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 생애사 연대기] 방패막 하나 없는 들판의 민들레처럼
[어르신 생애사 연대기] 방패막 하나 없는 들판의 민들레처럼
  • 이정숙 시민기자
  • 승인 2020.10.06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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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연 어르신 (1933년생~)
군서면 월전리

대문 없는 널따란 마당에 들어서니 반들반들 윤기 나는 배추가 정갈하게 줄맞춰 앉은 텃밭이 먼저 나를 반겼다. 낮은 담장 곁으로 웃자란 가을꽃이 살랑대며 반기고 맞은편엔 가지와 고추나무가 키 재기를 하며 어우러져있다. 밭고랑 사이로 주인의 부지런한 발길이 스며든 자리마다 햇살들 도란도란 모여들고, 정겨운 마음을 풀어내는 사이 마실갔다 왔다며 어르신이 환히 웃으시며 살갑게 다가오셨다. 

■ 악몽 같던 기억의 파편들

내 고향은 군서면 옥각리라는 데여. 논떼기 밭떼기 없는 가난한 집에 8남매 중 딸로는 맏이로 태어났어. 그래도 아버지가 희연이라는 예쁜 이름도 지어주시고 사랑받았지. 부모님은 층층 자식들을 낳고 없는 살림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 이것저것 안 해 본 것 없이 사셨어. 

내가 11살 때 왜정 시절이었는디 어느 날 갑자기 일본놈들이 와서는 날 끌고 가려했어. 울며불며 안간 다고 아버지 바짓가랑이 붙잡고 버텼는데 왜정 때라 꼼짝 못하고 끌려갔지. 동네에서 내 또래 둘이 끌려갔어. 부산에 있는 무슨 방직 공장이었는디 매일 실을 뽑게 하고 얼마나 일을 시켰나 몰라. 일 못한다고 ‘빠가야로’ 소리를 얼마나 들었나.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어. 밤마다 베갯잇 다 적시고 아침이면 눈이 퉁퉁 부었지. 죽을 고생을 하며 1년쯤 되었을까. 어느 날 아버지가 날 데리러 오셨지 뭐여. 꿈인가 생시인가 분간도 안가대, 해방이 되었다는 거여, 이제 살았구나 싶었어. 아버지 따라 열차를 타고 오는 길에 혹독했던 일이 생각나 죽어도 아버지 팔을 안 놓치려고 꽉 붙잡고 있었어. 그때의 심정을 어찌 말로 다 허겄어. 그렇게 나는 옥각리 고향으로 돌아와 어려운 집안일을 도우며 살았지. 

나는 사연이 많은 사람여. 내가 18살 때 이곳 월전리로 시집을 왔어. 집안 고모의 중매로 신랑을 만났는디 나보다 7살 위였어. 신랑이 군대 가야한다고 급하게 날을 잡았지. 피난가듯 밤에 몰래 걸어서 산을 넘어 이곳 월전리에 와서 결혼을 하였는디 결혼하던 그해 6·25가 터진거여. 결혼일이 음력 7월 7일 칠석날이었는디 엄청나게 더웠어. 전쟁터진지 한 달 후쯤 이었는디 결혼식날도 하늘에는 미군비행기가 왱왱 굉음을 내며 날아다녔어. 맞절하느라 족두리쓰고 두 팔에 얼굴을 묻고 있었는디 초례상 위로 비행기가 지나가는지 귀청 떨어지는 소리가 났지 뭐여. 엎드려서 이쪽 저쪽 쳐다보니 사람들이 온데간데가 없는거여 나만 덩그러니 있고 다들 도망들을 갔지 뭐야. 전쟁 난리 통엔 살아남는 게 양반이라더니 그 꼴 이었어.

세상에나! 어린 신부를 놔두고 모두 도망이라니. 마음이 아리면서도 실소가 터졌다. 어르신도 기가 막히지 않냐며 폭소를 터트렸다. 간담이 서늘한 그 시절 얘기를 담담하면서도 때로는 몰아치듯 말씀하시는데 88세라는 연세가 무색할 정도로 또렷하고 굳건하셨다. 회한이 밀려오는지 지그시 눈을 감으시고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부채를 찾으셨다. 어쩌면 악몽 같았던 시간도 세월에 떠밀려 희미해져 이제는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을 만큼 숨통이 트였다.

■ 앞마당 텃밭은 내 일상의 친구여

결혼 후 신랑은 군대를 갔는디 얼마 안돼서 집으로 돌아왔어. 몸이 너무 허약해서 왔다는 거여. 나는 아들 셋 딸 하나 4남매를 두었어. 가난은 늘 꼬리를 물었지.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힘들었던 때가 아이들 낳아 기를 때였어. 애기 업고 모내기 하고 소 풀 먹일 때 힘에 부치고 너무 힘들어서 많이 울기도 했지. 아이들이 모두 학교 다닐 때 영감이랑 함께 장사를 다녔어. 영감은 벼농사를 근근이 하면서도 채마장사, 감 장사, 포도장사 등 안 해본 것이 없어. 영감은 부지런하고 자상한 사람이었지. 한 번은 리어카에 감을 싣고 함께 옥천장 가는길인디 장마철 홍수에 리어카가 휩쓸려갔어. 물살이 얼마나 무서운지 떠밀려 가는데 대책이 없더라고. 간신히 빠져 나왔는디 몰골이 말이 아니었지.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한 생각이 들어. 그렇게 열심히 살던 영감이 야속하게 59세에 환갑도 못 차려먹고 황망히 가버려서 내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는디. 사는 거 어려워서 애들도 제대로 못 챙긴 건 말할것도 없어. 특히 큰아들은 자랑 같지만 공부를 잘해서 교대를 나와서 교장으로 퇴직했어. 대학 보낼 형편이 안 되는데 혼자 알아서 시험보고 합격했지. 속으로 대학 붙으면 안되는데 그랬다니까. 어쩌것어 가르칠 형편이 안되니까. 그러니 속은 속대로 새카맣게 탔지.

우리 둘째도 어려운 집안일과 부모의 일을 몸 아끼지 않고 도와준 착한 아들이여. 그 녀석도 속정이 깊어. 늘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만 들어. 딸도 멀리 떨어져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반듯하게 잘 자라서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저 고맙고 고마운 마음 뿐이여. 

기억력 좋다는 말을 많이 들으셨다는 어르신은 자녀들 초중고 학교명과 일들을 또렷하게 되짚으셨다. 어르신의 총기가 세월도 밀어내는 것 같았다. 먼 옛일들을 소환하다보니 구릿빛 어르신 얼굴에 스치는 쓸쓸함과 무수한 사연에 햇살도 더디게 지고 있었다. 

나는 말을 하자면 할 말이 산더미처럼 많어. 늙어가지만 내가 건강해야 자식들헌테 신세지지 않을 것 아녀? 나이도 들었고 여러 힘든 일을 겪다보니 허리도 안 좋고 다리도 많이 아프지만 그저 움직이고 뭐라도 해야 하는 성질이라 가만있질 못혀.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TV도 보고 동네 한 바퀴 돌고 오곤 혀. 소일거리로 앞마당에 텃밭을 일궈 각종 채소를 심어 가꾸고 보듬는 게 내 일이야. 물주고 정성을 들인 만큼 쑥쑥 자라주는 식물을 보면 나도 힘이 생기고 기분이 좋아. 마당을 나서면 마을 회관 앞에서 이웃동상들과 수시로 두런두런 얘기 나누는 맛도 재미져. 

그런데 매일 은근히 기다려지는 행복도 있는디, 혼자 살고 있는 나를 위해 매일 저녁 9시쯤이면 큰아들한테서 전화가 걸려와. 하루를 별 탈 없이 잘 보냈는지 안부를 물어주곤 혀. 

이젠 전화 안 오면 걱정이여. 젊은 애들 말하는 그 데이트여, 전화 데이트. 

내가 이웃집 마실도 가고 옥천장에 나가 머리파마도하고 구경 갔다 왔다고 하면 아들이 너무 좋아하고 잘한다고 칭찬해 주는디 정말 기분이 좋아. 세종 사는 아들이야 혼자있는 내가 자리보존하고 누워있을까 한 걱정이겠지.

그나저나 요즘 전염병이 큰 문제잖어. 만고풍상 겪으며 살면서 전염병도 많이 돌았지만 코로나처럼 무서운 게 없었던 거 같어, 세상이 난리가 아니잖어? 사람 만나기가 겁나고 쉽지 않으니까 말여. 이제 여한은 없는디 우리 자식들 사는 세상이 편안해야 할텐데 걱정이여.

어렵던 시절을 헤치며 꿋꿋하게 살아오신 어르신의 삶의 여정이 방패막 하나 없는 들판의 민들레를 닮으셨다. 나오는 길에 활짝 웃으시며 배웅해주시던 어르신 곁으로 마당 한가득 푸른 기운이 가득 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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