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남초, 옥천중, 충남고를 졸업한 안남 출신 김원순씨
계룡시에서 충북도민회장을 맡아 출향인 단합도 도모
금구천변에서 놀던 기억, 수박 서리하던 것 생각 나

옥천에서 30분 남짓 떨어진 곳. 그 곳에서 안남면 연주리 김선민씨의 여섯째 아들 김원순(62, 계룡시)씨가 어느덧 아내와 네 명의 자녀와 함께 25년째 둥지를 틀어 살아가고 있다. 안남초에 입학하여 삼양초로 전학을 가 졸업한 뒤, 옥천중(23회), 충남고등학교를 졸업헸다. 

충남대학교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후, 공주의 경천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선생님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수천 명의 학생에게 삶의 지혜를 전달한 뒤 무탈하게 교사 생활을 마무리 한 것도 큰 기쁨이다.

그는 두번째 고향 계룡시에서 뿌리내리며 자리잡았다. 

계룡시의 주민으로 족구협회장과 계룡시 충북도민회장을 하며 지역 공동체 화합의 중심이 되어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그, 이제는 옥천에서 산 기간보다 계룡에서 살아온 시간이 길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옥천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있다. 

금구리 실개천의 전경과 함께 수박 서리하던 친구들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그렇기에 퇴직 후 귀향을 준비한다는 친구들의 전화를 받을때 마다 그 부러움은 이루 말할수 없다.  

■ 안남초 대표 개구쟁이에서 교육자로 살아온 삶

김원순씨는 안남면 연주리에서 군 공무원 출신인 김선민씨의 6남3녀의 형제 중 여섯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김씨는 안남초의 소문난 개구쟁이로 명성을 떨쳤는데 그 배경에는 든든한 친척들 덕분이었다. “친척들이 한 동네에 모여 살았어요. 큰 집 10명, 둘째 집 10명, 우리 집 9명이  살았죠. 사촌들이 각 학년에 두 세명씩 있어서 든든했죠” 면으로 들어오는 길목을 지킨다고 시내와 변두리 지역 아이들과 투닥거림을 하던 기억도 떠오른다. 

“그러면 안되지만 길목을 지키는 싸움에서 지면,  아이들이 괴롭힘을 당했어요. 괴롭힘을 피하려고 칡 같은거 캐오고 그랬죠.” 

즐겁게 안남면의 자연을 뛰어놀던 그가 삼양초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안남면에서 근무하던 아버지가 군 건설과로 발령이 난 것이 그 배경이다. 

“가족이 많다고 가족들은 먼저 이사가 살고 있었죠. 저와 여동생과 둘이 할머니네 집에서 살다가 중학교 입학할 시기가 되어 삼양초로 전학을 가게 되었죠.” 

안남초 골목을 휩쓸고 다니던 그도 읍내 학교로 전학가니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다.  촌동네 출신이라고 왕따 아닌 왕따를 당해 당시 면 오지마을에 살던 아이들의 설움을 몸소 체감했다고. 

짧은 고난의 시기를 삼양초에서 보낸 뒤 옥천중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그때만 생각하면 아련한 기억이 남아있어요. 제가 친화력이 좋아서 친구들과 금새 친해졌죠. 모범생은 아니였고 수박 서리 하며 학교를 다녔죠.” 공부를 열심히 하지는 않았지만 재능이 있었기 때문에 일반 고등학교 입학 전 미리 치른 용산철도고등학교 입시 시험에서 차석으로 합격하였다고. 

신체 치수를 잰 자신에게 딱 맞는 교복을 입을 생각에 들떠있는 김씨에게 학교 선생님은 “기차 들어올때 깃발 흔들러 가냐”고 말하면서 핀잔을 주었다. 의기양양하게 학교에 갔던 김씨는 칭찬은 커녕 비꼬는 선생님의 말에 충격을 받아 용산철도고등학교 입학을 포기했다. 충남고등학교에 진학 후 충남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사회학과에 다니며 사회운동을 했죠. 스터디도 하고, 5.18 당시 전라도에 위치한 섬에 숨기도 하였죠.” 대학을 졸업한 뒤 세상을 올바르게 바꾸는 기자가 되고 싶었다. 언론사 입사를 준비했지만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고. 

“부전공으로 교직 이수를 했었기에 교원 자격증이 있었죠.” 대학시절 큰 뜻이 없이 해온 교직 이수가 평생의 직업이 될지는 몰랐다. 1983년도에 공주에 있는 경천중학교 사회 선생님으로 교편에 섰다. 당시에 학생수는 1천 300여명, 공주에서 내로라하는 명문 고등학교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농촌 학령인구 감소로 이제는 50여명의 학생만 남았다고.

배움에는 끝이 없다고 하던가. 수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며  공주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석사 학위도 취득하고, 방송통신대학교 국문학과에 편입도 해 바쁘게 살았다. “제 입으로 말하기 우습지만, 다양한 경험이 있어 학생들이 좋아했어요.” 인생에 갈림길이 많았기에 장래희망을 가지라고 강요하지 않았고, 숙제도 내지 않고, 공부해야 성공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의 말 한마디에 인생이 바뀐 그이기에 그저 제자들을 믿고 기다려 주었다고.

이러한 교육 방식은 1남 3녀의 자녀에게도 그대로 적용 되었다. “공부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 있으니 공부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고 했어요. 다만 책은 꼭 읽으라고 했죠. 이사할 때 책을 정리하니 두 트럭이 나왔죠.” 책 속에서 자신들이 살아갈 방향을 찾은 것일까? 큰 딸은 약사가 되었고, 둘째 딸은 일본에서 공부하다 한국에서 임용 고시를 준히하고 있다. 셋째 아들은 아버지가 다닌 충남대학교에서 영어 영문학을 전공하고 있고, 막내 딸은 공주대 한문교육을 전공한다고. 

■ 고향 친구들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

“백수가 과로사 한다고 하자나요? 학생들 가르칠 때 보다 더 바쁘게 살고 있어요. 감투 쓰는것을 싫어 하는데 자꾸 모임에서 회장으로 선출 되는거에요.” 김씨는 서글서글한 성격에 리더십을 겸비해 계룡시 족구 협회장을 하며 매주 족구 시합에 참여하여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고, 계룡시 충북도민회장을 하며  옥천 출신 계룡 시민의 단합을 위해 힘쓰고 있다. “오늘 아침에 집에서는 족구장에 그늘이 없어 파라솔 설치를 건의한 것이 예산이 나왔다고 하더라구요. 설치 위치를 잡기 위해 족구장에 다녀왔죠.” 가정에서는 막내 딸과 논어를 필사하며 마음 수련을 하며 지내고 있다. 20편의 논어 중 절반을 필사했다고.

“사는게 바빠 고향을 방문하지 못했었는데 간암 걸려서 죽었다는 소문도 돌았다고 하더라구요.”  뜬소문에 기분 나쁠만도 하지만 김씨는 고향 친구들에게 미안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얼마전 작은 아버지가 상을 당해 옥천에 가니 먼저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해 주더라구요.” 이제는 여유가 생겼으니 주기적으로 동기 동창들을 만나기를 소망한다고. 
“막내 동생이 이원중 옆에 살고 있고, 삼성전자 앞 홍헤어 대표가 제수씨에요. 셋째 형 김병순은 옥천에서 개인택시를 하고 있죠.” 형제를 보기 위해 들린 옥천에서 친구네 집도 찾아보며 추억 여행을 한 기억이 떠오른다고. 김원순 씨는 고향에 친구들에게  “모두가 어려운 시기인 만큼 고향 친구들이 슬기롭게 극복하기를 기원하고, 왕래도 없이 살았는데 반갑게 맞이해 줘서 고맙고, 기회가 있으면 옥천을 위해 유의미한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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