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숙제 (옥천작가회의 회원 동이면 세산리)

올해 같은 해가 없는 것 같다. 비는 억수 같이 쏟아져 농사란 농사는 모두가 허탕이다. 인간들의 마음은 알 수 없는 곳을 향해, 오늘도 역시,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외쳐대고 있다. 이것이 최첨단이 추구하는 문명이 낳은 비극인 것 같다.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면서, 영남과 호남을 구분하는 주제에, ‘민족과 통일의 길’은 영원히 우리들의 곁을 떠나, 지하에서 통절하게 절규하는 선열들의 민족적 서러움을 씻을 날은, 요원의 불길처럼 멀어만 가는 것 같은 우리네의 살림살이다.

상황이 가볍지 않은 형국에, 묘한 군상들이 세상을 쑥대밭으로 조성해 가고 있는 판세다. ‘광화문 집회 발’ 코로나가 너와 나를 불문하고 집어삼킬 형국이다. 이 와중에 훌륭한 목회자 한 분이 계신다. 그분이 다름 아닌 ‘하느님의 아들’을 자처하는 위대한 목회자, 전광훈 이다. 선량한 신도들을 ‘지옥문’으로 인도하는 ‘위선과 가식의 탈’로 무장한 위대한 전사(戰士)다. 지옥은 멀리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잃고, 짐승과 같은 행동을 하면서도 일말의 부끄럼 없는 행위를 자행할 때,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순간적 경계다.  그가 과연 목사일까. 그가 진정으로 목사라면, 대한민국에 목사 아닌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의 일거수일투족, 어디에 하나님의 그림자가 존재한다는 말인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초등학생만도 못 한데, 사탄과 마귀를 어디 다른 곳에서 찾을쏜가. 국가와 이웃의 안녕을 식은 죽 먹듯이, 비웃는 목사가 진정 목사라면, 이는 우리가 사는 현세가 지옥임이 분명하다.
“코로나는 북한이 살포한 바이러스다.”

“코로나도 광화문 집회에 참석하면, 예수님이 말끔히 치유해 줄 것이 확실하니, 나를 믿고서 나와라.”

이것이 막가는  인간의 두 얼굴을 가진, 위선과 오만의  진상이다. 목사는 하느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믿고, 목숨까지 바칠 것을 각오하는 성스러운 자리이거늘,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하루살이처럼 떠벌린다. 가소로운 일이다. 저잣거리의 패륜아도 양심의 가책이 있거늘, 나불거리는 주둥아리가 국민을 우롱하는 배신감이 있기에, 그나마 지쳐있는 우리네 일상 하루하루가 개탄스러울 뿐이다. 과연 전광훈이를 따라서 목이 터지라고 외쳐대는 광신도들의 가슴속에도 ‘성령’은 존재할까. 국가와 이웃의 안녕을 비웃어대는, 저들의 광란의 깃발 속에 ‘천당’이 존재한다면, 과연 동참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묻고 싶다. 전광훈 같은 목사가 존재하는 한, 한국 개신교의 앞날은 묻지 않아도 뻔할 것 같다.
예수님은 말씀하시되,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도 세상의 ‘모멸과 비난’을 온몸으로 뒤집어쓰고서, 미친 광대 노릇에 국민을 현혹하는 저 모습이, 차마 애처롭다 못해 비련의 정분이 간다.

과연, 기도와 복음은 교회에 가야만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그곳에서만 하느님의 음성이 ‘가난한 자의 복음’으로 울려 퍼진단 말인가. 논리는 너무나 비약적이고 유치하다. 차라리 공산당이 신줏단지처럼 떠받드는 ‘유물론’이 왠지 동정이 간다. 이것이 종교가 인간을 파멸하는 첫 번째 관문이다. 이 병을 벗어나지 못하면 인간의 골을 깊어진다. 날뛰는 영명한 목사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다시 처연히 말씀 하신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제 목숨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고

여기서 ‘죽어야만 산다고’ 하신 말씀을 현대어로 해석을 해보자. 신도를 이용해 초호화의 삶을 누리면서, 높을 곳을 지향하며, 으뜸이 되고자 발버둥 치는 모습이, 국가와 이웃을 ‘배타적 광신’과 세속적 욕망이 넘실거리는 그곳이 과연, ‘낮은 곳’으로 임하는 헌신적 자세이던가. 그분 예수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크고 많은 일을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마도 아닐 것이다. 예수의 길을 이웃들에게 제대로 전파하기 위해선, 목사가 먼저 시대정신에 근거해서, 십자가를 지는 영광을, 의연하게 죽어 가라고, 부탁하시는 말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이 이웃과 국가를 위한 최소한의 성직자의 도리가 아닐까. 그런데 정치를 하고, 호의호식을 저잣거리의 소인배보다 갈구하는 모양새가, 예수님의 십자가인 줄 착각하는 무리가 늘어가고 있는 세태를 추구하다 보니, 목숨 걸고 한 입으로 예수를 팔아먹으면서도 부끄럼을 모르는, 만고의 탕아가 돼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 길을 위대한 전광훈 목사님과 개신도가 선도를 하시는 것 같다.

운문 선사는 부처는 “마른 똥 막대기”라고 말씀하셨다. 임제 선사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거든 조사를 죽이라!” 했다. 그래서 자하 선사는 법당의 불상을 도끼로 쪼개서 부엌의 불쏘시개로 활용했다. 이 같은 사고 논리는 불교만이 가능한, 위대한 인류 불멸의 자산이다. 그것은 해탈이나 열반은 부처나 조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불성-영성)’라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인, 자신 고유의 인식 세계만이 이룩하는, 깨달음의 위대한 경지이기에 간곡히 부탁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오로지 독창적인 자기개안(自己開眼)에서만이, 이룩할 수 있는 깨달음의 세계이기에. 그래서 부처님은 『금강경』에서 간곡히 중생들에게 부탁하신다.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라고.

직설을 하면 이렇다. “만일 모양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는 이는,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니, 어찌 부처를  만날 수 있으랴.”

부처가 아니, 예수가 예수인 것은 깨달음에 있는 것 아닐까. 결코 모양으로 찾거나, 소리로 착각을 한다면, 백골이 진토가 될지언정, 진정한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다는 이야기다. 고로, 기도는 나를 찾아가는 철저한 자기 수행이며, 고독한 자신과의 싸움이다. 스스로 깨달음을 추구하는 과정이거늘, 그곳이 법당이면 어떻고 교회면 어쩌랴. 하물며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오직, 교회에서 찬송할 때만이  예수님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논리는 궁색한 변명의 여지가 없다.

예수와 석가는 시공을 초월한 영적으로 존재하시는 법신(法身)이다. 그분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우선 국가와 이웃의 안녕을 망각해서는 존재할 수 없다. ‘자신을 내려놓는 법’을 모르는 목회자들은 성직자의 자격이 없다.

부처가 ‘마른 똥 막대기’이듯, 예수는 교회에만 존재한다고 설교하는 한, 이는 중대한 ‘시대정신’을 망각하는 행위며, 이로 인한 추락하는 교회의 위상은, 국민들의 지탄을 면치 못함을 명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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