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봉식 (옥천읍 양수리)

Ⅴ. 이순(耳順)의 나이에 향수에 빠지다.

필자가 「향수」를 처음 접한 것은 1990년대 초 동이중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이다. 그 학교에 같이 근무하던 음악 교사 신동자는 교무실에서 김희갑이 작곡하고 테너 박인수와 가수 이동원이 함께 부른 「향수」를 자주 들려주어, 교사들은 자연스럽게 그 노래를 암송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그 후 옥천고등학교에 같이 재직하던 국어 교사 신동인이 “어느 대학교수(추후에 시인·문학평론가인 이석우로 밝혀짐)가 정지용의 시를 연구하기 위해 수북리 화계(花溪) 마을을 탐사한다”는 말을 필자에게 전해 주었다. 그런 연유로 나는 화계마을(꽃계리, 일명 꾀꼬리)이 정지용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으로 짐작하게 되었다. 

수북리 일출 사진.

5월 말 아침 해가 뜨는 모습을 보면, 정지용 생가 뒤편에서 옥천읍 수북리와 동정리 쪽으로 떠오른다. 『여지도서輿地圖書』(1757년, 영조 15년)의 자료에 따르면, 수북리와 동정리는 옥천군 읍내면 죽향리에 있던 관아의 동쪽인 군동면(郡東面)에 속했다. 수북리는 마성산 자락 할애비산(늘티산성) 아래에서 발원한 개천, 일명 계옥(溪玉)도랑의 북쪽에, 수남리(現 남곡리)는 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동정리(現 옥천선사공원)는 옥천 향수호수길의 물비늘전망대(옛 취수탑) 주변 동정자(東亭子)에서 유래되었고, 1872년 지방지도 옥천군 지도에 동정점(東亭占)으로 표기된 옛 군동국민학교가 있던 동경재라고도 불리던 마을이며 교통 요충지였다. 

옥천 구읍 상·하계리는 남산에 가로막혀 그 앞 들판이 넓지 않으며, 그곳의 개천은 정지용 생가의 대략 100여 미터 남쪽에서 서쪽 삼양(三陽) 삼거리 서화천(西花川)으로 휘돌아 흘러간다. 이수암(80세, 前 옥천향토전시관 관장)씨의 구술에 의하면, 그가 죽향국민학교에 재직하던 시절 어느 지도에서 그 개천이 거천(巨川)으로 표기된 것을 본 적이 있으며, 1950년대에는 그 폭이 7∼8m 정도로 상당히 넓어 실개천이라고 부르기 어렵다고 한다. 이런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필자는 20여 년 전부터, ‘넓은 벌 동쪽 끝으로 휘돌아가는 실개천’이 실재하는 600여 년 형의공 정종남(刑議公 鄭終男)계 영일정씨 집성촌인 수북리 화계와 동정마을이「향수」 서두(書頭)의 배경지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疑懼心)을 줄곧 품어 왔다.    

2019년 말 해질녘에 옥천 ‘향수호수길’을 걸으면서 ‘향수바람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향수바람길’은 2011년에 10억여 원의 예산으로 조성된 등산길로, 현재 그 길은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다소 험해서 관광객이 뜸한 상태이다. 그 네 갈래 길 중에서 ‘넓은벌길’은 며느리재 옆 늘티산성(할애비산)에서 옥천선사공원까지 산등성이에 조성되어 있다. 필자는 안터교 옆 실개천이 휘돌아가는 ‘넓은벌 둘레길’을 조성해서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구상을 해본다. 

2019년 12월 말 수북리 임인호(71세) 씨를 만나 함께 사당넘어(現 대광주유소) 옆에 있는 그 마을의 쪽조리골 앞산에 올랐다. 옛날에 그 동산은 아스팔트 2차선 도로에까지 이어졌으며, 거대한 말등과 같은 기슭에 영일 정씨 묘소 두 개가 있어 수북리 마을 아이들이 즐겨 뛰놀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겨울에는 지양리 서낭산(까막산)과 마티 사이에서, 그리고 여름에는 석탄리 안터 마을에서 솟아오르는 아침 해를 볼 수 있다. 

한 해의 마지막 동틀녘에 그 마을의 실개천이 10만여 평의 넓은벌(두둑밭) 동쪽 끝으로 휘돌아가는 풍경이 필자의 시야에 펼쳐진다. 그 순간, 바로 이 동산이 정지용 시인이 어린 시절 수북리 아이들과 뛰놀며 넓은 벌과 실개천을 바라본 곳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수북리 쪽조리골 앞동산에 있는 영일정씨(迎日鄭氏) 묘소의 노송 아래에서 장엄한 일출과 넓은 벌과 실개천 그리고 저 멀리 지양리 서낭산골, 정지용의 어린 누이 산소가 아스라이 보이는 광경을 바라본다. 이러한 감동을 안고 필자는 늘 벅찬 마음으로 정지용의 발자취를 따라 그의 향수길을 거닐며 「향수」의 ‘넓은 벌과 실개천’ 그리고 지양리 지장 마을의 서낭산골 어린 누이 「산소」에 대해 직접 탐사 연구하게 된다. 이러한 탐구가 어떤 면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필자는 이곳이 옥천군 관광 자원의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여긴다. 그것은 박경리의 ‘토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과 같은 맥락으로 「향수」와 「산소」의 배경지가 문학사적으로나 역사·문화사적으로 각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지용 생가.

「향수」가 정지용이 어릴 적에 겪은 구체적 경험을 바탕으로 고향의 그리움을 그린 시로, 그 배경인 넓은 벌과 실개천이 과연 시인의 고향, 옥천에 존재하는가? 아니면 그 시가 정지용 생가 주변의 들판과 실개천을 모티브(motive)로 하여 보편적인 고향을 그리며 옥천이 아닌 특정하지 않은 우리나라 어느 한 시골을 배경으로 한 것인지? 체험하지 않은 상상의 보편적 고향과 유년시절 직접 경험한 실제적 고향, 두 가지 중에 과연 어떤 것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더 강하고 아련한 마음일까? 일반 독자와 시인·문학평론가 대다수가 생각하고 있는 정지용 생가 옆 들판과 실개천이 과연 「향수」 서두(書頭)의 배경지일까? 만일 수북리·남곡리·석탄리의 넓은 벌과 동쪽 끝으로 휘돌아가는 실개천이 정지용 생가 앞에 실재한다면 「향수」에 대한 해석은 달라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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