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향수」의 넓은 벌과 실개천에 대한 고찰
정지용 「향수」의 넓은 벌과 실개천에 대한 고찰
  • 옥천닷컴
  • 승인 2020.10.08 10: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노봉식 (옥천읍 양수리)

Ⅰ. 들어가며 - 시인 정지용에 대하여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 ‘정지용’(鄭芝溶, 1902∼1950). 그는 ‘현대 시단의 경이적 존재’, ‘현대시의 전환자’, ‘천재 시인’으로 일컬어진다. 

신경림 시인은 ‘우리 시 100년사를 조망하면서 내린 결론으로 시의 넓이와 깊이에 있어서 정지용 만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시인은 없었다’라고 피력한 바 있다. 고려대 명예교수 최동호는 ‘서구 추수적인 아류의 이미지즘이나 유행적인 모더니즘을 넘어서 우리의 오랜 시적 전통에 근거한 순수시의 세계를 독자적인 현대어로 개진함으로써 한국 현대시의 성숙에 결정적인 기틀을 마련한 시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대륙과 해양의 사이에 끼여 항시 그들의 침략을 받으면서도 삶을 이어와야만 했던 가녀리고 끈질긴 것이 우리 본연의 모습이었다면, 그 끈적이는 삶 속에 서린 한(恨)의 정서를 우리의 목소리로 발성한 최초의 현대 시인이 바로 정지용일 것이다. 우리 언어의 깊은 광맥을 찾아 그 섬세하고 감각적인 시어 구사로 대상의 선연한 이미지를 형상화하여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 보인 공적은 누구도 부인 못 할 것이다.  

축축한 감상주의나 투박한 정감 토로가 지배적이던 당시 시단 일반을 고려할 때 정지용 시행의 단아한 정취는 경이에 값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정지용의 대표작의 하나이며 20세기 한국시의 절창의 하나인「향수」를 떠올릴 때 한결 분명해진다. 

다음은 1939년 6월 『문장』에 발표한 정지용의 詩論「시의 옹호」의 마지막 구절이다. 

시인은 정정한 거송巨松이어도 좋다.
그 위에 한 마리 맹금猛禽이어도 좋다.
굽어보고 고만高慢하라.

정지용 시인은 1902년 6월 20일(음력 5월 15일)에 충청북도 옥천군에서 태어났다. 그가 다닌 옥천공립보통학교 학적부 주소는 충북 옥천군 (읍)내면 상계전 7통 4호(忠北 沃川郡 (邑)內面 上桂田 7統 4戶)이고,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적부 원적(元籍)은 충북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 1통 5호(忠北 沃川郡 沃川面 下桂里 1統 5戶)이다. 그는 영일정씨 정태국(鄭泰國, 1873년생, 2대 독자)을 아버지로 하고, 하동정씨 정미하(鄭美河. 1872년생)를 어머니로 하여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0년(9세) 4월 6일 4년제인 옥천공립보통학교(현 죽향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13세) 3월 25일에 졸업했다. 입학 당시의 학생 수는 50명 가까웠으나 매년 10명 가까이 줄어 졸업은 16명이 하게 되었다. 정지용의 성적은 중간 정도를 유지했다. 1913년(12세) 졸업을 얼마 앞두고 정지용은 충북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에 사는 은진 송씨(恩津 宋氏) 명헌(明憲)의 딸인 동갑내기 송재숙(宋在淑, 1902년생)과 결혼을 했다. 어려서부터 천자문을 익히고 사서오경을 외웠으며 한시 짓기 연습도 거친 정지용은 1915년(14세)에는 서울에 올라가 처가의 친척으로 한학에 조예가 깊은 송참사의 집에서 휘문고보에 입학하기 전까지 3년여간 한학을 공부했다. 

정지용의 부친 정태국은 젊은 시절 만주를 배회하다가 지용이 세 살쯤 되는 해, 1905년경에 돌아와 옥천 구읍 하계리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면서 가게를 꾸려갔고 상·하계리 이장(內部主事)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조상과 부모님이 계신 옥천군 군동면 화계리(沃川郡 郡東面 花溪里), 일명 꽃계리(꾀꼬리)를 떠나 옥천공립보통학교의 소재의 하계리에 삶의 터를 잡은 것이다.

1911년 7월 옥천읍내 하천에 홍수가 나서 하안(河岸)이 붕괴하고 연장 약 120간의 제방을 개축했다. 1917년 8월 11일 참혹한 홍수 피해로 옥천 전체가 침수되었다. 정지용의 부친 정태국은 두 차례 홍수로 하계리 거천(巨川)으로 불리던 개천 옆의 한약방과 6~7년간 장사하여 모은 재산을 대부분 잃고 말았다. 그로 인해 한약상을 운영하던 집안이 몰락하면서 지용은 어린 시절을 어렵게 보내야만 했다. 

1918년(17세) 4월 2일 그는 고향을 떠나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의 성적은 1학년 88명 중 1등이었다. 당시 서울 유학비는 일 년에 20원(일본 유학비는 40원)이나 되는 큰돈이 들었다. 그는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학비를 조달하기 위해 은행 사환으로 취직했으나 이를 알게 된 담임교사의 이야기를 들은 민영휘 교주(校主)가 학비는 물론 생활비 일체를 부담해주었다. 2학년 때 3·1운동 후유증으로 가을까지 수업을 받지 못했고 휘문고보 학내사태로 무기정학처분을 받았다. 그 후 휘문고보 5년제 과정을 마치고 1923년 3월(22세)에 졸업했다. 

졸업 후 모교 교사로 근무한다는 조건으로 교비생이 되어 1923년 4월 일본 교토(京都) 동지사(同志社)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그 후 1926년(25세) 3월에 예과를 졸업하고, 4월에 영문과에 입학했다. 1928년(27세) 음력 2월에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 40-1번지에서 장남 구관이 출생했고, 1929년(28세) 3월 동지사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후 9월 모교인 휘문고보에서 영어과 교사로 재직하게 되었다. 그해(1929년) 부인과 장남을 솔거(率去)하여 옥천에서 서울 종로구 효자동으로 이사했다.

정지용의 부친은 자식의 처가뻘 되는 송지헌의 농장에서 머슴살이를 했다. 나중에는 농장의 마름 위치까지 올랐다고 한다. 1910년대 초에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 생산한 토지조사부에 의하면 송지헌은 하계리에 800여 평의 대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1922년(壬戌年) 옥천향교 중수기 편액을 쓴 유학자이며 명필가였다.

정지용의 혈육으로는 부친 정태국과 둘째 부인인 문화 유씨(柳貞, 1891년생)와의 사이에 태어난 이복 여동생 계용(桂溶, 1915년생)과 남동생 화용(華溶, 1923년생)이 있었다. 

화용은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 40-1번지에서 태어나 옥천면 금구리 172-4번지에 분가하여 살다 6·25 때 사망했다.

계용은 옥천군 내남면 하계리 1통 4호에서 출생했다. 계용이 태어난 곳은 정태국씨가 운영하던 한약방, 즉 옥천면 하계리 1통 5호의 바로 옆집이다. 정지용이 일본 교토(京都) 동지사(同志社) 대학에 입학(1923. 5)하기 두 달 전인 1923년 3월에 서울에서「향수」를 창작할 당시 계용은 만 아홉 살로 그 시의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로 묘사된 것으로 보인다. 후에는「오월소식」에서 ‘꾀꼬리 같은 선생님’으로 그려지고 있다.「뻣나무 열매」에서는 ‘외로운 섬 강화도로 떠난’의 구절처럼 그려지고 있는데, 실제 계용 씨는 강화도 소재 학교 교원으로 부임한 사실이 있다고 한다. 그녀는 열아홉 되던 1933년에 충청남도 논산군 논산면에 사는 박씨에게 시집가서 살다가 최근(2015년 기준) 사망했다고 한다.

정지용과 송재숙 사이에는 10명이 넘는 자녀가 태어났는데, 3남 1녀만 장성하게 된다. 그 자녀로는 구관(求寬), 구익(求翼), 구인(求寅), 구원(求園), 구상(求翔) 등이 있었고 구상은 요절했으며, 1927년과 1930년 사이에 두 명의 자녀를 잃는 것으로 보인다. 정지용의 차남 구익은 가톨릭 사제(司祭)를 양성하는 함경도 원산의 덕원신학교에 진학했으나 6·25 때 병사했다. 삼남 구인은 양강도 방송위원회 중서군 주재원 책임기자로 활동했다.

정지용은 1946년(45세)에 좌파 문학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 아동문학분과 위원장에 추대되었다. 그는 1948년(47세) 2월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직을 사임하고 녹번동 초당에서 서예를 즐기면서 소일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949년(48세)에 과거 좌익 전력 인사들의 사상적 선도를 위해 만들어진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1950년 7월경 가족들에게 ‘세상이 바뀌었는데 나가서 얼굴도 내밀고 해야 무사할 것’이라고 말을 하고 찾아온 대여섯 명을 따라 집을 나선 뒤 돌아오지 않았다. 설정식과 함께 자수 형식을 밟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평양 감옥에 이송 수감 중에 폭격으로 사망했다. 

정지용의 아명은 어머니의 태몽에서 유래되어 지용(池龍)이라 했고, 이 발음을 따서 본명을 지용(芝溶)으로 했다. 필명은 ‘지용’이다. 

일제강점기에 창씨명은 대궁수(大弓修)이다. 정지용은 큰 활을 세운다는 의미로 夷(東夷, 우리 민족)의 글자를 나눠 大弓에, 이름은 외자로 세울(닦을) 修를 썼다. 아들 구관 씨의 이름은 만滿(가득차다, 활을 당기면 둥그렇게 된다)이고, 그의 밑에 동생은 익翼(날개, 화살 끝 날개), 또 다른 동생은 신迅(빠르다, 화살이 쏜살같이 나가 적을 맞힌다)을 이름으로 썼다. 정지용은 ‘화살이 쏜살같이 적을 맞힌다’에서 적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구관 씨는 왜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정지용이 휘문고보 재직 시 학생들 사이에서 ‘신경통’과 ‘正宗(술을 좋아한다는 의미)’ 등의 별명으로 불렸고 모윤숙과 최정희 등의 문인들이 그를 ‘닷또상(소형 자동차)’이라고 칭(稱)하기도 했다. 휘문고보 학적부 기록에 그의 5학년 때 키는 156㎝이고, 몸무게는 45㎏이었다.

1926년 4월 동지사대학 영문과에 입학한 정지용은 1927년 12월 4일 캠퍼스 내 교회에서 호리 데이이치 목사에 의해 세례를 받고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그 후 1928년 음력 7월 22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당(가와라마치 성당)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뒤튀(Y. B. Duthu, 1865∼1932)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세례명은 ‘프란치스코’였고, 이후 그가 작품을 발표하며 프란치스코의 한자식 표기 ‘방제각(方濟各)’과 그것의 중국식 발음인 ‘방지거’를 즐겨 썼다.

정지용은 일본 유학 시절에 방학이 되면 사각모를 쓰고 옥천성당에 자주 출입하면서 윤례원(尹禮源) 토마스 신부와 친교를 나누었다. 그의 부친은 하계리에서 최초로 양약방 겸 한약방을 운영하는 재력가였고, 그의 조부 정구택(鄭九澤)은 영세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했다.

정지용은 주로 한복을 입었다. 이것은 그가 지향한 독립운동의 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여름에는 모시 저고리와 삼베옷을 입었고, 겨울에는 주로 검정 두루마기를 입었다. 

(다음호에 계속)

이 기사를 후원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