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평등해질 때까지 아무도 평등하지 않다” -U2 공연 자막

영화 <아워바디>의 자영은 수험서 책장을 덮었다. 10년 만의 결정이다. 습관적으로 혹은 강박으로 펼쳐 놓았던 공무원 수험서는 덮을 수 없을 만큼 무거웠었다. 그동안 그것을 덮을 용기가 없었다. 용기를 내게 한 건 한강둔치를 달리던 현주를 보고 나서였다.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책장을 덮은 이후 그녀는 현주 뒤를 따라 함께 달리기를 한다. 자영의 매니저나 다름없던 엄마는 자영을 책상으로 돌아가게 다그치지만 자영은 이번엔 단호했다.

1984년 MTV 시상식에서 웨딩드레스를 입고 진행한 마돈나의 퍼포먼스는 기독교 바탕의 보수적인 미국사회를 흔들었다. 순결의 상징인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마돈나가 노래를 부르면서 무대 위를 뒹글었고 가터벨트가 채워진 허벅지가 화면에 드러나는 순간 시청자들은 경악했다. 성적 욕망의 대상이었던 여성이 성적 주체로 바뀌는 분기점이었다. 한때 마돈나의 퍼포먼스를 노이즈마케팅으로 오해했던 적이 있었다. 아니었다. 마돈나는 음악과 공연으로 그동안 손가락질 받았던 여성의 욕망을 드러냈고 성적 욕망의 주체로 살라는 메시지도 함께 담았다. 그동안 서부개척에 필요한 마초 중심의 남성사회가 만들어낸  ‘레이디 퍼스트’ 문화는 불평등한 젠더사회를 표현하는 문장이었다. 아직까지 이 문장이 동어반복되고 미디어에서도 차문을 열어주는 매너가 친절함으로 통용되고 있다. 그건 친절이 아니라 종속관계를 확인하는 도장이다. 그리고 종교와 가족주의는 여성의 욕망을 차단하는 바리케이드였다. 그래서 남성의 성적 욕망에 대한 단죄는 여성에 비해 가혹하지 않았다. 유부녀였던 배우 잉그리드 버그먼은 유부남과의 재혼으로 청순한 스웨덴 국민 여배우가 타락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그녀는 험난한 배우의 길을 걷는다. 조신함과 순결을 강요당했던 여성들이 마돈나의 메시지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새로 들어간 직장에서 자영이 상사를 유혹하는 장면은 욕망의 대상이었던 여성이 욕망의 주체가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자영의 행동은 직장 동료들에게 신분상승의 과정으로 잘못 해석되고 자영의 순수한 욕망은 왜곡되었다. 자영은 직장을 그만둔다. 성이 신분상승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건 기존영화에서 자주 봤던 익숙한 클리세였다. 그동안 여성이 주체가 될 수 있는 방식은 팜므파탈이나 걸크러시 혹은 여장부였지만 미디어의 기만전술이었다. 금기의 선을 넘는 ‘팜므파탈’의 마지막은 비참했다. 혹은 강력한 반동은 마녀사냥의 제물이 되거나 단명하고(허난설헌과 에밀리 디킨슨) 말았다. 젠더 권력의 그래프는 꺾이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마돈나의 음악과 춤은 팜므파탈로 가는 퇴행이 아니라 여자도 욕망의  주체이면서 성적 주체라는  보여주는 퍼포먼스였다. 

종이달 / 2014

영화 <종이달>의 주인공 리카는 주부로 살다가 은행의 비정규직이 되었다. 아내의 구직을 용돈벌이 정도로 생각하는 남편은 지나치게 직장에 집중하지 않기를 바란다. 남편의 바람과는 달리 그녀는 돈의 맛을 알게 되면서 횡령을 하게 되고 젊은 남자를 사귀기도 한다. 결국 횡령 사실이 드러나면서 벼랑끝으로 몰리던 시점에 은행 사무실에서 밤 세우는 게 일생의 소원이라는 모범생 30년 선배 스미 요리코와 마주선다. 요리코와 긴 대화를 하고 난 후 더 이상 빠져 나갈 구멍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리카는 의자로 사무실 유리창을 박살 낸다. 스미 요리코에게 손을 내민다. “같이 갈래요“ 스미 요리코는 잠시 흔들린다. 리카는 유리창으로 달아나고 이어지는 쇼트는 아침 회의하는 직원들 사이에 있던 스미 유리코의 시선이 유리창을 향하고 유리창으로 다가가는 카메라는 치앙마이에 있는 리카로 넘어간다.

<종이달>의 마무리는 신선했다. 욕망을 표현하고 쫓아가는 순간 타락과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 기존의 계몽적인 결말과는 달랐다. 잘못 발을 디뎠지만 리카는 욕망의 끝을 보고 싶었고 감독은 이런 리카의 마음을 알고 있는지 리카를 끝까지 질주하게 한다. 욕망은 파멸이라는 공식의 허들을 뛰어넘게 하는 감독의 놀라운 성찰이었다. 그동안 여성 캐릭터에게 욕망의 질주를 허용한 영화를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감독의 의도와는 달리 주인공 리카의 몸에 돈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영화 <종이달>의 다른 포스터는 여성들이여 타락하지 말라는 계몽 포스터로 사용되었다. 열악한 일본의 젠더 감수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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