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 이수암

나는 강마을에서 자랐다. 하얀 백사장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강바닥이 어찌나 맑은지 동전을 떨어뜨려도 찾을 수 있는 그런 강바닥이었다. 우리 또래의 여러 아이들이 떡 감고 놀다가 돌 하나를 멀리 던져 놓고 누가 먼저 건져 내는지 내기를 한다. 우리는 이를 보물찾기라고 했다. 보물찾기는 주로 한낮에 이루어진다. 발가벗은 꼬마들이 자맥질 하여 찾는 모습이 이제는 먼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백사장은 그리움이요 아쉬움이다. 바람이 몰고 간 모래밭은 잘 다듬어진 칠판 같다. 우리는 여기에 그림도 그리고 글씨도 섰다. 희망도 그리고 추억도 새겼다. 여기서 씨름도 하고 달리기도 하였다. 모래밭은 어떠한 고난도 참고 이겨내는 인내와 지칠 줄 모르는 끈기를 가르쳤다. 빨리 달리다가는 얼마 못가서 주저안제 되는 슬기를 가르쳤다.

여름밤이면 우리 마을은 텅텅 빈다. 모두를 강으로 나가 목욕하고 백사장에서 잠을 잔다. 백사장엔 모기가 없어서 모깃불을 피우지 않아도 편하게 잠들 수 있다. 따끈따끈하게 데워진 모래를 살살 밀어서 자기가 누울 자리를 만들고, 반들반들한 돌을 주어다가 베개를 만들면 멋진 침상이 된다. 남자들은 강의 상류 쪽에서 여자들은 하류 쪽에서 목욕하고 집단적으로 잠자리를 만든다. 아이들은 그 중간지점에 침상을 마련한다. 이 모래방은 잠들기 전에는 구성진 노랫가락이 울려 퍼지는 무대가 되기도 하고, 옛 이야기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방도 되고,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하는 회의실도 된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참외 서리의 모의 장소라는 것이다. 누군 밭으로 갈까? 누가 누가 서리꾼이 될까? 대장은 누가될까? 등을 의논한다.

참외 서리는 달이 뜨지 않는 밤을 이용하는 것이 보통이고 몇 가지 규칙이 있다. 주로 흰옷을 입고 살았으니 옷은 입지 않고 발가벗고 간다. 모기가 물때에는 소리 나게 때려잡지 않고 조용히 비벼 죽인다. 말은 하지 않고 대장의 수신호에 따른다. 참외는 엎드려서 냄새를 맡아보고 익은 것만 딴다. 덜 익은 참외나 넝쿨이 상하지 않게 조심한다. 원두막에 주인이 없는 곳만 들어간다. 한번 서리 당한 참외밭은 절대로 가지 않는다. 참외는 한 사람이 두세개 정도만 딴다. 서리는 떼를 지어 남의 물건을 훔쳐 먹는 장난이다.

오늘의 개념으로 떼도둑 이지만 그 당시의 개념으로 어디까지나 훔쳐 먹기 장난이다. 주인에게 들키지 않고 훔쳐 오는 재미, 훔쳐 온 참외를 여럿이 나누어 먹는 재미 그것이 서리의 재미다.

그날도 우리는 여덟 명이 앉아서 놀다가 서리 모의를 하고 세 명이 선정되어 참외밭으로 갔다. 참외밭 주변에는 옥수수가 심어져 있어서 안쪽이 잘 보이지 않는다. 원두막 쪽을 살피며 주인의 동정을 살피고 있는데 옥수수가 적혀지면서 키가 큰 사람이 나타났다. 주인에게 들킨 것이다. 도망가려고 일어섰는데 오금이 저려 움직여지질 않는다. 억 하는 외마다 소리와 함계 묵직한 참외자루가 어깨를 내려쳤다. 아픔도 잊고 참외자루를 빼앗아 움겨쥐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어둠속으로 도망쳤다. 알고 보니 주인이 아니고 우리 보다 먼저 온 서리꾼이었는데 우리는 참외밭 들어가지도 않고 크기가 어린애 머리통만한 개구리참외를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그 보다 더 웃기는 일은 서리는 미리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우발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참외 담을 자루가 미리 준비되지 않는다. 대개는 홑바지 가랑이를 묶어서 돌돌 말아 쥐고 간다. 우리가 엉겁결에 빼앗아 가지고 온 자루가 누구의 홑바지라는 것이다. 우리가 어릴 때만 해도 팬티라는 것이 흔치 않았다. 대개 홑바지만 입고 일을 했다. 그런 홑바지를 잃어버렸으니 누가 바지를 가져다주기 전에는 발가벗은 채 집에 가야 하지 않겠는가?

일 킬로미터나 되는 백사장에 흰 바지 하나 놓여 있는 것은 쉽게 눈에 뜨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우리 동네 아저씨 바지 같으니 잘 보이게 두자고 했다. 지게 작대기를 구해다가 모래밭에 꽃아 놓고 그 위에 홑바지를 걸쳐 놓았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 누가 바지를 찾으러 오는지 보자고 했다. 예측한 대로 동네 아저씨의 바지였다. 이름 아침에 씁쓸하게 웃으며 바지를 찾아가던 모습이 어제 일처럼 떠올라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건설 붐을 타고 골재 재취가 황금알을 낳던 시절에 이 아름다운 백사장의 금모래는 다 없어지고 멍텅구리 왕자갈만 깔려 있다. 여기저기 감초가 우거져 폐허를 보는 것 같다. 지나간 것들이라 아름답게 생각되는 것일까?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일까?

소박한 정들이 있어 그리운 것일까? 따뜻한 모래 이불을 덮고 밤하늘에 아름답게 흐르는 별똥별을 보며 잠이 들던 소년은 이제 어른이 되었다. 주린 정 감추기 못하는 이웃 없는 마을에서 참외서리의 추억은 강마을 소년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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