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읍 교동리에 터 잡은 한남대 행정학과 신동호 교수
인심과 풍경에 반하고, 농업에 기반한 지역발전방안을 이야기하다
전 세계 도시, 농촌 돌면서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에 대한 연구

잊혀졌던 고향의 감성을 다시 되살려준 건 옥천이었다. 오랫동안 떠나서 도시와 외국 생활에 잃어버렸던 시골 감성을 고스란히 되살려줬다. 돈으로 바꿀 수 없는 것들이었다. 배움으로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남들과 경쟁하여 더 높은 곳에 올라가야 한다는 강박을 한 순간에 내려놓게 했다. 한남대 도시부동산학과 신동호 교수는 12년차 옥천 귀촌인이다. 부산대에서 도시계획학 석사를 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취업하고 싶었지만, 취업의 문은 쉬이 열리지 않았다. 자꾸 떨어졌고 자존감도 낮아졌다. 서울대 간판을 갖지 않고서는 교수와 연구원을 쉬이 할 수 없던 시절, 그는 외국으로 넘어갔다.

캐나다브리티쉬 콜롬비아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면서 그는 어느새 전문가 대열에 들어섰다.  아내와 함께 생면부지의 캐나다에서 뿌리내리고 일을 하며 악착같이 공부하던 시절은 향수병에 걸리게 하기 충분했다. 한국으로 가고 싶었다. 학기를 5개월 남겨둔 시점에서 부산에 경남발전연구원의 자리가 난다고 했을 떄 주저없이 원서를 넣었고 다행히 면접을 보고 박사학위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줬다. 그리고 인연인지, 우연인지 모교인 한남대학교에서 교수 자리가 난다고 했을 때 누군가 알려줬고 무언지 모를 끌림에 응시하고 말았다. 그렇게 다시 대전으로 왔다. 

다시 정착한 대전에서 영원히 살 줄 알았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일은 불현듯 발생했고 옥천으로 끌고 왔다. 딸이 대전외고에 재학중이었는데 적응을 힘들어했다. 전학을 가려면 타시도로 전학을 해야 가능했다. 배운 사람으로서 위장전입은 하고 싶지 않더라. 그는 우스개 소리를 섞어가며 농치듯 말한다.   

‘제가 나중에 정치를 해서 공직에도 올라야 하는데 위장전입하면 되겠습니까. 무조건 이사를 해야한다 생각하고 주변 집을 물색했죠. 여기 저기 다 다녀봤는데 옥천만큼 눈에 들어오는 데가 없더라구요”

■ 옥천에 반해버려 덜컥 이사를 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가까운 곳에 옥천이 있었다. 몇번 차를 타고 다녀봤는데 그 풍경과 인심에 ‘홀딱’ 반해버렸다. 구읍에 집이 하나 있다고 했을 때 주저없이 계약해버렸다. 600년 된 옥천향교가 다 내 앞마당 같았다. 풍수지리가 좋은 곳인 향교 위에 집이 있으니 ‘지복’은 타고났겠거니 하고 덜컥 이사 왔다. 마당이 좁긴 했지만, 목조주택과 조경해놓은 돌 사이에 핀 꽃들이 너무 맘에 들었다. 

그로부터 벌써 12년이다. 옥천에 살면서 매일매일 감동이다. 신기한 경험을 한다. 양쪽 주차로 좁아진 도로에 마주치면 먼저 양보하는 게 일상이더라. 어떻게든 먼저 가려고 애쓰는 도시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것은 인심 ‘예보’ 수준에 불과했다. 꽃 모종 사건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70대 중반 이웃 할머니가 꽃밭을 가꾸고 있길래 그거 꽃 모종이 뭐에요. 몇번 물어봤어요. 그런데 갑자기 ‘몇 시에 퇴근해요’라고 묻더라구요. 7시에 퇴근하고 보니까 현관 앞에 그 꽃 모종이 있는 거에요. 정말 쇼킹했죠. 아무 말 없이 행해지는 그 인심에, 내색한번 안 하고 불쑥 꺼내놓은 인심에 반한 거 아이겠습니까. 불현듯 옛 고향 경주 생각이 왈칵 나더라구요. 옥천은 잃어버렸던 고향의 감성을 다시 찾아주었죠.”

그는 이 엄청난 사건을 ‘컬처 쇼크’라고 표현했다. “한국 살다 외국에 가면 문화 충격을 받잖아요. 받아들이는데 한참 시간이 걸리는데 도시에만 살았던 저에게는 옥천이 바로 그랬어요. 한번은 한평 남짓 남은 텃밭에 깨 좀 심어보려고 남는 깨 모종 있으면 얻을 수 있냐고 했더니 ‘조금 있어야 합니다’라고 하길래 한 달 정도 있다 퇴근해보니 비워놓은 텃밭 자리에 깨 모종이 심겨져 있는 거에요. 자금도 그 광경이 사진처럼 박혀 있어요. 그야말로 감동이었죠.”

그는 실제로 눈물이 났다고 했다. “왜 눈물이 나냐면 시골 이런 정서는요 어떻게 보면 두가지를 생각하게 해요. 전원생활한다고 하면 아는 교수들이 그래요. 거기 왕따 없냐. 길 막지 않느냐. 이렇게 물어요. 극단의 안좋은 경험을 한 거죠. 이게 보편적인줄 알아요.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저는 깨달았어요. 마음을 열고 만나면 금방 이웃이 되고 모든 걸 다 내어주려 하는 구나. 제가 경주에 어린 시절을 보낼 때 그러했거든요. 어릴 때 집이 좀 컸는데 부엌에서 대문까지 30미터 정도 됐는데 손님이 나가면 대문까지 꼭 배웅을 해줬어요. 그냥 가게 하지 않았고 먹을거리니 무언가를 꼭 싸보냈던 기억이 아련해요. 그런 인심을 옥천에서 재발견한 거죠. 이런 것을 평범하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제가 얼마나 고향을 떠나 각박하게 살아왔으면 이런 것에 감동을 하는가. 돌아보니 내가 너무 불쌍한 거에요.”

■ 취업이 안 돼 자비 유학, 그리고 한남대 교수가 되기까지

그는 돈 많아서 유학한 부잣집 도련님이 아니었다. “우리 때는 돈 많은 사람이 해외 유학을 갔는데 저는 입사시험을 볼 때마다 계속 떨어지니까 해외서라도 더 공부해서 와야겠다는 생각으로 자비로 유학을 갔어요. 우리 때 원서 내면 거진 다 됐는데 저는 다 떨어지더라구요. 자괴감에 빠져 있다가 조금 더 공부를 해보자고 해서 부산 대학원까지 다녔는데 마찬가지더라구요. 그래서 캐나다까지 간 거에요. 마침 벤쿠버에 있는 브리티쉬 콜롬비아 대학원에 합격해서 그리로 간 거죠.”

유학을 가서도 맨 바닥에서부터 시작했다. 돈도 없고 빽도 없었다. 오롯이 몸뚱아리 하나였다. 결혼하고 간 유학이라 아내가 하루종일 돈벌이하느라 고생이 참 많았다. 본인도 틈나는 대로 아르바이트 하면서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무려 박사학위 취득할 때까지 7년 동안 많은 고생을 했지요. 첫 아이도 거기서 낳고 힘들었지만 행복했죠. 그런데 이렇게까지 고생해서 박사학위를 땄는데 취업이 안 되면 어떡하지 불현듯 걱정이 됐죠. 그런데 다행히도 경남발전연구원에서 면접을 보고 왔는데 바로 채용한다고 연락이 왔고 졸업까지 5개월 동안 기다려줘서 너무 고마웠죠. 한국으로 바로 이사를 했지요.”

경남발전연구원에서는 재밌고 보람있게 일했다고 털어놓았다. “당시 김혁규 도지사였는데 창립한 경남발전연구원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실제로 여러가지 주문도 많이 했구요. 제가 주도적으로 일하니까 관심있게 지켜봐 주시더라구요. 6개월 동안 짧고 굵게 일하고서 한남대 공채 교수로 오게 된 거죠.”

한남대 당시 지역개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일 때는 대덕연구단지에 대한 연구를 집중적으로 했다. 도시에 연구단지를 어떻게 정착시켜 상생 발전을 이룰 것인가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해 지금도 연구단지 분야에서는 ‘탑클래스’ 전문가에 속한다. “제가 외국의 연구개발 특구를 배워와서 소개를 한 지 벌써 20년이 다 되어가네요. 연구단지 분야만 파다보니 관록이 생기고 어느새 전문가 대우를 해주더라구요.”

■ 농촌의 살 길, ‘프랑스 꼬냑, 미국 캘리포니아 보고 영감’

그는 캐나다에서 석사과정 때 농촌을 공부하고, 박사과정에서는 도시를 공부하다보니 도시와 농촌에 대해 상생하는 방법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갖고 있다고 말했다. 

“도시와 농촌이 한몸뚱아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행정구역의 통합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서로 맞물리는 관계의 교류가 일상적으로 이뤄줘야 한다고 생각하죠. 농촌은 농사를 지어 먹을거리를 제공해주고, 인근 도시가 이를 소비하는 쪽으로, 그리고 농촌 경관과 체험을 활용하면 같이 할 수 있는 것이 무궁무진하죠. 콩과 메주, 된장, 전통 술 등 가공하면 나눌 수 있는게 더 많아지고요. 그래서 로컬푸드 직매장과 옥천살림 협동조합에서 하는 일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옥천도 이런 방향으로 가고 있지만, 장기적인 방향에서 적극적인 논의가 필요합니다.”

2010년부터 현재까지 민선 제5기, 6기 옥천군수 공약검증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지역개발 전문가인 그는 유유자적 농촌 풍경을 즐기다가도 ‘여기 사람들은 무얼 먹고 사나?’ 고민하는 것을 놓지 않는다. 지역개발학을 공부하며 단련한 그만의 사고방식이다.

“우리 아버지가 세 번이나 쌀 증산왕을 하셨어요. 원래는 철도 공무원이었는데 교과서처럼 농사를 지셨거든요. 사람들이 다 비웃었지만, 뚝심있게 하셨죠. 18년 하니까 증산왕 반열에 오르셨죠. 그런 아버지가 포도 농사에 실패하는 걸 봤어요. 그 당시 한 상자를 밭에서 6천 원에 팔았다. 시내 길거리에서 팔면 6천 원짜리가 9천 원이 됐다. 3분의 1이 유통마진인 거다. ‘이래서 농촌 사람들이 잘 살 수가 없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미국에서도 한 2년 살았는데요. 미국의 캘리포니아 데이비스에서는 6천 원짜리 포도를 갖고 포도주를 만들거든요. 가공한 다음에 관광객을 불러들이는 거다. 이게 3차 산업이다. 가공해서 고품격화하고 고품질화해서 공업화시켜야 한다. 그리고 다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미국의 포도원 가진 사람들은 다 부자란다. 그 때부터 포도원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포도원 하는 사람은 길게는 10대 째 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전통과 문화와 역사가 다 담겨 있는 거죠. 부가가치가 높아질 수 밖에 없어요. 프랑스 꼬냑 만드는 지역을 가봤는데요. 그 곳은 인구가 2만-3만 명 밖에 안 되는데 대부분 꼬냑 만드는 곳의 종사자나 포도 농사 짓는 사람들이에요. 꼬냑이 왜 그렇게 비싼가 하고 생각했는게 그 과정과 역사와 문화를 생각하면 안 맛있을 수가 없고 안 비쌀 수가 없더라구요. 이거 함부로 마시면 안 되겠네 하는 생각이 들었죠. 어떤 토양에 어떤 품종의 포도가 맞는지 공부를 참 많이 해요. 공부 못하면 농사짓는다는 말 외국에서는 함부로 하지 않아요. 공부를 열심히 해야 농사를 지을 수 있어요.”

프랑스 꼬냑 지역은 인구가 2만명 정도 되는데 세계 유명 브랜드가 5개 회사, 한 회사 직원이 보통 1천500명인데, 5개 회사라고 하면 7천500여 명 정도가 와인 만드는 회사 직원인 것이다. 여기에  제일 큰 회사에 포도를 납품하는 농가가 1천500여 농가. 나머지 회사까지 전부 다 계산하면 그 지역 전체가 포도로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벌써 200여 년의 전통과 문화가 그렇게 만들어진 것.  

■ 신동호 교수가 이야기한 여러가지 제안들

신 교수는 옥천에 6차 산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농업과 가공산업 그리고 관광업을 융합해야 새로운 가치가 창출되고 농촌 경제에 활력이 돈다는 말이다. 그래서 캘리포니아 데이비스의 사례처럼 지역 특성에 맞는 상품을 개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신 교수는 관광 산업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봤다. 옥천에는 육영수 생가, 향수 100리길과 같이 홍보할 거리는 있는데, 이러한 관광 자원을 서로 연계시키지 못한 점이 아쉽다고 평가했다. 옥천의 장기적인 발전에 대해 논의하는 협의체를 구성하자는 제안도 덧붙였다.

“내가 보기에는 (관광자원이) 그냥 산발적으로 있기만 하고 체계적으로 연결되지 못한 것 같다. 여기 방문한 사람들이 블로그에 글을 올려서 저절로 연결이 되는 경우도 있긴 하다. 하지만 조금 더 체계적으로 엮어 볼 수는 없을까? 이런 것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대책을 논의할 수 있으면 좋겠다”

옥천도 고령화율이 30%에 가까운데 이를 방어적으로만 접근할 것이 아니라 고령화를 어떻게 해결하고 대책을 세울 건지 고령화 연구소를 만들어 적극적으로 치고 갔으면 좋겠다는 제안도 내놓았다. “노인들만 사는 지역이 될 수는 없고 연구를 하다보면 청년도 필요하고 청소년도 있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될 수 밖에 없어요. 고령화를 너무 부정적으로만 볼게 아니라 역으로 이를 활용한 연구로 청년과 청소년까지 유입할 수 있는 효과를 만들수도 있거든요. 이를 잘 활용했으면 좋겠어요. 

축사 건축 허가와 관련한 문제에 대해서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축사 근처 주민들이 악취와 소음을 호소하자, 최근 옥천군은 축사 건축 규제를 강화하는 방침을 내놓았다. 하지만 규제 강화안이 실시되기 전, 오히려 건축 허가 신청이 무더기로 들어와 논란이 됐다. 신 교수는 악취와 소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친환경·동물복지 축사 건축을 장려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옥천을 친환경 한우특화단지를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다른 한우단지와차별화를 두려면 친환경, 동물복지 이런 개념을 적용하면 좋겠습니다. 지역경제를 위해서라면 (건축)허가는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할 거냐가 남지요. 하다못해 냄새는 덜 나게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거에요. 관련 통계를 보니까, 옥천에는 동물복지축사가 허가를 받은 적이 없어요. 경남에서는 이미 하고 있는데 이런 것을 공략해 지향을 만들었으면 해요.”

박덕흠 의원이 공략으로 내세웠던 대전-옥천을 광역전철 사업에 대해서는 옥천이 베드타운으로 전락하지 않고, 이익을 누릴 방안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우리가 안 할 수는 없는 거잖나. 지금 세상이 개방되고 연결돼 나가는데 우리가 막는다면 막을 수 있을까? 그거보다도 거기에 연결돼서 얻을 수 있는 게 더 클 수도 있어요. 기회가 오면 거기에 따르는 도전, 감수해야 할 위험도 있는 건데. 이왕 할 수밖에 없다면 어떻게 이롭게 할 수 있는가 거기에 논의의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는 12년 동안 옥천에 살면서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은 듯 했다. 자신이 오랫동안 배우고 연구한 학문이 옥천에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옥천은 이미 내가 사는 곳이고 고향이라 여기기에 많은 지혜를 같이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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