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리 박계문
(1941년 1월 20일 辛巳生. 80세)

 ‘아야, 아야’ 아내 신음소리에 내 맘이 괴롭다. 수술로도 치유하지 못한 두 다리의 퇴행성 관절염은 우리 집에 시집와서 얻은 몸 고생의 상징이 아닌가 싶다. 아내한테 훈장은커녕 골병든 몸만 남겨 준 것 같아 내 맘이 더 아프다. 거기에 무뚝뚝하고 속을 내보이지 못하는 성격으로 아직 한 번도 미안하단 말도 못했는데 더 이상 미룰 말이 아니다. 미안하고 고맙소.

■ ‘아들 부채의식’이 나를 고향에 눌러 앉혔다 

미스터 트롯인가 하는 가수들 중 누군가 ‘고맙소’라는 노래를 부르며 심금을 울리더니 내 마음도 그 노래의 제목마냥 ‘고맙소!’요. 나에게 아내는 선생이었고 ‘안 해’(아내)였고, 짝꿍이었고, 배필이었고 누이였고 동반자였다. 

‘이 나이 먹도록 세상을 잘 모르나 보다. 진심을 다해도 나에게 상처를 주네. 이 나이 먹도록 사람을 잘 모르나 보다. 사람은 보여도 마음은 보이질 않아. 이 나이 되어서 그래도 당신을 만나서 고맙소, 고맙소, 늘 사랑하오!!’

어느새 아내가 시키는 심부름을 기꺼이 하는 할배가 되었다. 고생 많이 한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이 옆에서 챙겨주는 것이다. 그게 내 마음의 표현이다. 아내를 옆에 앉히고 병원 가는 길에 조수석에 앉아있는 아내를 한참동안 바라본다. 아내는 “왜요? 내 얼굴에 뭐 묻었소?” 하는데 나는 암말도 할 수가 없었다. 

꽃같이 어여쁘던 각시가 이제는 주름살 많은 할멈이 되어 있지만 내 눈에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이요. 내가 언제든지 운전해 줄 테니 당신은 오래오래 조수석에 앉아주기만 하면 돼요. 그래도 내가 요샌 좀 다정하지 않소? 차에 탈 때도 내릴 때도 옆에서 거들어주고, 의원 가면 접수도 해 주고 처방전 받아 약도 타 드리지 않소? 내가 잘 대해준다고 나를 머슴같이 부릴 생각일랑은 마시오. 나도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니까...

나는 우리 아버지가 마흔 넷 되던 해에 낳은 늦둥이다. 다 늦게 낳은 아들이라 각별한 애정으로 늘 챙겨 주시면서 옆에 끼고는 이런 말씀을 하시었다.

‘뼈대 있는 박혁거세 시조(始祖)로부터 68대 손, 충헌공파 22대손 현자 돌림인, 양반 가문의 후손으로 당당하고 거짓 없이 살아야 된다.’ 아버지 말씀 쫓아 가문의 체통을 지키며 살아가느라 나도 힘들었는데 아내도 힘들었다. 가풍과 가훈을 한 평생 멍에처럼 지고 산 아내가 가련하다. 

부모님은 거지가 밥을 얻어먹으러 와도 개다리소반에 국과 밥을 차려주었다. 우리 집안의 훌륭한 가풍이다. 

나는 그 시대에 흔치않게 청산고등학교까지 졸업했다. 도시로 나가서 괜찮은 직장을 잡아 ‘화이트 칼라’로 살아갈 수도 있었다. 서울에 사시던 집안 어른이 내가 상경만 하면 좋은 직장을 알선해 주신다고도 했다. 그때는 알음알음으로 서로 직장을 소개해 주고, 앞에서 잘 끌어주면 출세 길도 열려있던 시절이었다. 나는 서울로 가서 보란 듯이 살고 싶었다. 그런데 부모님이 말렸다. 큰형이 6.25때 돌아가시니 부모님은, 자식들이 눈에 보이는 곳, 고향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길 바라신거다. 다행히 논과 밭이 제법 있어서 식구들 밥 안 굶기고 살만큼은 되었다. ‘아들 부채의식’이 나를 고향에 눌러 앉혔다.  

■ 내 인생의 8할은 아내 몫이다.

벼농사 지어 소를 키웠던 그 세월이 아득하다. 볏짚을 쌓아놓고 아침저녁으로 여물을 썰어 소죽을 끓이던 시절이었다. 소를 잘 키우려면 영양가 있는 곡물이 필요한 법, 밭에는 콩을 심고 옥수수와 고구마도 심었다. 여물 끓일 때 콩깍지를 함께 넣어 푸욱 삶으면 구수한 냄새도 좋았지만 소들이 아주 잘 먹었다. 거기에 쌀겨를 보태거나 옥수수대까지 함께 삶으면 영양 풍부한 소죽이 되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들판에서 베어온 날(生)풀도 먹였지만 겨울에는 여물을 삶아 먹였으니, 나 혼자 다할 수 없던 그 일을 아내가 옆에서 거든다고 애를 많이 썼다. 맏이도 아닌데 집안의 대소사를 맡아서 하느라고 정말 고생이 많았다.

아내는 시집올 때 동네가 훤할 정도로 어여쁜 미인이었고 야무진 여자였다. 아내 덕분에 내 인생도 알곡으로 남게 된 것이다.

또 포도농사 지을 때 봄이면 포도순 따고, 초여름엔 포도에 봉지 씌우고, 한 여름에 수확하여 상인한테 넘긴다고 애썼다. 뜨거운 볕을 머리에 이고, 알알이 맺은 포도송이를 치켜들고 “올해 포도 농사가 잘 되었어요. 포도 팔아 아이들 등록금 내면 되겠어요!” 라며 활짝 웃던 아내, 가냘픈 몸으로 무슨 일이든 거뜬히 쳐 냈으니 내 인생의 8할은 아내 몫이다.

1971년에 국제승공연합 충청북도 단장으로부터 표창장을 받았다. 효성이 지극하다고 받은 그 상장은 사실 아내 몫이다. 이미 마음으로는 아내한테 주었다. 

5남매, 2남 3녀의 자식들도 고맙다. 특별히 내세울 이름은 아니지만 아들들은 직장 잘 다니고, 사위들은 공무원으로 제 할 일 잘 하니 그만하면 만족한다. 사람이 어디 성명(姓名) 돋고 큰 벼슬 얻어야 잘 사는 것인가. 가족들 건사 잘 하고 건강히 잘 사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삶이라 이름 지어 충분하다.

우리 같은 남정네들은 이 나이 되어야 비로소 철이 드는 모양이다. 그걸 너무 늦게 깨달으니 문제지. 하긴, 요즘 젊은이들은 자기 각시를 하늘처럼 받들고 산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우리 집 아들들이야 아비 닮아서 그리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나처럼 뻣뻣하고 무정한 사람은 아닌 듯 싶어 다행이다. 머리에 부은 물이 발밑에 떨어진다고 나는 우리 아버지를 보고 배운 아들이니 옛날식으로 살았다 해도, 요새 사람들은 문물을 잘 받아들이고 가족을 태산같이 챙기기를 바랄 뿐이다. 가을걷이 끝난 들판 같은 날들이다. 아내가 내 곁에 있으니 알곡을 남겨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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