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봉식 (옥천읍 양수리)

Ⅲ. 정지용의 고향
향수(鄕愁)의 ‘鄕’은 ‘12,500호(戶), 외읍(外邑) 시골 鄕, 생지(生地) 고향 鄕’으로 풀이된다. 논어 20편의 열 번째 ‘향당(鄕黨)편’을 보면 린(隣)은 5가구, 리(里)는 25가구, 족(族)은 100가구, 당(黨)은 500가구, 주(州)는 2,500가구, 향(鄕)은 12,500가구로 이루어진다. 

『신묘장적辛卯帳籍』(1891)의 자료에 의하면, 옥천군은 11개 면 127개 동리에 6,083호, 27,974명의 인구를, 청산현은 6개 면 22개 동리에 2,421호, 10,509명의 인구가 있었다. 이를 모두 더하면 19세기 후반 기준 옥천지역 전체 가구는 8,504호, 인구는 38,483명으로 집계된다. 1910년경 청산을 제외한 옥천군의 가구는 6,274호이고 인구는 22,740명이다. 

1392년(朝鮮 태조 1년)에 여러 도(道)와 안찰사(按察使)에 명하여 학교의 흥폐(興廢)로 지방관고과(地方官考課)의 법으로 삼고 크게 교학의 쇄신을 꾀하였다. 그에 따라 부·목·군·현(府·牧·郡·縣)에 각각 1교씩 설립하고 점차 전국에 이르게 되었다. 조선시대 모든 군(郡)에 설립된 향교(鄕校)는 옥천 향교와 마찬가지로 군(郡)의 유일한 학교이다.

향(鄕)은 군(郡)의 개념으로 군의 한 마을을 지칭하는 향리(鄕里)와는 다르다. 따라서, 정지용의 고향은 옥천군이고, 그의 향리는 옥천 구읍 상·하계리이다. 

정지용의 고향은 그가 많은 추억을 쌓고 경험한 향수의 정취가 묻어있는 광의(廣義)의 옥천군 여러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심 무대(舞臺)는 정지용이 태어나고 자란 옥천 구읍 상·하계리와 그의 외갓집이 위치한 동이면 세산리 용암 마을, 또한 그의 조상이 살던 영일정씨의 600여 년 집성촌인 수북리 화계(花溪), 일명 꽃계리(꾀꼬리) 마을과 그의 조부 정구택(鄭九澤, 1853∼1895)이 살았고 그의 부친 정태국(鄭泰國, 1873∼1939)이 태어나 성장기를 보냈다고 보이는 550여 년 영일정씨 형의공 정종남(刑議公 鄭終男)계 군남파(郡南派)와 마티파(馬峙派)의 집성촌인 지양리 현동(玄洞) 마을, 일명 가문골이다. 그뿐만 아니라 옥천공립보통학교에서 소풍 가던 곳인 옥천읍 옥각리 각신서당(覺新書堂, 現 이지당二止堂), 군북면 석호리 청풍정(淸風亭), 군북면 추소리 추동(楸洞)과 이평리 배일(이탄, 梨灘), 옥천읍 오대리(五垈里), 그리고 정지용이 즐겨 찾던 옛 군동면 남곡리·석탄리·지양리 등 옥천군의 광의의 넓은 지역이 그의 고향이다. 

정지용의 고향에 옥천 구읍과 더불어 그의 생가에서 불과 3㎞ 정도이며 도보로 20∼30분 걸리는 그의 조상이 살던 영일정씨 집성촌인 수북리 화계 마을이 포함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 마을의 실개천은 옛 동정리(東亭里, 現 옥천선사공원)를 감싸고 돌아, 수북리·남곡리·석탄리의 10만여 평 이상의 넓은 벌 동쪽 끝으로 휘돌아 오대리 금강으로 여전히 흐르고 있으며, 그곳의 ‘넓은 벌과 실개천’이 「향수」의 배경이 될 개연성은 매우 높다.

수북리 화계 마을의 실개천 개념도 스카이뷰 지도.
수북리 화계 마을의 실개천 개념도 스카이뷰 지도.

Ⅳ. 「鄕愁」의 창작 시점
「향수(鄕愁)」는 정지용의 초기 시이다. ‘1922. 3 마포 현석리’라고 창작 시점을 밝힌 그의 실질적인 처녀작 「풍랑몽(風浪夢)」과 「내아내 내조국 내나라」(1923. 1)에 이어 세 번째 작품이다. 이 시는 정지용이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5월 일본 교토(京都) 동지사(同志社)대학을 입학하기 2개월 전인 1923년(22세) 3월을 창작 시점으로 「朝鮮之光」(1927. 3) 65호 P. 13~14에 표기하고 있다. 즉, 「향수」의 창작은 그가 5년제로 승격한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4년제를 졸업한 후, 1922년 1월에 편입하여 문우회 회장으로 회지를 발간하고 1923년 3월 그 학교를 졸업하던 시기에 이루어졌다.  

정지용은 휘문고보에 다니던 시절에 박팔양 등 7명과 요람(搖籃) 동인을 구성하여, 동인지 『요람』을 프린트 판으로 10여 호까지 냈다. 박팔양에 의하면 『요람』 동인지에 「향수」가 실렸다고 한다.

「鄕愁」는 유학길에 오를 젊은이의 외로움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를 근간으로 삼는다. 이 시는 정지용이 휘문고보 시절 서울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던 아버지와 가정 사정으로 친정에 머물고 있는 어머니, 그리고 12세에 정혼(定婚)하고 20세에 결혼(結婚)한 동갑내기 아내와 어린 누이 곁을 떠나 일본으로 가야 하는 착잡한 심정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표출한 것이다. 말하자면 일본 유학 시절에 창작한 시가 아니라는 주장이 되겠다. 

일부 시인과 독자들은 「향수」를 정지용이 일본 유학 시절에 그의 조국인 대한제국을 생각하며 ‘보편적 고향’을 그린 시로 해석하기도 한다. 또한 정지용 생가의 100여 미터 남쪽 끝에서 서쪽 삼양 삼거리의 서화천(西花川)으로 휘돌아가는 실개천이 이 시의 단순한 모티브(motive)로 주장하기도 한다. 심지어, 제1연의 ‘넓은 벌’이 그의 조국(祖國)인 한국 땅을 그린 것이며,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의 ‘옛이야기’를 단군신화 등으로 구구(區區)한 해석이 분분(紛紛)하다. 

그러나 필자는, 「향수」가 정지용이 유소년 시절과 더불어 20대 초반까지 고향 옥천에서 겪은 구체적이며 실제적 경험을 바탕으로 탄생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여긴다. 즉 이 시의 ‘넓은 벌과 실개천’이 정지용 생가의 주변 모습을 모티브로 상상에 의한 보편적 고향을 그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제1연의 ‘넓은 벌과 실개천’은 그의 고향 옥천의 어느 마을엔가 실존(實存)한다고 짐작한다.

「鄕愁」는 정지용이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던 달에 기본적으로 거의 완성된 작품으로 일본 유학 시절에 여러 번의 수정과 보완이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최동호 고려대 명예교수도 「향수」의 창작에 대해 위와 동일한 관점에서 의견을 피력했다. 

다음은 「詩文學에 대하여」(조선일보 1938.1.1.) 정지용의 대담 중 마지막 기사 내용이다.
처음에 상想이 올때는 맛치 나무에 바람이 부는 것 갓해서 떨리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시詩를 배는 것이지요. 그래서 붓을 드는데 그때는 정리기整理期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회機會를 기둘러야지요. 애를 배어도 열달을 기둘러야 사람의 본체本體가 생기드시 시詩도 밴 뒤에 상당相當한 시기時期을 경과經過해야 시詩의 본체本體가 생기는데 그 시기時期를 기두리면서도 늘 손질은 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조각彫刻이란 대리석大理石속에 드러잇는데 그것을 파고 쪼아서 조상彫像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으로 아모리 손질을 해도 결決코 인공적人工的인데가 업는 것이 아닙니까.

 

정지용은 「향수」에 대한 상想이 올 때 붓을 들어 정리하고, 그 시를 밴 뒤 상당한 기간 본체가 생기는 시기를 기다리며 늘 손질을 했다. 그러므로 「향수」는 창작 후 수많은 수정 등 여러 과정을 거친 후 1927년 3월에 「朝鮮之光」 65호에 발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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