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현장 품팔이 인생, '간이식 비용 7천여 만원 엄두가 안나'
옥천읍 가화리 사는 조현섭씨, 간암 투병기

지역에는 늘 즐겁고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프고 슬픈 일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고통스럽기 때문에 감추고 삭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관계가 단절된 채 혼자 모든 걸 감내해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해결책을 찾지 못해 파국으로 치닫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어린이, 노인,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가 가장 많은 피해를 보기도 합니다. 감춘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고 덮는다고 사라지는 게 아닌 일이 있습니다. 회피하지 않고 우리 지역사회의 또다른 단면으로 적시하고 해결책을 모색해야 더불어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함께 고민하자는 차원으로 옥천 각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려 합니다. 

 간암 4기 진단을 받았을 때 울음이 복받쳤다. 어엉어엉 소리내면서 울음을 토해냈다. 열심히 산 죄 밖에 없었다. 청천벽력같은 의사의 말에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고 하늘이 노래졌다.   물어물어 서울삼성병원에서 일차 치료를 하고 상당부분 호전이 있다는 말을 듣고 안심을 했다. 하지만, 품팔이 하루살이 인생 생활비라도 벌어볼 요량으로 무리하게 일을 나선게 화근이었다. 동이면 한 절의 굴삭기 블록쌓기 건설현장에 새벽같이 나가 일을 한 게 다시 몸을 순식간에 망가뜨렸다. 사흘 일을 하고 며칠을 앓아누웠는데 재발해 간 전체에 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다리가 후들거렸고 본인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담당교수는 간 이식이 안 되면 1년 뿐이 못 산다는 사실상 시한부 사형선고를 내렸다. 

 삼양초를 졸업하고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옥천중을 중퇴했다. 공장에 나가다가 그만두기를 반복하고 결국 건설현장에 품을 팔러 다녔다. 두 아이 어렸을 때 아내와 이혼하고 남겨진 아이들을 돌봐야 했다. 아버지는 일찌감치 돌아가셨고 어머니도 아이들 2-3살 때 돌아가시는 바람에 돌봐줄 사람이 마땅찮았다. 형편이 변변찮아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았다.

 그래도 성암리 쪽방에서 3년 전 읍내 한 허름한 빌라 3층으로 이사왔을 때는 천국이 따로 없었다. 좁은 방이 3개나 됐고 비좁은 거실도 넓어보였다. 주택공사에서 월세를 내어주지 않았다면 사실 버텨낼 힘 조차 없었을 거다. 특별한 기술이 없어 건설현장을 전전하면서도 많은 보수를 받지 못했지만, 그 것으로 공과금 내고 생활비 쓰며 두 아들을 키워냈다. 다행이 두 아들은 간이식에 적극 동의했고 막내 아들과 혈액형이 맞아 막내 아들 간을 이식하면 될 터였다. 문제는 7천만원이 넘는 간 이식 비용이었다.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오롯이 부담해야 할 몫이었다.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포기하자’는 마음이 들다가도 ‘그래도 살아야지’라는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생의 의지가 마음 한켠에 솟아날 때 마음이 저릿하고 아득한 슬픔이 밀려왔다. 그래도 어떻게 든 살아보겠다고 일은 접고 나름의 건강식을 시작했다. 삶은 감자와 선식에 요쿠르트를 타 먹으며 몸에 좋다는 것은 다 구해 먹어보았다. 단양과 울산에 사는 이모부는 산에서 살아보라고 권유했는데 그렇게라도 낫는다면야 가겠지만, 확신이 서지 않았다. 자수정 물이라도 떠와 마셔보기도 했다. 원망스러웠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오대리 강가 물에서 빠져 수술을 하다가 잘못 피를 수혈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원망스러웠다. 어깨가 아프고 사타구니가 땡기고 옆구리가 쑤시는 전조 증상이 있었는데 나이들면 생기는 오십견으로 치부하고 진료를 받지 않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어느정도 치료가 되고 안정을 해야 했는데 생활비 번다고 다시 건설현장에 나가 몸을 망가트린 본인이 원망스러웠다. 혼자 아픔을 삭히면서 보내는 하루하루는 사실 지옥같았다. 

 보다못한 지역 선배가 그랬다. ‘어떻게든 살아야지 이 사람아! 열심히 살았는데 억울하지도 않아’ 그러면서 그 선배는 우리 착하기만한 후배 좀 살려달라고 신문사에 전화를 넣었다. 

 병원을 오가면서 빌라 앞에 웅크리고 앉아있던 그를 만났다. 인터뷰에 응하며 그가 안내한 집은 정리가 안 된 채 어수선했다. 큰 아들은 군대에 가 있었고 작은 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 가기 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아픔은 혼자의 몫이었다. 

 “간 이식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아요. 비용이 만만치 않아요. 지금 가지고 있는 빚도 건사못해 쪼들리며 살고 있는데 수천만원 수술비를 감당할 수 없어 포기하고 살자. 나름 조금 더 건강하게 살면 나아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어요. 그렇게 포기하다가도 수술을 하고 싶은 생각도 들고 마음이 종잡을 수 없이 오락가락 하네요.”

 쉰 일곱살 조현섭씨 이야기다. 군 주민복지과 담당자는 “그 분이 수술을 할지 여부를 아직 결정을 하지 못한 것 같아 여러가지 대책을 강구하던 중이었다”며 “간 이식 수술을 받을 의지가 있다면 군에서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보겠다”고 말했다. 

 미숫가루 같은 선식이 한 가득 봉지 째 쌓여 있었고, 빈 요쿠르트 병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지금은 몸으로 느끼는 아픔은 없다는데 그게 더 무섭다고 했다. 

[후원계좌] 우체국 300111-02-162947 조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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