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싯적 탈춤, 풍물의 고수 정성렬씨, 명상으로 청산에 스며들다
인천이 고향인 정성렬씨, 지리산, 강진 거쳐 옥천으로 올해 이사와
‘주민들과 함께하는 생활명상, 일상의 명상 꿈꿀터’

1980년대 초반 서울 애오개 소극장에서는 저항 예술의 뿌리가 자랐고 꽃이 피었다. 김봉준, 장진영, 김우선 등이 속한 두렁은 동학혁명으로부터 일제와 민족분단, 그리고 군사독재 시기를 거치면서 역사 저편으로 스러져 간 민중들의 넋을 달래며 민중 공동체를 다시금 구현하는 작업에 매달렸다. ‘민중시대 예술은 대중이 스스로 자기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예술을 다룰 때 비로소 가능하다’ 이런 구호를 내걸고 예술에 임했다. 암울한 시대, 그 끝이 어디인 줄 몰랐던 시대 젊은 피는 끌어올랐고 모든 꾼들이 다 모여들기 시작했다. 

“서울 북아현동에 애오개라는 소극장이 82년에 만들어졌어요. 거기에 노래하는 김민기, 이야기꾼 홍석화, 소리꾼 임진택, 그림 그리던 이철수, 김봉준, 놀이하던 연성수, 굿쟁이 정희석, 장진영 등 정말 온갖 바닥에서 민중예술하던 이들은 분야별로 다 모였던 것 같아요. 그 조그만 애오개 소극장에요. 저는 어린 나이에 풍물 대표성을 띠고 거기에 참여하게 됩니다. 활동하는 중에 잡혔죠. 도망다니다가 끝내 잡혀 방위 판정을 받았는데 현역으로 끌려갔죠. 그 때 감옥에 갔어야 했는데…”

명상을 하러 올해 초 청산면 삼방리에 스며든 정성렬씨는 한창 젊었을 때부터 세상의 온갖 풍파를 다 겪으면서 격동의 인생을 살아왔다. 명상마을을 조성하러 올해 초 아예 청산으로 이사를 왔다. 그는 서강대 재학 당시 학생운동을 하며 민중 예술에 천착했다. 

“제가 제일 존경하는 신부님이 가는 곳마다 노동 야학을 하셨어요. 저는 각 대학을 쫓아다니면서 탈춤이랑 풍물을 가르쳤구요. 나중에 농민회 활동도 잠깐 했었는데 그게 저에게 큰 반향을 주었지요.”

‘두렁’은 미술로, 민중극단 ‘한두레’는 저항성 강한 마당극을 올리면서 독재권력에 한껏 투쟁을 하던 때였다.

“그렇게 한참을 어울려 놀았던 것 같아요. 저는 도시생활만 했는데요. 몸이 워낙 안 좋아졌어요. 90킬로그램이 넘었지요. 살이 찌니까 온갖 질병들이 다 달라 붙더라구요. 그래서 훌쩍 지리산으로 떠났지요. 지리산에는 워낙 공기가 좋고 물도 좋으니까 직접 재배한 신선한 것들 먹으면서 마인드 컨트롤을 했지요. 그 때 체중이 57킬로그램으로, 20대 때 몸무게로 돌아갔지요. 몸무게가 빠지면서 온갖 질병들이 다 도망갔어요. 우연히 의사인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가 그러대요. 몸이 완전히 깨끗해졌다고”

약도 하나도 안 먹고 몸이 건강해지다보니 농사일을 제대로 배워보고 싶었다. 그래서 옮겨간 곳이 머나먼 남쪽 땅 강진이었다. 

“연고가 있었던 건 아니었구요. 지나가다보니 마을이 너무 예쁜 거에요. 영암월출산 알죠? 그 산자락인데요. 끝부분에 해발 400미터 되는 곳의 마을이에요. 마을 이장을 만나 그랬죠. ‘나 여기 좀 삽시다’ 했죠. 그래서 3년 2개월 정도 강진에서 터 잡고 살았지요.”

그런데 예쁜 마을도 많은 사업비가 들어오니까 갈등이 지속되고 난장판이 되었다. “거기서는 희망을 못 봤어요. 그 조그만 마을이 당시 8억원의 사업비를 받았어요. 이 때문에 마을 갈등이 불거진 거에요. 조폭까지 동원되서 전 이장을 쫓아내고 자기가 이장을 하면서 마을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거에요. 저는 이방인으로 상당히 힘들었어요. 제가 그 마을 가서 친환경농산물 꾸러미 사업을 시작했거든요. 반응이 처음엔 상당히 좋았어요. 된장, 고추장, 식초 등 포함해 제철 농산물과 가공식품 만들어서 5-6가지 정도 도시 사람한테 공급하는데 200여 꾸러미를 했거든요. 그게 잘 되니까 방해공작을 하는데 더 이상 살 의미를 못 찾겠더라구요. 몸으로 부대끼면서 양쪽 진영을 화해시키려 하는데 그게 안 되고 법적 싸움까지 갔어요. 

거기서 감자, 고구마 등 여러 작물을 심으며 농사만큼은 배워왔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 접한 농촌은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몸소 체감했다.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그는 ‘명상’을 찾았다. 지리산에서부터 했던 명상은 내상을 치유하는데 효과가 있었다. 가만히 말하지 않고 생각하는 것, 엉켰던 실타래를 하나둘 풀다보면 몸과 마음이 편안해졌다. 

“제가 지리산 들어갈 때부터 무소유를 주창했거든요. 돈이 있을리가 없었죠. 있어도 다 쓰고, 또 그렇게 연연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10년 동안 무소유로 살아보니까 옆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더라구요. 그래서 올해 5월에 참회하고 무소유를 끝냈어요. 사람들이 박수치고 잘했다고 하는데(웃음), 자기한테 손벌릴까봐 그렇지 않았겠어요. 하하하”

■ 삼방리에 명상마을, 주민들과 함께 만들고 싶어

청산면 삼방리는 먼저 자리잡은 명상 도반 고은광순의 소개로 들어갔다. 아직 거처를 마련한 것은 아니다. 제대로 명상마을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청성면 산계리에 있는 아자학교의 작은 토방에 은신하며 살고 있다. 2와트짜리 작은 등 아래 몇평 안 되는 토방에 단촐한 짐만 갖고 살면서 절로 명상을 하고 있다. 

“어떤 친구들은 거 쓸데 없이 눈감고 뭐하는 짓거리냐 하는데 명상하는 시간만큼은 저에게 굉장히 행복한 시간이거든요. 그러다 보니 명상하는 분들을 만나게 되고 계룡산 갑사 인근에서 명상하는 도량이 있는데 좋은 스승님을 만나게 됐죠. 그 분이 청산으로 오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주저 없이 옥천으로 오게됐죠.”

그는 삼방리에 명상마을을 더불어 만들고 싶어한다. 

“한 20여 분이 땅을 산 것 같아요. 지금 두분이 들어와 살고 계시고 내년부터 두분, 세분 이렇게 해서 20여 분이 완전히 이쪽으로 이주를 해서 명상센터를 짓고 주변에 최소한의 살 집을 만들고 취사나 농사일도 함께 하고 이런 꿈을 갖게 된 것이 한 10여년 된 것 같아요. 저는 뒤늦게 스승님의 권유도 있고 10개월 동안 고민하다가 같이 하게 된 거지요.”

그는 지리산 3년, 강진 3년, 옥천 3년 정도를 예상하고 왔다고 했다. 그런데 고은광순 선생한테 꽉 잡혀서 더 연장을 해야될까 고민중이라 했다. 

“원래는 여기 3년 있다가 경기도 안성으로 가려고 했거든요. 애오개소극장에서 활동하던 30명을 모아서 3인 1조로 전국 10개마을을 선정해 들어갔는데 안성 미양면 갈전리에서 카톨릭농민운동이 1979년부터 활발하게 일어났었거든요. 거기 가서 마을 청년들과 같이 생활하고 밥먹고, 농사짓고 저녁 때 노래도 배우고 풍물도 하고, 춤도 추고 이러면서 ‘농민들이여, 청년들이여 일어나라!’고 외치고 그랬죠. 10개 마을 중 두 개 마을만 성공하고 나머지는 실패했는데 안성시 미양면 갈전리는 성공한 케이스였죠. 우르과이라운드 쌀수입반대 투쟁을 할 때 농민들이 단체로 구호를 외치고 피켓 들었는데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하고 그 이듬해에 새해를 묻는다 코너에 농민 대표로 그 마을이 나오더라구요. 한겨레 1면에 나왔지요. 지금도 오가면서 경조사를 챙겨요. 그리고 그 친구들과 약속을 했죠. 60넘어서 힘 떨어지면 간다고. 그 약속을 지키고 싶어요.”

그가 언제까지 청산에 남아있을 지는 모른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그에겐 소중한 시간이다. 그래서 청산일기를 페이스북에 연재하거나 지인들에게 문자로 보내준다. ‘아직 걷히지 못한 산등성이 물안개와 삼방저수지 물안개를 스쳐 지난다. 코스모스와 국화꽃이 만발, 마을어귀에서 쪽파를 심고 계시던 엄마같은 어머니를 만난다. ——가을이 오는 소리다. 청산은 가을빛으로 물들고 있다’(9월11일)

그는 하루 일과를 그렇게 정리하면서 매일매일 명상을 한다. 명상을 하기 위함은 혼자 잘살기 위함도 아니고 끼리끼리 모여 잘 살기 위함도 아니다. 

“주민들과 함께 하려고요. 이 좋은 것을 혼자만 할 수 있나요. 벽을 치는 공동체가 아니라 느슨한 공동체, 넘나들 수 있는 공동체를 지향합니다. 명상을 하면 삶의 여유가 생깁니다. 명상하는 청산이 되었으면 하죠.”

사연이 많은 그가 청산에 어떻게 녹아들지 기대되는 이유이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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