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엘리펀트>를 보고 나치전범 아이히만’이 떠올랐다. 유대인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예루살렘 재판을 관람하고 큰 충격을 받는다. ‘나찌 전범 아이히만은 ‘유대인 절멸’을 기획하고 교사한 사람들, 곧 히틀러를 정점으로 한 나치 지도부의 명령을 받은 처지에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나치당의 강령도 알지 못했고 히틀러의 <나의 투쟁>도 읽지 않았다. 그의 직급은 나치 친위대의 중간관리자(중령급)에 지나지 않았다. 히틀러는 그를 대면할 기회가 없었을 가능성이 크며, 설령 대면했다 해도 아이히만의 이름은커녕 얼굴도 기억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법을 준수하는 ‘건실한 시민’이었던 아이히만은 명령받은 일을 이행하는 것을 의무라고 느꼈고, 유대인 전문가로서 그들을 수용소에 배분하는 일을 착실히 수행했다.(중략) 아이히만은 난데없이 나타난 악마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규칙과 명령과 ‘주어진 이상’에 맞추려고 노력한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악의 평범함’은 우리 일상에서 볼수 있을 법한 성실한 아저씨 ‘아이히만’을 보고 만든 용어다. 생각을 멈추면 누구나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나무보다는 숲을 보라는 메시지는 홀로코스트의 아픔이 지워지지 않은 유대인들에겐 불편한 진실이었다. 더구나 유대인 가스실에 일했던 부역자 중에 유대인들도 한몫했다는 팩트체크까지 하는 바람에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의 과녁판이 되었고 비자발적으로 격리될 수밖에 없었다. 영화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출판할 당시의 기록이다. 홀로 코스트의 아픔을 위로하는 영화도 필요하지만 홀로 코스트의 재현을 막을 수 있는 사회적 구조에 대한 분석도 필요하다. 안타깝게도 히틀러가 역사의 교훈이 되지 않았다. 1964년 인도네시아 공산당원 100만명 학살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와 중국의 문화대혁명, 5.18 민주화운동, 보스니아 내전과 최근 미얀마의 로힝야까지 사유하지 않는 인간을 양육하는 사회에서 홀로 코스트는 끝나지 않았다. ‘한나 아렌트’의 메시지는 의미심장하다.  

콜롬바인 고등학교의 가해자였던 ‘딜런 클리볼드’의 어머니 ‘수잔 클리볼드’는 사건이 일어나고 17년 이후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란 제목의 책을 냈다. 수잔의 평범한 행복은 1999년 4월 20일 이후 무너져버렸다. 다른 모든 평범한 엄마들처럼,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세상에는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다”고 가르쳤다. 어릴 때부터 아이 돌보는 아르바이트를 했으며, 대학에서는 아동발달과 아동심리를 전공했고, 직장에서는 아이들과 어른들을 가르치는 일을 오래 했다. 그래서 자신은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햇살’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여느 아이처럼 밝고 맑은 아들 ‘딜런 클리볼드’가 ‘에드 해리스’와 함께 학교에 들어가 서바이벌 게임처럼 총을 난사하기 전까지는. 교사와 학생 포함 13명이 그들의 표적이었다. 갑자기 가해자가 되어 버린 수잔에게 차가워진 현실의 묘사는 책을 읽는 내내 뭉클하게 한다. 수잔의 궁금증은 ‘왜?’였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 ‘딜런 클리볼드’처럼 햇살은 아니었고 엄마 에바를 집요하게 괴롭히는 아들이었다. 결국 케빈은 평소 사이 좋았던 아버지(정략적인 친절이었다)와 여동생 그리고 학교에 가서 몇 명의 아이들을 석궁으로 죽인다. 수잔의 심리적인 죄책감과 비난은 에바를 통해서 확인 할 수 있다. 에바도 수잔처럼 케빈의 행동이 궁금했다. 결국 2년이 지난 후 케빈의 생일날 소년원을 찾아가서 케빈에게 묻는다.  ‘왜? 이제는 말할 때가 되지 않았니?’ ‘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어’ 케빈의 대답이다. 모호한 대답 때문에 역시 소시오패스로 분석하는 분들이 있겠지만 일탈의 절정기에는 누구도 자기분석이 어렵다. 대답이 끝난 후 케빈과 에바는 이제껏 하지 못한 포옹으로 마무리한다. 감독의 대답이자 엄마 에바가 답을 확인하는 쇼트다.

그리고 수잔도 ‘왜?’에 대한 나름의 답을 읊조린다.

‘모든 게 정상적으로 보일 때도 뭔가 심각하게, 심각하게 잘못되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 부모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있다. 특히 신념이 강한 부모들의 경우 이중성을 보이는 자녀들이 많다. ‘부모들은 나를 착한 아이로 알고 있을 거’라는 말을 종종 듣는 경우가 있었다. 자녀들과 대화의 눈높이가 안맞는 경우 행복한 착각은 진행형이고 제 2의 수잔 클리볼드의 고백은 또 다른 곳에서 나올 것이다. 소시오패스는 없다. 더 이상 소시오패스에게 사회의 역기능에 대한 책임을 돌리지 말자. 

그리고 소시오패스를 소재로 관객과 시청자를 꼬시려는 영상 미디어의 선정성이 도를 넘고 있다. 이제 제발 이런 영상이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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