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리 이영애 (1937년 4월 丁丑生 85세)

■ 두부 만들던 고단했던 날들

내가 친정에서 어렵게 살던 중 동네 아주머니가 백운리에 솜씨 좋고 맘씨 좋은 총각이 있다며 중신을 섰다. 다리를 살짝 절긴 하지만 기술자니까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을 거라며 청을 넣었다. 그래서 어렵게 살던 친정집 입도 덜어 줄 겸, 사는 것만 해결되면 나는 조용히 살림이나 살면 되겠다 싶어 시집을 왔다.

시어머님의 시집살이가 심하긴 했다. 그 시절엔 다들 시집와서 편한 밥 먹고 살기 힘들었으니 나도 그러려니 하면서 견뎌 나갔다. 그런데 기술자라던 영감은 조금만 일을 해도 힘에 부쳐서 고된 일을 할 수 없는 분이셨다. 목공 기술자를 부르면 나도 따라 나서야 했다. 문을 짜면 뒤에서 잡아주고, 문살의 구멍을 뚫는데 끌과 망치질로 파내고, 조공 노릇을 자주 했다. 전답도 없는 집이라, 식구들 먹이고 입히고 살아가는 모든 것을 돈으로 사야했는데 아이들은 태어나지, 먹성은 좋지, 어째야 하겠나? 나는 두부 장사로 나섰다. 

두부를 하려면 준비해야 할 게 많았다. 젤 먼저 나무를 해야 했다. 영감 다리가 아프니 산에 가서 어디 나무를 해 오시겠나? 밥 하고 목욕물 덥히고 소죽 끓이는데도 필요했지만 두부까지 만들어야 하니 땔감이 두 배나 필요했다. 

우리 몫으로 된 산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한참을 걸어서 박씨 집안 문중 산으로 솔가리를  긁으러 갔었다. 아침에 유난히 매캐한 연기가 아랫목으로 침입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는 내가 솔가리 밑에 넣은 청솔가지로 불을 피웠기 때문이었다. 솔가리로 한동안 아궁이를 덥혔다가 불길끼리 화답을 할 즈음 청솔가지를 넣어야 그나마 연기를 줄일 수 있는데 내가 맘이 앞서서 그랬던 모양이다. 갈퀴와 낫과, 새끼줄을 들고 산으로 갔을 때 아들이 자주 따라 왔다. 내가 낫으로 탁탁, 솔가지를 쳐 내리면 아들은 그것들을 한 곳으로 모았다가 남의 눈에 띄지 않는 밭둑 밑에 갈방 잎을 얹어서 숨겨 두곤 했었다. 시간이 지나 산에서 저절로 마르면 이동도 쉽고 불길이 훨씬 잘 붙었으니까. 솔방울과 솔가리는 불쏘시개로도 쓰였지만 밥을 짓거나 보리쌀을 삶을 때 뜸들이기에 알맞았다. 

새끼줄을 두 개, 혹은 세 개 깔고 그 위에 단을 지어 솔가리를 차례대로 얹고는 무거워서 언덕에 받쳐두고 머리로 이어다 날랐다. 날 도운다고 수북이 모아둔 솔방울을 비료포대 몇 개에 나눠지고 앞서가는 아들 모습 보면서 내 속은 숯검정이 되었다. 또래들이 모두 학교에 간 시간에 우리 아들은 이 애미를 따라 산으로 나무하러 다녔다. 내가 아들 학교 제대로 못 보낸 한을 누가 알아줄까나

밤 내내 불린 콩을 맷돌에 갈아 삼베 보자기에 걸러내면 맑은 콩국이 나왔다. 그 국물을 뭉근히 졸이면 몽글몽글 끓었다. 널찍한 사각 판때기에 밥 수건 깔고 부은 뒤, 무거운 걸 눌러두면 굳었고, 그걸 칼질하여 이 동네 저 동네 이고 다니면서 팔았다. 명절 대목 밑에는 하루에 6판까지 두부를 만든 적이 있었다. 그런 날은 몸은 고되지만 두부 판돈으로 아이들 설빔도 해 입히고, 떡도 넉넉히 만들어 먹으면 나는 안 먹어도 배불렀다. 자식 입에 밥 들어가고, 자식 몸에 새 옷 입히는 것처럼 재미나는 일은 없다.

■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인정을 놓지 않았다.

자식들은 여섯을 두었다. 그 입들이 제비새끼처럼 나만 바로보고 사는데 뼈가 가루로 부서지더라도 일하고 또 일해야 했다. 시어머님 수발도 모두 내 차지였다. 그래도 우리 자식들은 엄마 서러운 거 다 알고, 일도 거들고, 알아서 동생들 챙기고, 자기 밥벌이 하느라 애썼다.

다리 성치 않은 아버지 무거운 짐 들고 오신다면 달려가서 먼저 받아 드리고, 할머니 술 드시고 싶다 하시면 도가에 주전자 들고 가서 됫박술 받아오고, 담배 심부름도 잘 했다. 

그 당시 얼마나 쌀이 귀했던지, 그 생각하면 청솔가지로 불 땐 것처럼 눈이 맵다. 보리쌀을 씻어서 쌀뜨물을 내고 나물밥을 지었다. 쌀 몇 톨 얹으면 할머니와 아버지 밥에 섞어드리고, 내 자식들은 꽁보리밥 물고 자랐다. 두부장사 나섰다가 남은 두부가 있으면 배고픈 자식들 생각이 나서 잘 챙겨왔었다. 서로 먹으려고 싸우지도 않고, 어른 먼저 드시라 예의 차리고, “엄마 배고플 텐데 잡수세요,” 하며 챙기던 아들이 지금까지도 이 애미를 돌보고 있다. 그 세월이 60여 년이 되었다.

세월이 참 빠르게 흘러갔다. 우리 아들 종대가 언제 환갑 나이가 되었는지 돌아보면 화살처럼 지나간 게 세월이다. 아들은 외출하면 “엄니, 나갔다 올게요. 기다리지 마시고 저녁 진지 드세요.” 들어올 때는 “엄니, 진지 드셨어요? 안 드셨으면 제가 얼른 차려 드릴게요.” 이 애미한테 쏟는 정성을 누가 따라올 수 있을지. 허리 아파서 수술 하고, 다리 아파서 입원할 때도 아들은 수족같이 애미를 챙겨주었다. 매주 서울 병원에 가서 검사받고 치료받고 그 무시무시한 수술을 여덟 번이나 할 때,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챙겨주니 내가 늙어서 무슨 호강인지 싶었다.  
우리 영감 환갑이 되기 전에 돌아가시고 우리 종대가 힘이 되었다.  

세탁소 하는 종필이도 내외간에 효성이 지극하다. 

큰딸 화숙이는 고생을 많이 시켜서 지금도 미안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시집가서 옛 말하며 잘 살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둘째딸 정숙이, 셋째딸 근숙이도 화목한 가정 일궈서 살고 있으니 난 걱정이 없다. 못난 부모 만나서 남들처럼 공부도 못 시켰고, 번듯하게 도와준 일도 없었는데 다들 잘 살아주니 애미가 미안하고 부끄럽기만 하다. 철마다 옷 사 주고, 용돈도 자주 보내주니 자식 여럿 낳은 보람이 있는 게지. 
애미의 모든 사랑과 고마움을 너희들에게 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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