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명옥(1941년~)

나는 백운리 제동댁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우리 동네를 답답해하던 나는 더 넓은 도시로 시집가는 꿈을 가진 처자였다. 
날마다 우리집으로 찾아오고 내가 아니면 장가 안가겠다고 으름장도 놓으며 내 주위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결혼만 하면 세상에 모든 걸 다 해줄 듯 말하며 눈에서 나를 놓지 못하는 우리 동네 멋쟁이 오빠와 알콩달콩 연애 끝에 결혼을 하였다. 별도 달도 다 따 주는 줄 믿었기에 그 별을 다 담을 만큼 폭 넓은 다홍치마에 연분홍 저고리 차려입고 연지곤지 꽃단장을 한 19살 애기는 27살 임창규 총각과 결혼을 하였다. 내게는 너무 멋진 신랑이었다. 다만 직업 없이 세월을 보내고 술을 잘 마시는 게 걱정 되었지만 우리는 서로 좋아하고 잘 살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 힘들었지만, 힘든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더라

나중에 보니 남편은 이장님이 천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일하기 싫어하고 집안일에 관심 없이 밖으로만 도는 남편 대신에 시부모님이 농사를 지으셨다. 늙으신 시부모님이 힘들게 농사짓는 걸 더 이상 볼 수 없어서 첫 아이를 낳은 후부터 농사일에 내 힘을 보태기 시작했다. 농사일도 하고 남의 집 품일도 해가며 생활을 하였다. 내가 움직여야 집안이 잘 돌아갔다. 나는 공공근로 일거리가 생기면 제일 먼저 달려나가 신청해서 열심히 일했다. 뙤약볕 아래에서 아스콘까는 작업도 하고 땔감준비를 위해 나무도 하며 일이 생기면 사양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했다. 

봄이 지나면서 부터는 칡거지를 시작한다. 먼 동네까지 가서 칡넝쿨을 끊어다가 커다란 가마솥에 넣고 삶아주고 썩히는 과정을 거친다. 하루 두 번씩 물을 갈아주면 흐물흐물해 지면서 겉껍질이 떨어지면 그것을 동네 냇가에 가서 흔들고 주물러 빨면 하얀 속껍질이 나온다.

속껍질에 붙어있는 미세한 이물질을 마저 뜯어내며 잘 씻어진 갈포를 사리사리 곱게 접어 말린다. 이 작업이 갈포의 등급을 결정하기에 세심하게 신경 쓰면서 1등급 받으라고 기도 한 자락 빠뜨리지 않았다. 냇가 다리 아래 솥단지를 걸어놓고 밥도 해먹어가면서 햇볕과 달빛을 받으며 여름부터 추석까지 칡거지에 온정신을 쏟는다. 내 열 손가락 손톱이 물들고 갈라지고 쪼개져서 닳아 없어져도 갈포 한 사리라도 더 만들려고 정신없이 일했었다. 우리 자식들 가르치고 배불리 먹일 생각에 속적삼이 땀에 절고 뻣뻣해져 스치는 살갗이 아린 줄도 몰랐다.

별의별일, 남자일 여자일을 가리지 않고 다하느라 너무 힘들고 속상해도 가까이 있는 친정도 가지 못했다. 친정엄마를 보면 참았던 눈물이 나와서 울어버릴 것 같았다. 내가 울면 우리 엄마는 얼마나 속상할까 한동네 살아도 친정을 자주 못간 게 아쉽더라.

■ 우리 남편은 ‘천상 이장님’이다. 

사람들이 “임창규 이장님이 일을 참 잘하셨었지” 하고 칭송해 주고 기억해 줄 때마다 고맙고 뿌듯하다. 남의일 잘 챙기고 베풀기 좋아하는 남편이 이장선거에서 당선이 되었고, 12년간 백운리 이장일을 보았다. 남편은 면사무소를 한 번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빵이나 과자 등 간식을 사다주고 수시로 면사무소 직원들에게 밥이며 별미를 대접했다. 집안 살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안중에도 없이 수중에 돈이 당장 없으면 꾸어서라도 남들 대접하시느라 바빴다.
“나는 남들이 맛있게 먹는걸 보면 세상 제일 행복하고 최고의 재미를 느껴, 내가 먹는 것 보다 더 좋소” 라고 하며 세상 다 가진듯한 웃음을 지었다.

1년이면 두부를 콩 한가마니 이상 만들어 수시로 동네잔치를 하였다. 우리집 두부맛은 인근동네까지 소문이 날 정도였고, 면직원들도, 군직원들도 오고 심지어 국회의원도 와서 맛을 보고 감탄하였다. 나는 두부잔치를 하려면 밤새워 두부를 만들고 밑반찬도 만들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지만 베풀고 싶어 하는 남편의 부탁을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열심히 만들어 주었다. 몸은 힘들지만 자꾸 하다 보니 내 음식을 남들이 맛있게 먹어주는 게 좋고, 남편도 좋아하니 더 좋았다. 우리 부부는 콩 한쪽이라도 나눠 먹는 것이 자연스러운 습관이 되었다. 

“청국장은 사랑이지, 구수하고 따뜻한 맛이잖여, 우리 것은 좋은것이여 당신 청국장은 세상 최고 맛이라네” 하면서 청국장을 얼마나 퍼 날랐는지 ‘청국장이장님’ 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우리 아이들도 남한테 잘 베풀고 주변의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도와주려 애쓰는걸 보면 ‘콩 심은 데 콩 난다’는 옛말이 하나도 그른 것 같지 않다. “나눠 주는 게 세상 제일 행복한 일이여!” 하고 노래 부르던 지 아버지를 꼭 빼닮았다.

■ 고단했던 서러움은 그리움으로 

아들 둘과 딸 하나는 공부도 많이 시켜주지 못했고 보태준 것도 없이 결혼시켜 내보냈어도 제 몫을 하면서 잘 살아주고 있어서 항상 고맙고 든든하다. 없이 살다 보니 내가 마음껏 줄 수 있었던 것은 물질적인 것 보다 따뜻한 마음과 사랑뿐이었다.  

젊은 날 하도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보니 허리에 무리가 갔다. 몇 해 전부터 통증이 심해져서 병원을 가보니 협착증이라 하여 수술을 했지만 여전히 불편하고 아프다. 심장에는 스텐스 시술도 했다. 내 몸이 무쇠덩어리인줄 알았더니 드디어 고장이 나고 말아부렸네. 이제 몸쓰는건 그만 하고 쉬엄쉬엄 하하호호 살라는가 보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친정집이 아직도 마을에 남아있다. 지금은 빈집이지만 옛날이 그리울 때나, 힘들었던 시절을 위로하고 싶을 때 찾아가서 지난 시간을 추억도 하고 낮잠도 한숨 자고 오기도 한다. 19살 처자가 시집간다고 꽃자수 놓으며 꿈을 키우던 작은방,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와 따뜻한 아궁이가 있는 정지와 봉숭아꽃 따던 마당 한쪽 장독대를 둘러보면서 엄마 품을 떠올려본다.

8년 전 암을 이기지 못하고 1년여의 투병생활 끝에 아쉬운 작별을 해야만 했던 내 남편 임창규 이장님이 그립고 보고 싶다. 고생스러운 시절도 지나고 보니 그립고, 좋았던 일이 더 많이 생각나는 것 같네. 이제 남은 내 소망은 젊은 시절처럼 씩씩하게 잘 살다가 어느 날 밤 내 님이 마중 나오시면 살포시 내민 그 손 단단히 붙잡고 저 별나라로 돌아가겠소.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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