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상한 시아버지로 살며, 월남 참전, 그 아픔은 묻었다.
이규성 어르신(1945~)

추석 연휴 끝인데도 북적북적 한 인기척이 나는 집이었다. 어르신은 마침 가을 햇살 아래 대문 앞을 서성이고 계셨는데, 손주들이 어질러 놓은 마당을 정리하고 계셨을까. 푸근한 인상의 얼굴에 인정이 묻어있었다. 부엌에서는 어여쁜 며느리가 토닥토닥 살림 가지를 챙기는 소리가 났고, 어린 손주들은 안방에서 새까만 눈을 깜박이며 올망졸망 모여 있었다. 방과 거실 벽에 걸린 사진 속의 가족들은 모두 활짝 웃고 있었다.

■ ‘태동’에서 나고 자라…애들 가르치고, 먹고 살았으면 됐지

우리 마을은 삼청리라는 행정구역 상 명칭 대신 ‘태동’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려졌다. 마을에 이 씨들이 많이 모여 살았는데 우리끼리는 그렇게 더 많이 불렀다. 나는 이 마을에서 나고 자라 벼농사 짓고, 포도농사. 복숭아 농사를 지으며 지금껏 살아왔다. 

“농사? 재미는 뭐… 애들 가르치고, 먹고 살았으면 됐지… 옥천군에 담배원료 가공공장이 있을 때는 25년여 회사에 다녔지. 새벽에 회사에 가면 오후 두 시에는 마치니 농사일도 돌볼 수 있었지. 봉급은 얼마 안 됐지만. 그 공장 덕분에 자식들 대학 가르치고 지금껏 잘 살아 왔지. 옛날 농사는 거름이 없어서 소출이 안 났어. 농사만 지으면 먹고 살기밖에 안 됐지. 지금은 비료니 퇴비니 다양하게 써 소출이 많지만 서두.”

■ 월남전 참전… 전쟁이야기는 하기 싫다.

7살 때 6.25 전쟁이 나 인민군을 보고 놀라 쫄려서 바들바들 떨었다. 그런데 전쟁을 또 치렀다. 군대에 있을 때 차출돼 월남전에 참전해서 1년 기한으로 머물렀다. 

“많이 죽었지. 접전 장소가 아니라도 총기를 항상 소지하고 있으니 사고가 많이 났지. 사람이 막다른 골목에 닿으면 막 쏠 수밖에 없어. 옆에서 총기 만진다고 딸각 딸각 하더니 발사돼 내 귀 옆으로 지나갔어. 아찔했지. 고엽제 피해도 많지. 말로 다 못하지… 전쟁이야기는 하기 싫어 이제. 내가 월남전쟁에서 귀국하던 날, 내 동료군인 한 명은 돈 더 벌려고 귀국을 연기하고 머물렀지. 가족을 위해. 그런데 그날 총기 오발 사고가 났어. 참 … 가슴 아프지.”

당시 월남 참전 병사 봉급은 나라에 외화를 많이 벌어다 줘 어려운 국가 경제의 큰 버팀목이 됐다. 병사의 집으로 봉급이 송금되면 온 식구들이 먹고 살 수 있는 생명줄이었다. 

■ 마을 점쟁이가 엮어줘 인연 만들었다.

‘어른들이 하라고 하니 했지… 그때는 월남전 갔다 와 끄실려서(그을려서)김추자 가수가 노래했던 ‘월남에서 돌아온 새카만 김상사’ 처럼 시커멓고 눈만 컸어.’라고 안사람은 결혼 당시의 기억을 얘기한다. 

나는 27살, 집사람 이수림은 24살 때 동네 점쟁이가 중매를 해 인연을 맺었다. 당시만 해도 청춘남녀를 맺어주는 큰 공신은 점쟁이였다. 그들이 집집마다 다니며 처녀 총각들을 눈여겨 봐 오다 맞는 데를 찾아 연결해주었다. 

“없는 사람 만나서 고생만 많이 했지요. 안사람이 잘해서 지금까지 잘살지, 분이나 바르고 낭비했으면 이렇게 잘 지낼 수 있을까.”

고생한 아내를 생각해서 내가 명절 음식 준비도 아침 일찍 일어나 먼저 하고 아내한테 좀 더 자라고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 기꺼이 하고 있는데 며느리는 내가 아내를 많이 아낀다며 추켜 세워주기도 한다. 곱게 봐주는 며느리 마음이 고맙다.

나는 노년이 돼 아내와 여행을 제법 했다. 코로나 발발 이전이라 중국, 태국 일본 등을 둘러봤고 내가 참전했던 베트남도 다시 찾아 여행했다. 내 모교인 삼양초등학교 동창들이 여행계를 모아 다녀왔다. 코흘리개 시절 짚신 신고 형편이 좀 나은 녀석은 고무신 신고 책보 둘러매고 다니던 그 친구들이다. 60년을 훌쩍 뛰어넘어 할아버지들이 되었다. 그 때 상상속에서나 보았던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다녀온 기쁨이 더 컸던 까닭은 어려웠던 그 보리고개를 같이 넘어온 역전의 용사들이기 때문이다.

여행을 다녀 봐도 사람 사는 게 다 똑같다. 한국이 제일 낫다. 한국이 기반시설이 다 잘 돼 있고 살기 좋다. 괜히 여행한다고 돈만 쓴 것 같다. 인제 다리아파 못 간다. 돈도 젊어서 써야지 늙으면 돈 쓰고 싶어도 못쓴다.

동창 중에는 홀로된 이가 많다. 동네 할머니들도 혼자 사는 경우가 많다. 요즘 시골에는 사람이 없어 빈집이 널렸다. 태동 마을에도 사람이 사는 집이 열한 집이다. 그중 내외간이 같이 사는 집이 네 집이다. 

“안사람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타입이다. 음식 솜씨가 좋은데 특히 찌개를 얼큰하게 잘 만들어 준다. 아내는 예쁘다. 젊은 시절에도 예뻤고… 지금도 예쁘니까 살지.” 

세상에! 여자에게 가장 결정적인 기쁨을 주는 말을 이리 극적으로 잘 하시기도 하지. 무덤덤함 속에 정다운 따스함을 지닌 로맨틱한 어른이었다. 

■ “며느리는 매일 같이 안부 전화를 해”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는지 며느리가 부엌에서 딸각딸각 짐을 챙기는 소리가 들렸다. 

“며느리는 매일 같이 안부 전화를 해. 그러니 어떨 때 전화가 안 오면 내가 걱정이 돼지.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옥천이 친정인데 사돈과는 가끔 식사도 같이 하고 자주 만나 친하게 지네지. 큰 며늘네 사돈은 멀리 있어 그리 못해 아쉽지.

사돈들이 다들 자식교육을 잘 시켜줘서 감사하지.”

큰딸은 김천 시청에 다니고, 둘째는 전기기술자 셋째는 경찰공무원이다. 저마다 자신의 자리를 잡아 잘 살아간다. 큰 걱정 없이 든든하다. 

이번 추석에는 예쁜 손주들과 사진도 찍고 용돈도 나눠줬다. 대학생은 10만원, 중학생은 5만원, 초등학생은 3만원, 유치원생은 2만원. 용돈을 주려고 준비하고 규칙을 정함에도 기쁜 과정이었다. 손주 충헌, 충용, 충희, 채하, 지원, 해룡 민혁이 다 사랑스럽고 귀엽다.  

“월남전 참전 후유증인지, 그전에 일을 많이 해서 그런지, 다리가 많이 아프고 힘들어. 몸 아픈 것이 가장 귀찮은 게지 다른 것이야 뭐 크게 힘든 게 있나.

옥천은 태풍도 많이 안 오고, 눈도 많이 오지 않고, 비도 적당해 크게 힘든 것 없이 살기 좋지. 옥천 교동에 육영수 여사 생가가 있고, 인근에 정지용 시인 생가도 있지. 한번 돌아보면 좋아.”  

명절 끝날 아내는 자식네가 돌아가려는 참에 현관에 오이며 가지, 부추 등 갖은 야채를 오종종 모아 두고 보따리를 꾸린다. 

“어머니께서 먹을 것 다 주시니 시장에 안 가도 돼요.” 며느리 얼굴에 함박웃음이 폈다. 주는 게 어디 야채 뿐 일까. 따듯한 정과 사랑은 덤으로 넣어서 돌아갈 것이다.  

젊은 날 월남전 참전의 처절했던 기억과 아픔을 넉넉한 미소와 사람 좋은 낯빛으로 승화하고 살아오신 어르신. 그 얼굴의 주름 속에는 아픈 기억이 켜켜이 쟁여져 숨겨져 있지 않을까 싶다. 화목한 가정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 마을 어귀의 감나무는 윤이 나는 탐스런 감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가을 햇살은 하늘 아래 한가히 늘어져 있고, 들녘의 벼는 누렇게 여물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인생의 고비를 넘기고, 한발 물러서 넉넉해진 그들을 꼭 닮았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추억의 뜰
정여림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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