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겨냥한 글인데 안타깝게도 추석이 끝나고 실리게 됐네요. 감안하고 읽어주세요.

부러진 상다리를 붙들고 
네 식구가 둘러앉아 밥을 먹는다 

제법 그럴듯한 밥상을 이루었구나! ─ 
기름기 도는 더운 쌀밥이 네 그릇 
꼭 있어야 할 김치도 있고 
입맛 돋구는 산나물도 한 접시 
때로 일상처럼 와글와글 끓는 찌개와 
흥으로 곁들이는 소주잔도 맑은 얼굴을 내밀고 
가끔 세 살배기 딸아이도 올라앉아 재롱을 떠는 ─ 
남부러울 것도 표날 것도 없는 차림새에 
달처럼 둥근 식구들이 둘러앉은 저녁 

잠시라도 마음을 놓거나 한눈을 팔면 
손쓸 겨를도 없이 기울어질 목숨의 텃밭, 
도시의 날품으로 가꾼 위태로운
밥상을 붙들고 
울컥, 뜨거운 것이 넘어오는 
목구멍 너머로 밥을 밀어 넣는다 
                       
-‘위태로운 밥상’ 류정환

 

산업화 시대의 화두는 ‘밥’이었다. 날품을 팔고 집으로 귀가하는 아버지의 어깨에는 쌀자루가 얹어 있었다. 생존의 상징인 밥이 이제는 여가의 일부가 되었고 주말에는 맛집 투어리스트들이 전국의 맛집을 순례하고 순례의 기록은 먹스타그램(인스타그램에 음식사진이 많아서 불리는 별칭)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삶의 질은 먹방사진과 비례하는 착시 효과를 주기도 했다. 먹방을 선도하는 방송이 가장 신경을 쓰는 건 ASMR 사운드다. 한때 안부의 표식이었던 ‘진지 드셨어요?’는 오히려 모멸감을 안기는 문장이 되었다. 아직은 미디어에 취약한 우리들이라 맛집을 쫓아다니는 신세지만 긍정적으로 본다면 배를 곯는 시절보다는 차라리 낫지 않은가? 

‘달처럼 둥근 식구들이 둘러앉’는 추석이다. 식구(食口)의 기억을 1년에 두 번 정도 확인하는 날이다. 식구들과 둘러 앉아 볼 만한 음식영화 3편을 소개한다. 

바베트의만찬 / 1987<br>
바베트의만찬 / 1987

고진감래(苦盡甘來)를 주는 영화라면 유럽영화, 그중에서 프랑스 영화가 떠오른다. 누벨 이마쥬 계열 ‘나쁜 피’의 레오 까락스나 ‘디바’의 장자크 베네스는 프랑스 영화는 난해하고 지루하다는 선입관을 심어 주었다. 영화 <바베트의 만찬>은 고진감래(苦盡甘來)에 어울리는 영화다. 영화의 무대는 북유럽의 해안가 마을이 배경이다. 제목에서 암시하듯 풍성한 먹거리를 기대했지만 처음부터 그런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다. 청교도 분위기의 마을에 듬성듬성 노인들이 살고 있고 마을은 적막하다. 유럽 영화가 으레 그러려니 생각하면서 보니까 좀 다행이었지. 그렇지 않았으면 중도에 포기했을 영화다. 하지만 이런 실망 때문일까? 중간 허리를 지나면서 집중력이 생기더니 마지막으로 가니 장난이 아니다. 여러 상을 휩쓴 영화다운 자세가 마지막에서 나오기 시작하고 음식영화가 던져주는 화해의 메시지가 묵직하게 전해졌다. 살얼음 낀 얼굴로 들어온 만찬의 초대 손님들이 음식이 나올 때마다 봄햇살에 녹듯 풀리는 흐뭇한 풍경은 압권이다. 그리고 그들은 화해한다.

음식남녀 / 1995<br>
음식남녀 / 1995

이제는 거장이 된 리안 감독의 1994년 대만영화 <음식남녀>는 <바베트의 만찬>에 비하면 처음부터 풍성한 중국요리로 관객의 눈을 어지럽힌다. 아웅다웅하던 가족들도 식탁 앞에 모이면 따뜻한 국물 앞에서 앙금이 풀리듯 음식을 주제로 하는 영화도 대개 이런 유형이다. 유명한 요리사였던 아버지는 매달 세명의 딸들과 푸짐한 만찬을 나눈다. 하지만 아버지는 조금씩 미각을 잃어가고, 공교롭게도 함께 살던 딸들이 만찬을 할 때마다 결혼을 하면서 집을 떠나간다. 심심할 거 같은 영화도 갑자기 나타난 매운맛처럼 상큼한 반전이 흥미로운 영화다. 참고로 대만인 아버지 3부작으로 〈쿵후 선생〉 〈결혼 피로연〉도 있다.

빅 나이트 / 1997<br>
빅 나이트 / 1997

<빅 나이트>는 한동안 웹사이트에서 찾아 다녔던 영화였다. 최근 영화 사이트에 올라와서 바로 다운 받아 저장해놨다. 뉴저지에서 ‘파라다이스’라는 이탈리아 식당을 연 형제 프리모와 세콘도의 이야기다. 주방장인 형 프리모는 전통을 중시하며 고급 요리를 고집하는 반면 세콘도는 형과는 달리 돈 버는 게 우선이다. 형제 사이는 점점 벌어지고 경쟁 상대인 맞은편 식당에 손님을 뺏기고 차압될 위기에 처한다. 그러던 중 형제는 식당을 살리기 위해 유명한 음악가 루이스 프리마를 초청, 저녁만찬을 갖자는 계획을 세운다. 

술이 한 잔씩 돌아가면서 보름달의 밤은 조금씩 달아오른다. 잔뜩 묶어놨던 앙금들이 알콜과 기름진 음식에 녹아 내리기 시작하니 1년에 한번 해포를 푸는 밤이다. 너무 과하면 보름달 뜨는 밤은 숙취를 선물할테니 음식이 독이 안되게 조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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