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봉식 (옥천읍 양수로)

옥천읍(沃川邑)은 1757년(영조 15년)에 발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읍내면(邑內面)과 군남면(郡南面)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910년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군내면(群內面)이 될 당시 향청리(鄕廳里)는 상계리(上桂里)와 하계리(下桂里)로 나누어졌다.

옥천읍 상·하계리는 큰 괴목나무(회화나무)가 있던 옥천 관아와 객사가 위치한 마을과 괴목나무가 서 있는 윗마을은 상괴(上槐)라 불렀고, 괴목나무 아랫마을은 하괴(下槐)라 하다가 이름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하여 후에 회화나무를 뜻하던 괴(槐)를 계수나무 계(桂)로 바뀌어 부른 것으로 추정된다.

1914년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옥천읍을 내남면(內南面)이라 하였고 1917년에 옥천면(沃川面)으로 변경하였다. 이때 옥천면 청사는 죽향리 83번지에 있었다. 그 후 1949년 옥천면이 옥천읍으로 승격되었다.

정지용(鄭芝溶, 1902~1950)의 죽향공립보통학교 학적부의 주소 ‘옥천군 (읍)내면 상계전 7통 4호(沃川郡 (邑)內面 上桂田 7統 4戶)’와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적부에 기록된 정지용의 원적(原籍)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 1통 5호(忠淸北道 沃川郡 沃川面 下桂里 1統 5戶)’는 서로 다른 위치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1910년대 초에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 생산한 옥천군 군내면 하계리 40-1번지에 대한 토지조사부에 의하면 정지용의 부친 정태국(鄭泰國, 1873년생)은 하계리 40번지의 대지 120평을 소유하고 1916년(大正 5년) 3월 31일까지 그의 주소는 상계리이었다. 정태국의 주소 상계리는 위의 ‘옥천군 (읍)내면 상계전 7통 4호’와 일치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 1913년에 생산한 옥천면 상·하계리의 측량지도는 부산기록관에 소장되어 있고 측량 당시 상계리와 하계리는 구분되어 확정되었다.

1910년대 초에 군내면 하계리 40번지는 40-1번지로 분할되었다. 1915년(大正 4년) 2월 24일에 하계리 40-1번지는 하계리 41-2번지와 합병되고 정태국의 한약방 대지는 117평이 되었다. 정태국 씨는 1916년(大正 5년) 4월 1일에 ‘상계리에서 하계리’로 주소 개칭(住所 改稱)하고 1926년(大正 15년) 3월 27일까지 117평의 한약방 대지에 대한 소유권을 보존했다.

정태국 씨는 한약방을 운영하면서, 그의 가족인 부인 정미하(鄭美河. 1872년생), 둘째 부인 문화 유씨(柳貞, 1891년생), 장남 정지용(鄭芝溶, 1902년생)과 그의 아내 송재숙(宋在淑, 1902년생), 정지용의 이복동생 계용(桂溶, 1915년생)이 하계리 한약방 한군데에서 함께 동거하기가 불편했기 때문에 상계리에 다른 살림집을 소유하고 있었다. 정지용은 상계리의 그 집, 즉 ‘옥천군 (읍)내면 상계전 7통 4호’에 거주하며 1910년~1913년, 4년 동안 죽향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정지용의 혈육으로는 부친과 그의 둘째 부인 문화 유씨와의 사이에 태어난 이복 여동생 계용(桂溶, 1915년생)과 이복 남동생 화용(華溶, 1923년생)이 있었다. 

화용은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 40번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옥천면 금구리 172번지에 분가하여 문화 유씨 유정(柳貞)과 함께 살았다. 1934년경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이사하여 지내다 6·25 때 사망했다. 

계용은 옥천군 내남면 하계리 1통 4호에서 출생했다. 계용이 태어난 곳은 정태국씨가 운영하던 한약방, 즉 옥천면 하계리 1통 5호의 바로 옆집으로 추정된다. 정지용이 일본 교토(京都) 동지사(同志社) 대학에 입학(1923. 5)하기 두 달 전인 1923년 3월에 서울에서 「향수」를 창작할 당시 계용은 만 아홉 살로 그 시의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로 묘사된 것으로 추정되며, 열아홉 되던 1933년에 충청남도 논산군 논산면에 사는 박씨에게 시집가서 살다가 최근(2015년 기준) 사망했다고 한다.

정지용의 부친 정태국은 젊은 시절 만주를 배회하다가 지용이 세 살쯤 되는 해, 1905년경에 돌아와 옥천 구읍 하계리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면서 가게를 꾸려갔고 상·하계리 이장(內部主事)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조상과 부모님이 계신 옥천군 군동면 화계리(沃川郡 郡東面 花溪里), 일명 꽃계리(꾀꼬리)를 떠나 죽향공립보통학교의 소재의 하계리에 삶의 터를 잡은 것이다.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 생산한 토지조사부와 토지대장에 의하면, 정태웅(鄭泰雄, 84세, 하계리)의 조부 정운석(鄭雲錫)은 대지 144평의 하계리 40-1번지에 살면서 1926년(大正 15년) 3월에 하계리 40번지의 정태국 씨가 운영하던 한약방 터에 대한 소유권을 이전했다. 1932년(昭化 7년) 7월 18일 하계리 40-1번지의 총 270평의 대지는 정운석의 아들 정영실(鄭榮實)에게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정영실의 아들 정태웅 씨는 1960년대에 상·하계리 이장의 직함을 25년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 1978년 10월 16일 하계리 40-1번지의 대지 270평의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현재의 정지용 생가는 정운석(鄭雲錫), 정영실(鄭榮實), 정태웅(鄭泰雄) 씨가 3대에 이어져 살았던 곳으로 1774년에 허물어져 새로 ㄱ자 집을 짓고 살다가 1996년 복원되었다. 김진헌(87세, 하계리) 씨는 ‘정지용의 부친이 한약방을 운영하던 집은 정지용 생가의 싸립문 근처 물레방아가 있는 곳에 거천(巨川)이라 불리던 개천을 뒤에 등지고 앞마당이 방앗간(現 정지용 문학관)을 바라보는 일자(一字) 형태였다’고 구술했다. 정지용에 대한 최초 연구가 김학동 교수가 찍은 1982년 정지용 생가 사진도 개천을 뒤에 두고 일자(一字) 형태이다.

한편 정태웅 씨는 ‘정태국 씨의 36평 한약방이 개천 옆 물레방아가 있는 곳에 북쪽을 바라보고 일자(一字) 형태로 방과 부엌이 각각 한 칸 그리고 헛간이 있었으며 그 집에 결혼 후에 분가하여 살았고, 지용 생가 복원 전에 정지용의 아들 정구관(鄭九寬, 1928년생)을 만나 정태국의 한약방 위치 등에 대해 소상히 설명했다’고 구술했다. 

김묘순, 『원전으로 읽는 정지용 기행 산문』(깊은샘, 2015. 5. 15) 「정지용 연보」 p. 201과 203(부록)에 ‘1910년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 토지조사부에 의하면 정지용 생가 주소는 옥천군 내남면 상계리로 확인됨 …… 1916년 생가 주소가 옥천군 내남면 하계리로 주소 변동’으로 기술하고 있다. 

정태국의 1916년(大正 5년) 3월까지의 주소인 ‘상계리’가 ‘하계리 40번지’와 같은 위치로 1916년(大正 5년) 4월 1일에 ‘상계리에서 하계리’로 주소 개칭(住所 改稱), 즉 명칭 변경으로 해석하기도 하며, ‘상계리’가 표기 오류(誤謬)로 인해 주소가 개칭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죽향공립보통학교 학적부의 주소 ‘옥천군 (읍)내면 상계전 7통 4호’를 간과(看過)하고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 생산한 토지조사부의 정태국의 주소 ‘상계리’를 연계해 해석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정지용이 ‘하계리 40번지’와 ‘상계전 7통 4호’ 중 어느 곳에서 태어났는지는 새롭게 다시 조망(眺望)해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엄밀히 말해 추정되는 정지용 생가는 정태국 씨가 운영하던 한약방이므로 현재의 생가 외에 추가로 복원하든지 아니면 한약방 자리를 알려주는 안내판을 설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필자는 옥천 군민이 합심하여 정태국 씨의 하계리 한약방과 다른 상계리 살림집, 즉 정지용 시인이 죽향공립보통학교를 다니며 공부하던 4년간의 주소인 ‘옥천군 (읍)내면 상계전 7통 4호’와 계용이 태어난 ‘내남면 하계리 1통 4호’의 위치를 추적하여 그 자리를 알아내고, 복원된 정지용 생가터의 정태국 씨의 한약방과 더불어 또 다른 두 채의 집을 연계해 현재보다 확대된 ‘정지용 생가 공원화 사업’이 진행되길 소망한다.

끝으로 필자가 2020년 초부터 의문을 가진 정지용의 죽향공립보통학교 학적부의 주소 ‘(읍)내면 상계전 7통 4호’의 조사와 정지용의 자취를 따라 옥천 수북리(水北里)·석탄리(石灘里)·지양리(紙羊里)의 향수길을 거닐며 함께 탐사·연구한 『현대시의 아버지 정지용 평전』(푸른사상, 2006. 10. 20)의 작가 이석우(70세, 시인·문학평론가)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1982년에 김학동 교수가 찍은 정지용 생가 사진.

 

1) 화용의 딸 구완은 이숭원 서울여대 명예교수를 찾아 뵙고 ‘화용은 요절한 것이 아니고 6·25 한국전쟁까지 생존했었다’고 증언했다.  

2) 「朝鮮之光」(1927. 3) 65호 P. 13~14

3) 영일정씨 군남파 정창영(68세, 마암리) 씨가 소유하고 있는 1924년 迎日鄭氏 목판본 족보에 정태국 씨는 ‘내부주사’의 직위를 가진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정성령(81세, 수북리)은 ‘內部主事’가 일제강점기에 ‘이장’을 말하며, 자신의 증조부에 대해 ‘內部主事’라는 표기가 족보에 기재 되어있다고 구술했다.

4) ‘꽃계리’는 음운변화로 ‘꾀꼬리’로 불리웠다. 

5) 이석우, 『현대시의 아버지 정지용 평전』(푸른사상, 2006. 10. 20) p. 34

6) 정지용 생가 옆 개천의 폭은 1930년대 7~8m 정도였다. 이수암(80세, 前 옥천향토전시관 관장)과 전순표(63세, 現 옥천향토전시관 관장)의 구술에 따르면 지용 생가 옆 개천은 거천(巨川)으로 지도에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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