까 그랬던 것 같다. 이렇게 살다 보니 그다지 잘 살아온 것 같지 않다. 흐르는 물에 떠밀려 내려오는 풀잎처럼 이리저리 밀려다니며 인생의 무게를 감당하며 살았다. 벌써 나이 60 가까이에 와 있고 뒤돌아보니 행복했던 것 같지도 않다. 굳이 행복해야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냥 사는 거지 거기에 무슨 의미를 붙이고 안달복달 해야 하나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기쁜 날보다 괴로운 날이 많았다. 그 괴로움도 거쳐 가야 할 과정인가보다 못 이긴 체 받아들였고, 인생의 과제에 앞서 맞서기보다는 피하기에 급급했다. 책을 보며 괴로움을 잊고 위로를 받으려고 한 것이 그나마 나름대로 노력한 것이다. 적극적으로 시도한 유일한 탈출구였다고나 할까? 치열하게 맞서기보다는 늘 회피했다. 싸울 일이 있으면 그냥 포기하고 외면하고 지는 게 이기는 거라는 소극적인 태도로 상황을 마무리하기 일쑤였다. 요즘 말로 자존감이 없었다고 해야 하나?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큰 상처가 되는 말을 들었다. 화가 나서 한 말이었지만 내 상태를 적나라하게 지적하는 말을 듣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이런 정신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난생 처음 정신과를 찾아갔다. 의사 말이 나는 모든 잘못을 자신에게 돌리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남의 잘못과 내 잘못을 구분하지 못하고 무조건 내 탓을 한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우선 아주 사소한 잘못이나 실수라도 찾아내고 내가 먼저 잘못한 것이 있는지 돌아보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 정도로 자학이 심한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러나 그것을 알았다고 해서 괴로움의 크기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어서 겨우 안정제 처방을 받고 약으로 불안과 불면을 달래는 것밖에 해주지 못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괴로움을 덜어줄 뾰족한 묘약은 없다는 것이다. 큰 도움은 안되었다. 그동안 쌓였던 마음의 찌꺼기를 돈을 내고 하소연 한 것에 불과하니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다른 방법으로 인간의 근본적인 성격이나 인간관계에 대해 집중적으로 알아보는 계기가 되었는데 아직은 이렇다 할 특정한 방법은 찾지 못했다. 누구는 나 자신을 위해 상대를 용서하라고 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아예 관심을 꺼버리라고 하고, 또 어느 곳에서는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고 자신을 사랑하라고 각기 다른 처방을 내놓는다.

책이나 이런저런 강의에서 얻은 교훈은 그들의 상황에 맞는 처방으로 필요에 의해 왜곡되거나 변질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인간에 대해 깊이 연구를 한다고 해도 인간 개개인이 천차만별로 어떤 정해진 규칙이 있을 수 없으니 자기 자신에게 맞는 방법은 자신이 구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을 뿐이다.

과연 타인에 대한 이해가 가능한 일인지에 대한 깊은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소득이라면 소득이다. 타인과 나와의 관계, 즉 인간관계에 대한 연구는 진행 중이다. 그러니까 나는 뒤늦게 주어진 인생의 과제를 아직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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