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 황법명

아무도 없는 산사의 뒤뜰 이름 없는 고목 한 그루가 쓸쓸히 서 있습니다. 아득한 저편 푸른 하늘에 흰구림이 모여 앉고 산바람이 먼 곳의 소식을 물어 와도 그네들의 일은 오직 그네들의 것일 뿐 누구하나 늙은 나무의 가슴을 흔들 수는 없습니다.

밤이 되면 어둠을 맞아 양편에 누이고 선채로 받은 삶을 안으로 무뢰가 어깨며 무릎위에 깃을 쉬어도 이미 이 몸은 내 것이 아니라는 듯 말없이 품어주는 고마운 어머니, 나무는 오늘도 외롭진 않습니다.

우리 다함게 이 나무를 배웁시다. 그리고 나무같이 살아 봅시다.

내게 명예가 없다고 부귀의 꽃이 피어나지 않는다고 실망하지 맙시다. 슬퍼하지 맙시다.

잎이 푸르면 영구히 푸르며 꽃이 피면 또 몇 날을 붉습니까?

재산과 명예와 모든 즐거움은 인연이 다하면 내게서 떠납니다. 

드높이 날리던 이름도 육신이 쓰러지는 날 표연히 사라지는 한 가닥 연기일 뿐 내게 돈이 없음을, 그리고 명예와 사랑에 괴로워 하지 맙시다.

지금 받아가지고 있는 하나의 속에 이 모든 행복의 씨앗은 들어있습니다.

끝없는 이름을 구하기보다는 남에게 나를 줘(보시행) 주는 데서 크나큰 기쁨을 발견합시다.

새들에게 몸을 비워주는 나무의 거룩함을 배웁시다. 이 몸이 남에게 베풀 자비행이 또는 사랑이 무엇인가를 찾아봅시다.

오늘도 나무는 말없이 섰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자기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자기를 잃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사람이면서 사람의 본분을 저버리고 자기를 떠나 욕망의 앞잡이가 된다면 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우리는 더 배워야합니다.

저 말없이 우뚝 서 있는 나무의 무언의 설법을 들어야 합니다.

소리 없음에도 듣고 배우는 마음이 곧 양심입니다.

모양 없음에도 보고 배우는 것이 올바른 신앙입니다.

하잘것없는 나를 나타내 보이다가 나라꼴이 이 모양이 되었는데 더 뭘 주저하겠습니까.

우리는 모든 부정과 불의를 남의 탓으로만 돌리지 말고 곰곰이 생각해서 내 탓이 아니었나? 반성해야 하겠습니다.

불교의 생활관은 복을 받기에 앞서 복을 심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과응보적 윤회의 사상을 기초로 하여 현실 생활의 안녕 질서를 이룩하고자 하는 데 그 큰 서원의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작복이 노를 저어갈 수 있는 소양의 개발과 고해를 건너기 위한 부단한 자기수련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아집과 망견에 사로잡혀 어둠속을 헤매고 있는 것이 우리 범부의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순의 성에서 한 계단씩 밟아 올라 밝음이 충만한 피안에로의 진로를 모색하고자 할 때 무엇보다 그 생활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악습을 제거해가야 하겠고 작복에 의하여 도래하는 찬란한 결과의 실상을 감지하는 혜안의 열림이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올바른 생활 속에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파악하고 나아가서 두 번  다시 후회 어린 국빈이 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얼마나 이 사회가 부정으로 점철돼야 하겠습니까?

이에 우리가 실천 수행하고자 하는 목적의식, 방향감각의 설정이 필요하다고 볼 때 정의의 빛의 인출이 절실한 현실입니다.

안녕과 질서가 파괴되지 않는 복지국가 건설을 바꾸어 말한다면 예토를 정토화 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서원을 가지고 오늘의 생활을 반성하고 정립시키는 계기가 마련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복의 대상을 찾아나서는 목동이 되어 그가 부는 피리소리에 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복된 소리를 낱낱이 가려 알게 되는 축복이 넘치는 행복의 광장을 이 땅위에 세워보자고 다짐해봅니다.

하잘 것 없는 나를 나타내 보이려다가 오히려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는 그러한 잘못이 다시는 저질러져서는 안 됩니다. 다만 고요히 씨를 심고 대가없이 피어나는 향기를 맡으며 어렵지 않은 단계부터 정직한 사회운동의 입김을 불어넣어 줄 사명감 있는 지도자의 출현이 아쉬운 때입니다.

힘찬 미래의 행복을 향해 정의의 열매를 맺도록 다함게 힘써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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