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면 백운리 정석호 (1939년생. 82세)

내 몸에는 아무래도 바람이 가득 들어찬 모양이여,
날이 풀리고 동풍이 불어오면 남녘의 갯바람이 못 견디게 그립단 말이지. 훌훌 날아가서 갯내음이 가득찬 포구로 가고 싶은 맘이 꿀떡이여. 마산(지금은 통합 창원시가 되었대) 양덕동 터미널에서 내려 10분만 걸어가면 어시장이 나와. 아줌씨들이 길거리에 쭈욱 고무대야를 펼쳐놓고 생선을 팔아. 손님이 이놈, 저놈, 골라서 주문만 하면 금방 회를 떠서는 상을 차려 주는데 대가리는 살아서 꿈틀거리고 투명한 살점은 윤기가 쫘르르 퍼져. 그야말로 빛이 반짝반짝 나는 것 같단 말이야. 초봄엔 도다리 쑥국을 먹었고, 쭈꾸미와 낙지를 데쳐 먹고, 보리누름엔 딱새라는 갯가재가 있는데 고놈도 참 맛났어. 미더덕이라는 해산물은 그 근처에서만 자란다더라고. 된장국으로 끓이면 아주 맛이 좋아. 뜨거운 걸 잘못 터트리면 입천장이 데여서 벌겋게 부어도, 맛에 취해 아픈 것도 모를 지경이었어.

■ 노년을 싱겁지 않게 보내는 맛 거리들 

요즘, 집에만 갇혀 있으니 살맛이 안 나. 나이가 있으니 어딘들 함부로 나다니지도 못하지만 요새는 또 코로나19 때문에 꼼짝달싹을 못하고 사네. 집에서 혼자 소주나 몇 잔 마시고 티비 보다가 노래 듣다가 그러고 사는게지 뭐. 채널만 돌리면 얼마나 많은 프로그램이 있어? 바다에 가고 싶은 맘을 달래려고 낚시프로를 자꾸 보게 돼. 이즈음에는 갯바위 낚시를 하면 감성돔과 노래미가 잘 문다지 아마. 꽁치도 잡히고 도다리도 자주 올라 올테지. 

저수지에는 주로 붕어가 잡힐거야. 붕어 몇 마리 건져서 찜 해 놓고 꼴꼴꼴 소리 나게 소주 따라서 마시면 최고지. 재수 좋으면 메기나 가물치도 잡는데, 그건 열 번 낚시 갔다가 한 두 번 있을까 말까한 정도지만 말이야. 수초 사이로 돌아 댕기던 붕어가 배고플 때 입질을 한단 말이지. 그래서 붕어의 식사 시간을 맞춰나가면 잘 물어. 낚시꾼들이 새벽녘과 저녁 해질 무렵 낚시에 집중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겨.

스포츠 방송도 자주 들여다 봐. 골프니 탁구니 이런 것보다 축구 배구를 좋아해. 나는 큰 공이 좋은가벼. 축구와 배구는 선수들이 자꾸 움직여야 되잖아. 나는 그런 활달하고 왁자지껄한 모습이 맘에 들어. 잔디밭에서 공 한 개를 놓고 22명이 두어 시간 뛰어다니는 축구를 보고 있으면 속이 시원해져. 내가 축구 선수가 되어 공을 따라다니며 바람을 가르는 게 느껴지거든. ‘슛’으로 골대가 철렁하고 흔들릴 때면 내 온 몸이 짜릿해져. 직접 볼을 찰 수는 없으니 티비 보면서 대신하는 게지. 외국팀은 레알마드리드팀을 좋아하지. 음바페라는 선수 볼 차는 것 보면 환상이지. 우리나라 손흥민 선수가 프리킥 넣을 때 봤어? 손흥민은 아버지가 훌륭한 분이야. 아들을 고등학교 때부터 유럽으로 데려가서 유학을 시켰다잖아. 부자가 대단해. 참말로 대단한게지. 아들의 재능을 어릴 때부터 눈여겨 본 부친도 대단코, 아버지를 믿고 물설고 낯선 곳에서 열심히 훈련하여 세계적인 선수가 된 것도 대단한거여.
이쯤 얘기했으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겠어?

나는 말이야. 청산면 백운리에서 태어났제. 그 시절 농촌이 다 그랬지 뭐. 우리 집이라고 별 수 있었겠어? 군대에서 운전을 배웠어. 내가 젊을 때 상당히 빠릿빠릿 했거든. 제대하고 나서 경찰서에 운전수로 취직을 했지. 경찰서라는 곳이 얼마나 바쁘고 일이 많아? 자다가도 불려나가서 운전하고, 또 사회에 뭔 일이 생기면 몇 날 며칠을 꼼짝없이 사무실에서 밤샘을 하고 10여 년을 그렇게 지내고나니 사람들이 싫어지더라고. 

■ 코오롱 고속버스로 전국을 누비다

그런 중에 결혼을 하게 된 겨. 내 나이가 29살 이었어. 색시는 나보다 7살이나 어린 처자였지. 나는 결혼 할 생각도 별반 없었는데 부모님이 큰일 이라고 서두르시대. 서른 넘기면 아무도 안 쳐다보는 노총각 소리 듣는데다가, 뭔 깊은 병이 있어서 장가를 못 가는 거라고 수군댄다는 거여. 부모님의 그 말씀을 들으니 나도 정신이 번쩍 드는 거여. 중매로 만나 선 한 번 보고 두 달 뒤에 바로 결혼식을 올렸어. 내 색시는 곱고 얌전한 사람이여. 그래 결혼하고 나니까 경찰서에 가는 것이 더 싫어지는 거여. 색시한테 서울로 가자고 했어. 내가 운전 기술이 있으니 뭐든지 가족 건사할 자신은 있더라구.    

여기저기 소문을 들어보니 택시는 서울시내 길을 잘 알아야 한다지, 사장차를 몰면 부르면 언제든 가야 한다지, 맘에 안 들더라구. 우연히 친구가 고속버스 회사에서 기사를 모집한다잖아. 혼자 조용히 할 수 있고, 여기저기 팔도 유람하면서 돈을 벌 수 있겠다 싶어 마음이 동하더라구. 그래서 고속버스 운전을 하게 된 거여.

서울서 출발하면 전국 팔도 안 가는 데가 없어. 내가 일한 곳은 코오롱고속이었는데 우리 회사가 전국적으로 버스를 운행했단 말이지. 나는 웬만하면 먼 곳으로 배차 받았어. 운전을 하려면 너댓 시간 정도는 달려야 제 맛이 나는 거 아니겠어? 부산과 마산을 많이 다녔어. 내가 내륙에서 태어났지만 바닷가를 좋아한다고 했잖아. 서울서 출발하여 대구를 지나고 창녕쯤 가면 내 코에 갯내음이 들어오더라고. 차 문이 꽉 닫혀있어도 느낌으로 알게 되는 게야.

터미널에 손님들 내려드리고 일지 작성이 끝나면 보고한 뒤에 사복으로 갈아입고 부둣가로 나가는 게지. 거기가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잖아. 서로 우리 가게에 와서 물건 사라고 막아서기도 하고 옷도 잡아당겨. 경상도 사투리가 얼마나 억센지 말하는 것 듣고 있으면 꼭 싸우는 것 같어. 그래도 얼마나 재미져? 생선회에 매운탕 맛나게 먹고 숙소에서 자고 다음 날 아침에 또 서울로 올라오는겨. 

넘쳐나는 사람들 틈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집에 오면 색시가 반겨주지. 아이들은 올망졸망 자라고, 월급은 따박따박 나오고, 색시는 나붓나붓 다정하고 행복했어. 

 

■ 인생이 마냥 좋기만 할 수 없지

인생은 아무도 몰라. 나도 가슴에 대못 박히는 일이 있었어. 내가 고속버스 몰고 전국 팔도로 돌아다닐 때 국민학교 4학년짜리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한거야. 나도 운전하지만, 100% 운전자의 잘못으로 생때같은 아들을 잃고 나니 제 정신이 아니었어. 그 놈을 죽이고 싶었지. 

몇 년 동안 아들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질 못하겠더라구. 한동안 운전도 못하고 폐인처럼 술만 마시고 살다가, 이렇게 살면 나도 죽겠더라구. 그래서 털고 일어났어. 그 위에 딸이 하나 있는데 나를 빤히 쳐다보던 그 눈길 때문에 어째? 

내 딸 경화는,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머리가 좋았어. 상장이 수북이 쌓일 만큼 공부를 잘했지. 지 애미가 뒷바라지도 잘해 줬고. 그 유명한 이화여대에 턱, 합격한겨. 기분 좋았지. 사실 나는 법대나 상경대를 갔으면 좋겠다 싶었지만 서양화과에 갔어.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지. 나를 닮아서 혼자 조용히 사부작사부작 움직이는 것이 맞았나 봐.

나는 이만큼 늙었는데 이젠 뭐 바랄게 있겠어? 건강하게 잘 지내다 갈 때 되면 훌훌 떠나는 게지. 지금도 눈에 선~~해. 전국을 누비며 운전대를 잡던 그 시절이 참 좋았지. 

가만, 내 인생은 누가 여기까지 데려다 주었을까? 나는 또 얼마나 더 가야하는 걸까?

공허한 물음에 답일랑 세월이 알려줄테고 오늘은 흘러간 세월과 지난날 추억을 안주 삼아

소주 한잔 기울여 보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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