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자서전 인생은 아름다워 (60)] 1932년생 황장연. 그, 아름드리나무로 깊이 뿌리 내리다
[은빛자서전 인생은 아름다워 (60)] 1932년생 황장연. 그, 아름드리나무로 깊이 뿌리 내리다
  • 김경희 시민기자
  • 승인 2020.11.13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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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연 어르신(1932~)

“나 파독 광부출신이오.”
근현대사를 아우르는 어르신의 89년 인생 앞에서 가슴부터 뛰었다. 숙연해지는 마음은 그 다음이었다. 
“회장님 점심 뭐 드셨어요?”
“불백으로 먹었어요”
불고기 백반을 불백 이라며 젊은 친구들의 언어를 쓰셨다. 89세의 어르신은 아직도 사회와 소통의 통로를 열어두고 계셨다. 감색양복에 아이보리색 넥타이로 감각도 놓치지 않으셨다. 손수 골라 매셨다는 영국신사 황장연 회장님. 

 파독 광부 1기,  두 번째 줄 정중앙이 황장연 어르신

■ 열여덟 살, 6.25에 참전하다

아흔을 목전에 두었다. 1932년생 89세. 내 고향은 옥천 수북리다. 태어난 그 집에서 사뭇 살고 있다. 내 고향 수북리는 낚시꾼이 끊이지 않았다. 중학교 다니기 전 까지 나도 대나무 가지로 물고기낚시를 했다. 손맛이 맵지 않아도 물 반 고기반이라 어설픈 손놀림에도 고기들이 몰려들었다. 시골 살이 하는 사내 녀석에게는 손에 꼽을만한 낙(樂)이었다.

나는 8남매 중 일곱 번째로 태어나 귀여움 많이 받았다. 큰 형님 외에 줄줄이 누님 5명 밑에 아들로 태어나서 금이야 옥이야 사랑받았다. 까마득한 기억 속에는 누님 등에 업힌 여섯 살 무렵의 내가 희미하게 보인다. 동이면 감은골에 사립학교가 있었다. 학교를 못 댕기는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인데 유치원생 자격으로 나도 누님이랑 같이 또랑을 5번이나 건너 그 학교를 다녔다. 냇가를 건너는 다리도 없어서 순례 누님 등에 업혀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가갸거겨 국문 배우는 재미에 빠질 무렵 죽향국민학교에 입학을 했다. 

6.25 나던 해 고교 2학년이었다. 위급할 때라 청년들을 무조건 끌고 가는 시국 탓에 동네 형님을 따라서 부산으로 피난 갔다. 부산에 가 있는 동안 군대 가면 살아오기 힘들 것 같아서 경찰에 자원입대했다. 그 때가 열여덟 살이었다. 경찰로 복무한 기록이 6.25 참전 용사로 인정받게 되어 참전 용사회 회장도 맡게 됐다. 

대학교는 홍익대 영문과에 진학했는데 대전 성남동에 전시대학을 운영 중이었다. 홍익대 2학년 다니다가 가두모병(길거리 모병)으로 끌려갔다.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마치고 헌병학교로 갔다. 팔공산 경비 수색대로 서울에 복귀되면서 북한산에서 한동안 있다가 강원도 화천 등을 다니면서 잔류병 소탕 작전에 투입되었다. 

5년 동안 50개월 만기제대를 했다. 일등병으로 강등되는 군복무 비화도 갖고 있는데 후임병 괴롭히는 선임하사를 혼내주고 1주일간 영창을 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너털웃음 나오지만 불의와 타협 못했던 피 끓는 시절이었다. 

만기 제대날짜 5개월 전에 휴가 나와서 12월5일 날 결혼하고 집에 있는데 군에서 편지가 왔다. 결혼했으니 오지 말라고 집으로 제대증을 보낸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부대에서 신임 받았던 만큼 보상받았다. 결혼하고 5개월 후에 제대증이 왔다. 제대 후에 집 농사 돕고 소 풀 뜯어주면서 평범한 시골 청년의 24시간을 살고 있었다.

27살에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 육병완과 결혼했다. 당시는 노총각소리 들을 나이였고 정혼자리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우리 어머니가 건강이 안 좋으셔서 머슴 들이느니 며느리 얻는다고 했는데 그만큼 우리 집에 시집오면 고생한다는 얘기였다. 부잣집은 아니어도 때 꺼리는 있었다. 부모님은 벼농사 보리농사를 지었다. 그 때는 조반석수 (아침밥 먹고 점심 굶고 저녁은 죽)만 해도 먹고살만하다고 했는데 우리 집도 조반석수정도는 너끈히 하는 집이었다. 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살림살이 맡기려고 했는데 내가 장가를 안가 한 걱정이셨다. 그래서 아내는 우리 집에 더더욱 귀한 사람이었다.

 

■ 독일 함보른 탄광 천 미터 갱 속에 꿈 청춘 사랑을 묻다.

제대 후에 농사짓다가 부산에서 철공업을 잠시 하고 다시 청성면에서 탄광을 했다. 구음리 소구르미에서 탄광 하다가 독일광부로 3년간 다녀왔다. 1963년 32살 때 파독 광부 모집공고가 나서 매형이 추천을 했다. 광부 5천명 간호사 2천명이 차관을 빌리러 목숨을 걸고 결행된 독일 행이었다. 굴곡진 역사의 현장에 나도 서 있었다. 당시 서독 광부의 임금은 국내의 8배였는데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79달러였다. 1차 광부 500명 모집에 3천 명 가량 모여들어 6:1의 경쟁률을 보이기도 했다. 한국 경제에 종자돈 역할을 했다. 독일에 간 분들은 저마다의 사연이 있었지만 결국 돈을 버는 목적이었다. 나는 탄광을 하던 중에 가게 돼서 채탄 기술을 배우러 가는 목적이 더 컸고 생각보다 결과가 나오지 않던 탄광 일에 돌파구를 마련하고 싶은 마음에 독일 행 비행기에 올랐다. 독일에서의 급여는 학교 교사이던 집사람 월급의 3배 정도를 벌었다. 옥천에서 서대리 사람 한명과 우리 둘이 파독 광부명단에 올랐다. 낯선 땅 독일 외로운 시골 끝도 없는 갱 속에서 석탄을 캤다.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이 오셔서 눈물 흘리며 광부들과 간호사들을 격려했는데 없는 자의 설움을 타국 땅에서 배웠다. 중노동 하면서 인생관이 달라졌다. 지하 천 미터 갱 속에서 피땀 흘리고 석탄 캐면서 치열하게 사는 현장에 들어가 보니 인생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 다시 한 번 의지를 불태우고 주먹을 불끈 쥐게 됐다. 

“지하 천 미터는 얼마나 뜨거웠나 몰라. 족히 50도는 됐지. 선풍기가 돌아가도 헛일이야.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지는데 땀을 닦을 수도 없이 8시간씩 일했어. 한국 사람들은 돈을 더 벌려고 10시간 15시간 일했지. 목숨 걸고 돈 벌려고 온 사람들이 많았지. 인생의 승부수를 걸고 온 사람들이야. 평일에는 지쳐 쓰러지고 토요일 일요일 편지를 썼어. 아내와 편지로 만리장성을 수도 없이 쌓았어. 내 편지 사연은 주로 주말에 구라파 여행을 다녀온 이야기 였는데 여행지마다 카드에 써서 붙였어. 사실 숨이 막힐 만큼 힘들었지만 아내한테는 잘 있다고 써서 보냈지. 그 꿀맛 같은 편지에 힘들다고 말하면 아내 마음이 편할까? 편지 기다리는 맛에 1주일을 거뜬하게 보냈는데 말이야. 아내는 아이들 얘기를 써서 보냈어. 사랑한다는 사연으로 꽉 채웠지. 우리기수가 300명 갔어. 전국에서 다 모이는 거야. 강원도 함백 탄광가서 실습을 했어. 광부 경력자를 모집했지만 탄광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고 독일 현장에 가면 천 미터 넘는 지하 갱도에 들어가서 작업하게 돼서 사전에 훈련을 받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어. 그래서 함백 탄광에서 실습하면서 훈련을 받았지. 목숨 걸고 타국에서 일한 인연들인데 시절인연이라 다들 잘 살았으리라 믿고 있어. 살아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내는 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4살 5살 연년생 남매를 돌보고 있었는데 미안하고 너무 보고 싶어 편지에는 사랑한다는 말로 가득 채워졌다. 독일 탄광일은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주말에 구라파 여행 다녀온 이야기만 써서 편지를 보냈다. 일부러 아내를 안심시키려고...3년 동안 편지는 허리까지 쌓였지만 이제는 베를린에서 보낸 엽서 한 장만 남았다. 수없이 사랑한다고 목 놓아 썼던 편지들, 수많은 말들은 다 사라졌지만 베를린에서 보낸 엽서에 담긴 한 글자 한 글자는 아직도 남아 그 시절을 회고하고 있다. 

33년간 ‘대명건재’를 운영했다.

■ 젊은 날의 초상, 대명건재

옥천 읍내에서 ‘대명건재’를 33년간 운영했다. 대명건재는 건설 회사가 아닌 자재만 넣은 회사였다. 옥천읍에 새로 시가지 정리하는 시기에 집을 새로 뜯고 지을 때 건설 경기가 좋았다. 대명건재할 때 아침 7시에 출근하고 서류 결재 한 다음에 돌람산 등산을 했다. 9년간 게으름 안 피우고 다녔는데 당뇨로부터 나를 지키는 훈련이기도 했다. 당뇨약 먹은 지 30년이 되었는데 아직 잘 관리하고 있다. 당뇨도 인생처럼 인내의 싸움이다. 1970년대 교육청 땅을 205평 사면서 대명건재는 시작되었다. 3015만원에 사서 8억을 받았다. 큰 수익을 낸 거 같지만 외상값 떼인 것이 4억이었다. 장사를 처음해서 목재를 가져가면 돈을 다 주는 줄 알고 퍼줬더니 돌려받지 못한 것이 수두룩했다. 세상을 몰랐던 건지. 사는 자체가 공부고 시험대다. 

대명건재가 현역의 마지막 일이었다. 아들 딸 남매를 두었는데 아들은 미국에 살고 딸은 서울에 살고 있다. 미국에 다녀온 지 4년 이젠 코로나로 오가기도 어려워 화상 통화를 한다. 아이들이 보고 싶으니 어쩌겠나 화상 통화를 배워야지. 아내 먼저 가고 명절에는 서울 딸네 집으로 역귀성을 했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 탓에 역귀성 열차에도 몸을 싣지 않았다. 오래 살다보니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일이라는 말들을 실감하면서 살고 있다.

■ 내 인생의 깊은 울림 신앙 

53년 전 우리 집에서 전도사님을 모셔다가 예배를 시작했다. 서너 달 집에서 예배 보다가 92평짜리 텃밭에 교회를 올렸다. 41만원에 교회를 샀는데 본부에서 40만원을 보조 해줬다. 교회에서 만원 보태서 예배당을 설립한 셈이다.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믿음의 안식처, ‘금강 침례교회’는 올해가 개척된 지 53년째다. 이제 소망이라면 사랑하는 애인 만나러 하늘나라 갈 때 1주일만 앓다가 잠자면서 출발하는 것이다.

아내는 30년 전 삼양국민 학교 재직시절 병이 발생해서 고생하다 7년 전에 먼저 하늘나라로 떠났다. 고생 많이 한 아내에게 아직도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남아있다. 아내 퇴직 후에 같이 여행 다니며 아내의 노고를 위로했지만 마음 빚을 절반도 갚지 못했다. 코로나로 전처럼 매일 6.25 참전 용사 사무실에도 나오지 않다보니 자연스레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이 들어 남자 혼자 산다는 건 많은 불편함을 떠안고 사는 건데 이제 익숙해져서 하루하루 무탈하게 보내고 있다. 집에서 보내는 하루도 꽉 찼다. 신문만 천천히 넘겨가며 읽어도 하루를 다 써야 한다. 책도 보고 뉴스까지 챙겨보면 하루가 금방 간다. 낮잠 잘 시간도 없다. 할 일없이 뒹굴면 오히려 시간이 더디 가고 무료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혼자 있으려니 외로움과 만나는 건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가끔 우스갯소리로 집에 들어가면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도 싸울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얘기하곤 한다. 그만큼 고독이라는 병이 무섭다. 7년 전 먼저 간 아내 생각에 부엌에 들어가면 아직도 아내 향기에 눈물이 흐른다. 혼자 있는 이 집이 적막강산 같지만 집안 구석구석 아내의 향기가 배어있어 적적한 마음을 달래준다. 떠나고도 남는 것이 사람의 향기인가 보다.

그래서 인향만리라고 했던가. 사랑하는 아내 곁으로 가는 그날까지 고고한 아름드리나무로 흔들릴지언정 부러지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로 남을 것이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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