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숙제 (옥천작가회의회원, 동이면 세산리)

지리한 장마 끝에, 무서운 구름의 터진 틈으로 파란 하늘이 가을을 몰고 왔다. 그런데 가을이 가을이 아니다. 하늘은 높고 티 없이 맑건만, 우리네 가슴엔 말 못 할 수심만 가득한 묘한 살림살이다.

사람과 사람이 거리를 벌려야, 네가 살고 내가 공존할 수 있는 기묘한 논리다.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던가, 오늘의 이 가공할 현장을. 그러나 언제까지나 우리는 세태를 비관만 하고 방관할 수 없지 않은가? ‘위기를 기회’로 전환할 줄 아는 능력은 인간만이 소유한 능력 아니던가. 오늘의 이 난국을 슬기롭게 극복해서, 보라는 듯 국력의 추동력을 재발휘 할 때다. 분열은 자멸로 가는 지름길이다. 일찍이 우리 선조들은 불굴의 의지로, 오늘의 대한민국을 든든한 반석 위에 올려놓지 않았던가. 이럴 때일수록 지난 역사 속에서 민족적 역량의 지혜를 모아야 한다.

위기를 기회로 활용한 대표적 인물이 바로 ‘조조(曹操, 155년~220년)’다. 적벽대전(赤壁大戰, 208년), 조조가 처참하게 당한 최대 수모의 전쟁터이다. 2천년 전 조조의 패기는 하늘에 닿아있었다. 남진에 남진을 꿈꾸며 삼국지 최대의 전쟁판을 벌린다. 이에 대항한 유비와 손권의 동오군 병력은 초라했다. 조조의  가공할 화력은 가히 병력 100만이요, 기마는 8천기를 넘었다. 이에 비하면 유비와 손권의 병력은 고작 5만이다. 숫자로만 셈을 한다면 적수가 되지 못하는 싸움이다. 우리네 인생사가 그렇듯이, 전쟁도 끝나보아야 결론에 도달한다.

유비 군과 손권의 장수 주유는 천하제일의 지략가, 제갈공명의 ‘연환계’에 의한 화공 전략으로 한순간에 ‘위기를 기회’로 만든다. 여기에 조조의 방심과 오만이 한몫을 했다.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참변을 당하는 치욕을 맛본다. 조조는 제갈공명과 주유의 ‘연환계 화공법’에 속수무책 전멸하고 패퇴를 감행한다. 그러나 제갈공명이 누구던가. 전략과 지모는 하늘의 계책을 닮았고, 안목은 인드라망의 그물처럼 성글지만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천문과 지형에 통달했던 ‘하늘의 비기’를 내장했던 문무겸비의 책략가가 아니던가.

조조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물과 불을 가리지 않던 인물이다. 그는 생쥐 꼴이 돼서 오림으로 죽을 기력을 다해 도주한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의리의 맹장’ 조자룡을 만난다. 사투를 벌인 끝에 활로를 개척한 조조는 미친 듯이 웃는다. 또다시 공명의 처신을 비웃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한 것.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호로곡’에는 장판교의 영웅인 장비가 조조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죽을 조조는 아니었다. 사지를 탈출한 조조가 ‘화용도’에 도착하니, 천하의 지장인 관우가 저승사자처럼 버티고 있는 게 아닌가. 또다시 막다른 골목에서 삼국지 최고의 명장면이 연출된다.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다. 조조는 간웅이면서 ‘득인(得人)과 용인(用人)’의 천재였다. 그는 30년 동안 전쟁터를 누비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은 독서광이요 시인이었다. 눈이 오면 눈길 위에서, 비가 오면 빗길에서 가슴의 통한을 절창으로 토해낸 무장이며 뛰어난 문사였다. 누구의 부하를 묻지 않고, 인재가 가진 재주를 귀하게 모실 줄 아는 사람이 바로, 천하의 영웅 조조다. 그런 사람이었기에 관우는 조조가 무릎을 꿇자, 옛날에 입은 보은의 대가를 청산하고 조조의 목숨을 허락한다. 이것이 시대를 앞서가는 영웅들이 펼치는 대서사시다.  조조에게서 입은 ‘오관참육장(五關斬六將)의 의리를 생각해서 관우는 자신의 목을 내놓고서 적장의 목숨을 살린다. 이것이 영웅과 영웅간의 교감이다. 처참하게 망가진 조조는 혈혈단신으로 허도로 돌아간다. 이 쓰라린 적벽대전의 참패를 교훈 삼아, 아니, 손자(孫子)가 병법에서 누누이 강조한 이환위리(以患爲利)를 가슴에 절절히 새겨, 결국은 황제에 등극하게 된다. 쓰린 시련은 혹독했지만, 치유로써 ‘별’로 승화를 이룬 것이다.

장자(莊子, BC370-BC280)도 천신만고의 역경을 극복하고, 당당하게 고전의 전설이 된 사상계의 별이다. 그가 생존했던 춘추전국시대는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현장이었다. 평생을 벼슬 없이 살면서도 군왕들 앞에서 당당했던 은둔과 비운의 선각자다. 그는 『장자』의 ‘인간세(人間世)’ 편에서 삶의 애린 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진정한 ‘나’로 살아가는 비법을 장구의 언어로 설파한다. 속세에 발을 들여놓지 않기는 쉬우나, 속세에 살면서 속세를 벗어나는 방도를 우언의 형식을 빌려 후학들에게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렇다. 부처님도 평생을 두고 당부하고 당부를 하지 않으셨던가?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없는 이 ‘육신 덩어리’를, 자꾸만 내 것으로 생각하고 집착하는 무서운 병이 아상(我相)인데, 이것을 평생을 두고서 깨닫지 못하기에, 처처가 ‘보물상자’이건만,  눈앞에 놓고서 손도 대지 못하는 것이 중생들이라고. 이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고자 했으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고.

장자도 부처님과 똑같은 말씀을 하신다. 『장자』를 해석함에 있어서 독보적 존재로 부각된 이현주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장자가 주장하는 길은 세속의 처세훈도 아니다. 입신양명과는 더더욱 멀다. 뜬구름 같은 터무니없는 ‘이상론’에 빠져서 꿈결 같은 이 세상을, 적당히 거리를 두고서 만리장공 유유자적하게 노닐라는 하는 얘기가 아니란다. 장자가 주장하는 바는, 세상이 험하고 역경이 휘몰아칠수록, 세속의 발자취를 끊으라는 말이 아니라, 발자취 그 자체를 남기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자기가 남긴 발자취에 스스로 묶이지 말라고. 아니, 세속을 떠나라는 것이 아니라, 세속 한가운데서 ‘하늘나라 시민’으로 살아가라고, 통절하게 후세의 영민한 후학들에게 부탁한다. 연못의 더러움에 뿌리를 내리되, 그 더러움을 딛고서 보라는 듯 당당하게, 꽃을 피우며 향기를 뽐내는 연꽃 같은 자태로 세상살이에 임하라고.

이것은 작은 가르침이 절대 아닐 것이다.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은, 이미 시간의 강을 건너가 이 세상 속을 살면서, 이 세상을 멀리 벗어나 있어야 하기에. 이 무애(無碍)의 정신은 무상한 세상사와 험난한 파고를 헤쳐나갈 수 있는 ‘참된 주인공’만이 즐길 수 있는 지상 최고의 복락이기에. 이것이 시대를 초월한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 비방들이다.

예수님도 ‘모멸과 능멸의 저주’ 앞에서, 하늘의 부름 앞에 의연하게,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이 땅의 위기를, 영생의 축복으로, 거듭 태어나신 분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그분의 죽음은 죽음이 아닌,  하늘나라의 충만한 생명으로 거듭 태어난 일이다. 이렇듯 위기가 기회다. 인류가 이 땅에 온 이래로 지구는, 늘 상 고난과 역경의 틀로 자전과 공전을 거듭하면서, 새롭게 인류를 진화시켰다고 나는 생각한다.

올 같은 해는 없다. 그러나 올해 같은 고난의 역사를 극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도, 오늘을 사는 우리들, 한반도의 대한민국 국민 각자에게 부여됐다. 보라는 듯 훌훌 털고 일어나, 더 부강한 대한민국으로 가는 것이다. 우리니까 할 수 있을 것이다.

올 추석은 그런 의미에서 가장 간소화하면서도, 지극한 예의로 최고의 정성 담아, 조상님께 올리는 뜻 깊은 명절이 되도록, 우리 다 함께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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