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자서전 인생은 아름다워 (58)]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
[은빛자서전 인생은 아름다워 (58)]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
  • 김경희 시민기자 
  • 승인 2020.10.16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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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서면 월전리 정자현(1944~ )

 

참전용사의 집은 붉은 꽃무리를 담장으로 훤칠하게 서 있었다. 호리호리한 옷매무새에 백만 불짜리 눈웃음을 갖고 계신 어르신은 호탕한 유머로 반겨주셨다. 유년시절부터 허약한 몸이라 결혼도 미뤘다는 어르신은 어린 시절의 염려와 달리 월남전에 참전해서 무사 귀환 했으며 굳건하게 고향을 지키고 계신다. 갓난쟁이 때 목숨이 다 한줄 알고 냉골 바닥인 윗목에 밀쳐놓았지만 다시 살아 나셨다는 일화를 들려주시며 죽을 고비를 세 번 넘긴 아슬아슬한 기억도 곁들여 주셨다.

■ 고구마 박사였던 아버님의 유업 

1944년생인 내가 태어나기 전 우리 아버지는 마을에서 부자소리 듣던 값을 호되게 치르느라 왜놈들 등쌀에 밥 먹듯이 수탈을 당했다. 결국 이북으로 터전을 옮기기로 결정하셨다. 이북에는 친척이 터를 잡고 계셔서 비빌 언덕이 될 수 있었다. 논밭이며 재산을 처분하고 길을 떠났지만 산에 나무를 심어놓고 올라가셨다. 기대하고 올라간 이북도 삶의 여건들이 만만치 않아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6.25직전 낙엽송 값이 땅금보다 비싸던 때에 낙엽송 7천주를 심어놓고 올라가셔서 다시 귀향 했을 때는 예전의 영화를 찾는 듯 했다. 하지만 재산을 지키지 못하고 다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됐다.

예닐곱 살에 6.25를 만났다. 처음으로 무시무시한 총부리를 구경했고 초가집들이 즐비한 동네 담 장 안은 감나무들이 지키고 있었다. 인민군들이 마루에 앉아서 총부리를 곁에 두고 자기 집 감 인양 따서 한 입 베어 물고 껍질을 퉤퉤 뱉어냈다. 아버지는 강직하셔서 인민군돈으로 술값 치루는 꼴도 못 보셨다. 인민군 돈 받지 말라고 하셨다가 으쓱한 곳에서 봉변을 당할 뻔 하셨다. 하고 싶은 얘기는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신 아버지는 보국대에 끌려가시고 아버지 안 계신 틈에 삼촌은 의용군으로 끌려가서 집안의 남자들이 성할 날이 없었다.

1950년대는 낙엽송이 돈이 되던 때라 마대자루에 돈을 잔뜩 넣어두고 손을 넣어 한주먹씩 꺼내 쓰는 그런 시절이 있었다. 어린 내가 봐도 돈이 수북했다. 아버지는 나무와 농사에 일가견이 있던 분이었는데 ‘산과 싸운 사람들’ 이라는 책자에 실리기도 하셨다. 아버님 성함은 정 영자 기자이다. 나무 키워서 성공한 분으로 기록되었지만 아버님은 고구마 박사로 더 알려진 분이다. 군서면사무소에서 좁쌀 한말 보리쌀 한말을 얻어 죽을 끓여 먹던 시절에 아버지만의 고구마 농사법으로 알토란같은 작황을 이뤄내셨다. 팔밭을 일궈 고구마를 심었는데 두덕을 만들어서 아카시아 나무를 베어다가 쭉 깔고 고구마를 키웠다. 거름대신 아카시아 나무를 쓴 것이다. 누구도 생각 못할 아버님만의 농사법이었다. 그 시절에 그런 생각을 어떻게 하셨을지 대단한 분이다. 90이 넘으신 분들은 고구마 박사 정영기하면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신다. 나도 고구마 농사를 짓지만 아버님 흉내조차 낼 수 없다.

동네 친구들과 죽향 국민학교를 다녔다. 거리상으로 군서 국민학교가 더 멀어서 죽향으로 다녔다. 아침에 한 20명이 동네 어귀에 모여서 간다. 6학년 형님들 뒤를 따라 한 시간을 걷고 또 걸었다. 아침잠이 많아서 엄니가 ‘누구누구 성 내려온다. 어여 일어나라’고 이불을 걷어내시면 얼른 한 술 뜨고 책보를 둘러맸다. 옥천중학교 다니는 길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 월남에서 돌아온 정 병장

대전상고 졸업 후에 아버님 농사를 돕다가 군대는 27살에 갔다. 군 복무 중에 월남파병을 다녀와서 33살에 장가를 갔다. 노총각 소리 듣던 나이다. 어릴 때부터 몸이 허약하다보니 점쟁이가 남의 집 귀한 딸 과부 만든다고 늦게 장가가라는 말을 어른들은 지켜야 할 법처럼 받아들였다. 27살에 군대 가서 월남까지 다녀왔는데 살아서 돌아오니 장가를 보내주셨다. 

군대는 육군 수원 비행장으로 갔는데 내 주특기가 병참(兵站)이라 병장 한 명과 같이 강원도 인제 오금리가서 훈련받고 월남으로 파병되었다. 베트남 다낭에서 14개월 작전을 수행했다. 수시로 떨어지는 포탄소리보다 베트콩들의 게릴라전을 방불케 하는 습격이 더 공포스러웠다. 나는 병참(兵站)이 주특기라 혹독한 전투에 투입되지는 않았지만 천병들은 두려움에 시달리곤 했다. 우거진 숲을 지날 때면 어디선가 날아드는 총에 동료가 푹 쓰러지는 일들이 다반사라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도 숨통을 옥죄고도 남는다. 고엽제와 전쟁 후 트라우마로 생전 내내 고통 받다 돌아가시는 분들도 많다. 

본국으로 돌아오면서 ‘드디어 살았구나’ 나를 위로하며 감격스러웠다. 이등병으로 가서 병장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미군한테 전투 수당을 받았는데 병장부터 직업군인으로 포함되었다. 아버지보다 무서운 사람이 선임병이던 시절이다. 14개월 파병에서 돌아온 후에 원대로 다시 복귀했다. 최전방 부대인 강원도 철원 8사단 소속 부대였다. 월남전 참전 유공자로 문패까지 달아주면서 그 시절을 기억해주고 위로해주니 고맙다. 더불어 매달 연금까지.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월남참전용사들에게 병의원 진찰 등의 무료 진료비 혜택이 주어지면 전쟁터에 다녀온 보상에 큰 덤이 될 것이다. 

■ 옥천군 산림과에서 공무원으로 첫 발을 디디다. 

제대 후 첫 직장은 면사무소 기능직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시험 봐서 옥천군 산림과에 취업을 했다. 정식 공무원으로 출발이었다. 해마다 면서기 시험이 있었다.

그때는 5급(현: 9급)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하다못해 면서기’ ‘알아야 면장을 하지’ 이 일도 저 일도 못하겠으면 면서기라도 하라는 말이 있었다. 공무원을 저평가 하던 시대를 대변하는 말이지만 세월은 흘러 공무원의 위상은 격세지감(隔世之感)을 충분히 느낄 만큼 높아졌다. 

1970년대 산림과는 세칭 끗발 있는 부서였다.

“어디가나 술을 받아주고 밥을 해줬어. 군청 산림과에서 나왔다고 하면 산림과 어른 오셨다고 한상 차려내기도 했지. 산림과에서는 조림사업 업무를 보면서 벌목 못하게 단속을 했었어. 당시는 조림이 무조건 최고였지. 청성면으로 갔다가 군북면으로 다시 옥천읍 그리고 이원면에서 명예퇴직을 했어. 지긋지긋한 박봉이었는데 1980년대 들어서면서 처우가 달라지기 시작했어. 어느 해 인가 월급을 100만원을 갖다 주었더니 집사람이 놀라서 기절 할 뻔 했잖아. 허구한날 고생하던 식구한테 체면 좀 차렸지.”

58세까지 20년 넘게 나라의 녹을 먹고 퇴직했다. 

공무원들이 박봉에 시달리던 청성면에서 근무할 때였다. 월급이 100만원이 되니까 식구가 기절하려고 했다. 1980년대에 처우가 좋아지기 시작하니까 공무원들도 민폐를 안 끼치게 되었다. 월급봉투 갖다 주는 날은 밥상도 달라진다. 김치에 된장찌개가 매일 올라오던 밥상에 물 좋은 고등어가 떡 하니 올라와 있다. 

1980년대 까지만 해도 공무원들은 수기로 기록했다. 일례로 수해가 나도 피해 신고가 들어오면 수기로 작성했다. 얼마나 많은 폐해가 있었을까. 피해도 부풀려 기록할 수 있고 주민들이 거짓으로 알릴 수도 있다. 작성은 면서기 마음이다. 부패가 만연할 수 있지만 그건 빙산의 일각이다. 대부분 거짓말하지 않았다. 우리가 정직하게 살아왔기에 지금 이만큼 살 수 있다. 세상이 썩을 대로 썩었다고 혀를 끌끌 차지만 아직 깨끗한 사람들이 더 많기에 지켜지는 것이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키듯이 정녕 순도 높은 사람들이 더 많기에 세상이 정화되고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다. 약삭빠른 사람들이 눈앞의 이익을 먼저 가져갈 수 있지만 그건 잠깐이다.  

아내는 시집 올 때는 부잣집으로 시집와서 호강만 할 줄 알았지만 일이 너무 많아서 고생 많이 했다. 모내기철이면 놉을 100명이나 두고 그 새참을 다 날라 다녔다. 농사 많은 집에 시집오면 마님소리 들을 거 같지만 신세는 고달프다. 뒷짐 지고 물끄러미 일하는 것만 보고 있으면 욕먹기 십상이고 더 많이 가진 자의 자세도 아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고 뒤돌아서면 자라는 풀들도 웬수처럼 보인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벽에 걸린 가족사진이 있다. 우리 호경이 호영이 얼굴에 솜털이 뽀쏭한 고등학생 때, 우리 미정이 한 창 예쁠 때라 20년이 넘었다. 왠지 표정들이 어두운 사진이다. 군청 새마을과 재직 때 병원에서 조직을 10개 떼어서 서울로 보낸 적이 있었다. 의사도 암을 의심하고 다음번에는 가족이랑 같이 오라고 조심스럽게 얘기하는 통에 이렇게 죽는 건가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가족사진 한 장 없고 외식 한번 안하면서 살고 있던 내 모습이 가여웠다. 사진 찍기 전에 가족끼리 소고기를 먹자고 갔는데 다들 초상집 분위기라 몇 점 먹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가족사진을 찍었다. 가족들 모두 가장 힘든 마음 일 때 찍었던 사진이다. 그 3남매도 부모가 되어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준다. 우리는 3남매한테도 매달 용돈을 받고 있는데 아들이 마음이 있어도 며느리 결정이 없으면 헛일이라 시부모 생각해주는 며느리들이 기특하다. 이제 웃으면서 기억하니 세월이 야속하지 않다.

결과를 보러 가는 날 기운도 없고 택시를 불러서 병원에 도착했다. 의사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음료수 한 잔 하세요’

라고 말을 건넸다. 의사의 표정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조직검사 결과 암이 아니고 위궤양이 심하니 앞으로 조심은 하셔야 합니다.”

죽다 살아난 사람의 심정이 이런 걸까. 월남전에서 목숨이 위태롭던 때와는 사뭇 달랐다.

병원을 나오자 미정이가  “아버지 택시 불러서 가요”,  “야 택시는 무슨 택시냐 멀쩡한데 걸어서 가자” 병원에서 월전리 우리 집까지 산보하듯이 걸어서 왔다. 사람마음이 그렇게 간사하다. 

■ 허약했던 내가 고향을 지키고 있다

약골이던 내가 마을을 지키고 있자니 마을 근처에 들어오는 기피시설에는 예민할 수밖에 없다. 유독 월전리에 기피시설들이 많아서 이제 마을 주민들이 또 다시 기피시설들이 들어오면 아예 길바닥에 드러눕자는 거친 항의까지 하고 있다.

물론 꼭 필요한 시설들이다. 누군가에게 필요하다면 어딘가에는 있어야 하지만 유독 내가 사는 동네에 밀집됐다면 누군들 반대의사를 표방하는데 주저할 이유가 없다. 골고루 분포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나도 여행을 적잖이 했는데 관광비용으로 매달 40만원 넘게 지불하면서 여러 곳을 다녔다. 

여행은 열심히 일한 나에게 꿀맛 같은 보상을 준다. 코로나19로 이제 해외여행은 당분간 어려울 거 같고 오래전 다녀온 캐나다 휘슬러의 사진으로 위안 삼아야겠다. 이제는 마을의 구심점이 되어 고향을 지키는 일이 남은 여생의 내 길이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고 허약해서 냉골 바닥인 윗목에 밀쳐놓았던 갓난쟁이가 결국 고향을 지키고 있다.

그 길에 함께 하는 사랑하는 아내 덕분이다. 곧 월전리의 집집마다 붉은 감이 담장 넘어 까지 가지를 드리울 때 우리 부부도 덩달아 웃는 얼굴로 월전리를 찾는 사람들을 반길 것이다. ‘환영합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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