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새마을금고 전 이사장, 교사와 방역회사 대표로 새 인생
격일로 음성중 사회교사, 나머지 날은 옥천그린방역회사 공동대표
‘새로운 시각, 새로운 자극, 지나온 삶의 여정 돌아보며 성찰할 기회’

중등교사이자 방역회사 대표인 박영웅씨

이원새마을금고 이사장 3선에 낙선하고 그의 다음 행보가 사실 궁금했다. 재임시절 금융기관 이사장 치고 워낙 대외활동을 왕성하게 했던 지라 그냥 칩거할 것 같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지역에서 또 무언가 하겠거니 생각하고 있을 때 그의 선택은 정말 의외였다. 음성중학교 사회교사, 언뜻 연상되지 않는 그의 새로운 직업에 ‘정말?’이란 물음이 뒤따랐다. 그리고 또 하나의 새로운 직업 방역회사 공동대표, 전혀 연관성이 없을 것 같은 두 직업이 그의 새 직장이었다.

이원새마을금고 전 이사장 박영웅씨(59), 그는 적지 않은 나이에 새로운 길에 도전하고 있었다. 그는 옥천의 공적 삶에만 매몰되었던 순간들을 잠시 물려두고 음성에서 비정규직 계약직 교사로 일하며 아이들에게 사회를 가르치는 것도 큰 ‘보람’이라고 말했다. 아니 그만큼 사회를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적격’이었다. 도의원을 하면서 직접 경험한 ‘정치’와 이원새마을금고 이사장을 하면서 몸소 겪은 ‘실물 경제’, 그리고 옥천행복교육네트워크를 하면서 공교육의 한계와 대안을 모색했던 ‘교육’, 이원면발전위원회 위원장을 하면서 실천했던 ‘시민사회’의 역할까지 그는 사실 너무도 완벽하게 사회 선생의 자질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사회와 나라가 경험만 있다고 무조건 선생님이 될 수는 없는 법, 그에게는 이전에 획득해놓은 비장의 무기 ‘교사자격증’이 있었다. 한남대 지역개발학과를 졸업한 그는 복수전공을 하면서 교사 자격증을 획득했다. 졸업 당시 어느 사립교육재단으로부터 교사 제안을 직접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 당시 제안은 교사 2년치 월급을 재단에 기부하는 조건이어서 거절했다. 그 때만해도 사립학교법이 제정되기 전이라 엉망이었던 때다. 그 때 못 썼던 교사 자격증을 30년이 지난 지금 음성중학교에서 사회교사로 데뷔하며 써먹을 수 있었던 것. 단순 교과과정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풍부한 사회경험에서 나온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 졸린 아이들의 눈빛을 초롱초롱 빛나게 하는 인기 교사다. 틀에 박힌 탁상 교육이 아니라 생활현장에서 우러나오는 사회교육이기 때문이다. 학교 다닐 때 민주화 운동의 영향을 받은 그는 ‘정의’를 실현하는 사회사업가가 꿈이었다. 여러 경로를 거쳐 그가 겪었던 삶의 여정을 수업과 연관지어 풀어놓으니 아이들한테는 그야말로 ‘산 교육’이렷다. “정치 할 때도 줄 세우기 정치를 싫어하고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했지요. 당시 이명박 정부가 농촌진흥청 없애려고 하고, 반농민 정책을 펴려 했을 때 저는 바로 탈당했어요. 새마을금고 이사장 당시에도 마냥 돈을 벌어 금고 재산을 불리기 보다, 어떻게 하면 지역에 필요한 금고, 지역사회공헌과 환원을 할 수 있는 금고를 만들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많이 했어요. 행복교육네트워크 대표를 맡은 것도 지역 교육의 중요성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죠.

공교육이 점점 쇠락하고 있고 농촌학교는 폐교 위기에 몰려 있으니 무언가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어요. 뜻 있는 사람끼리 모여서 지역 교육의 대안을 계속 논의하고 있어요. 이원면 발전위원회도 지역에 뭔가 새바람을 일으켜 보자는 생각으로 그냥 알력을 행사하는 단체가 아니라 실질적인 실천을 하는 모임으로 만들자는 구상으로 만든 거예요. 이원면에 커뮤니티 사업 등 여러 사업을 구상 기획하며 실천하고 있고요.”

농촌에 살며 농민들하고 늘 이야기를 나눴으니 농업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자랑한다. “플랜테이션 농업 가르칠 때 제가 아이들한테 이렇게 물어요. 너희들 우리나라 식량 자급율이 얼마나 되는지 아느냐고. 25%인데 쌀 빼면 5%도 안 된다고, 100개 중에 95개는 다 해외에서 사들여야 하는 거라고. 하지만, 북한은 식량자급율이 90%가 넘는다. 그러면 누가 더 딱한 거냐. 식량자급율로만 봤을 때는 북한이 우리보다 우위라고. 만약 자연재해가 발생하고, 국가간 사이가 나빠졌을 때 무역이 원활하지 않게 되면 다 굶어죽을 수도 있다고. 농민들 알기를 우습게 알면 안 된다고 이야기 하죠. 그런 이야길 하면 확 다가오거든요. 아이들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나죠.”

인권에 대한 이야기도 시간 날 때마다 하고 있다. “왜 1학년은 똑같이 배고픈데 밥을 매일 늦게 먹을까. 부당하다고, 불평등하다고 생각하면 건의하고 요구해야 한다고 말하죠. 물론 코로나19등 재해가 발생됐을 경우에는 인권과 국가 통제와 충돌하는 부분도 있다고 말하며 토론을 이끌기도 해요. 자가격리나 마스크 착용 등 개인의 자유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제한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죠.”

신나는 학교 생활을 하는 그는 계약직 교사라 수업 있는 날만 출근을 한다. 남는 시간에는 코로나19시대를 맞이하여 발빠르게 ‘옥천그린 방역회사’를 지인들과 차렸다. 금구천 변에 번듯한 사무실도 마련했다. 

“학교 출근은 월, 수, 금 3일 가요. 나머지는 옥천그린 방역회사에서 지역 사회를 위해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는 수익구조를 같이 논의하고 있죠. 코로나19로 방역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대가 되었잖아요. 우리의 주업무는 방역과 청소, 그리고 안전용품, 의료용품 도소매 유통을 하고 있어요.”

어떠냐고 물었다. “맨 처음 낙선했을 때는 가슴 아프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이제는 스스로의 삶을 다시 돌아볼 기회가 됐다는 측면에서 오히려 약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그 동안 공적인 삶에만 매몰되었었는데 이제 천천히 숨고르기 하면서 나머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어요”

학교에 가보니까 알게 된 것들도 많다. “선생님들 잡무가 너무 많더라구요. 아이들한테만 온전히 시간을 쏟아도 할게 많은데 처리할 행정업무가 많아요. 업무를 경감해 줄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그는 다시 힘을 얻은 듯 보였다. 옥천은 아니지만, 음성에서 청소년들을 직접 만나고 교사가 되면서 얻은 영감도 많아 보였다. 다 행복교육네트워크 활동을 하는데 자산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회사를 운영하면서 지역을 바라보는 눈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것 같았다. 

“새로운 일은 좋습니다. 나이가 점점 들어가는 저에게 도전은 새로운 자극을 주지요. 옥천 지역 사회가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것인가 이 화두는 변치 않았습니다.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많답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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