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무순 (1938~)

어르신 댁 대문은 열려있었다. 
마당까지 들리는 티브이 소리를 따라 갔다. 내실에 계신 어르신 부부는
‘나는 자연인이다’ 프로에서 눈을 떼지 않으셨다. 욕심 없고 걱정 없이 사는 그들이 부럽다시며 즐겨 보신단다. 
“이제 평안하지 않으세요?” 물음에 어르신의 답은 
“욕심은 없어졌지만 자식 걱정은 여전햐”

■ 쌉싸름한 한약 냄새는 내 유년시절의 자부심

백운리에서 50년을 살았다. 보은군 탄부면 화장리가 고향인 나는 83살이다. 스물한 살에 청성면 양저리로 시집을 왔다. 
친정아버님은 농사도 지으면서 약방을 하신 150호 정도 작은 마을의 유지셨다. 그 옛날의 약방은 한의원만큼의 위상이라 아버님은 마을의 어른이셨고 나도 아버지 곁에서 얌전하게 약방 일을 거들었다. 어머니는 농사일과 살림을 맡으셔서 약방 조수는 내 차지였다. 내가 하는 일이라는 게 약재를 썰기도 하고 약초 빻는 일도 도왔다. 작은 손이지만 때때로 보탬이 됐다. 칸칸이 서랍장 안에 종이로 싼 약재들을 가지런히 정리해두는 것도 그 시절의 나한테는 신부수업이었다. 쌉싸름한 한약 냄새가 나는 우리 집은 내 유년시절의 자부심이었다. 한의원은 6.25가 나면서 그만두게 되었다. 전쟁이란 일상이 깨지는 고통을 감수해야만 한다. 

아버님 친구 분들은 한 달에 한 번씩 유사를 정해서 모임을 하셨다. 음식 장만도 푸짐했고 글을 지어나누기도 하셨다. 그 선비 모임 중 한분이 나를 송씨 집안에 중신을 했다. 친정에서 5남매로 자랐지만 무심한 세월 속에서 지금은 여동생과 나 둘이 남았다. 

1938년생 호랑이 띠인 나는 해방 되던 해 일곱 살이었다.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해방이 되었다. 보은 탄부 국민학교 다닐 때 선생님한테 간단한 일본말을 배우기 시작하던 때였다. 

천만다행인지 왜정 때 마을에서 일본사람에게 피해를 본 사람은 드물었지만 나라를 빼앗겼었다는 사실은 통곡할 일이었다. 너무 어려서 뭘 몰랐던 것이지...6,25 났을 때 우리 집은 피난 가지 않았다.

동네 유지였던 아버님은 호인에 사리가 밝은 분이라 동네사람들은 6.25가 나자 보따리를 싸들고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우리가 피난을 가면 따라가겠다고 다들 모였는데 아버지가 피난을 가지 않기로 결정하시면서 마을 사람들도 대부분 마을에 잔류하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리더의 역할과 결단은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좌지우지한다. 

남편은 시골에서 농사를 지었다. 벼농사 고추 콩 깨 보리 밀 포도 등 이런저런 농사를 하다가 결혼하고 서른이 넘어 군대에 갔다. 우리도 갓 스물에 결혼들을 했으니 시부모님의 나이도 40대 초반인 경우가 많았다. 우리 시댁 부모님도 42살, 남편은 6남매 맏이로 시동생 시누이가 옹기종기 모인 열 식구였다. 

“시집오니까 큰 시누가 열일곱 살, 둘째가 열네 살, 다음이 일곱 살 다섯 살 쪼르르 고만고만 하더라고. 막내 시동생 돌잔치를 4월에 하고 그 해 10월 달에 내가 시집을 갔지 뭐야. 우리 애들하고 시동생들이 같이 크는 거지. 그게 누구 몫이야? 내 몫이지.

봄날에 시동생을 포대기에 둘러매고 밭일을 다녔어. 어린 시동생이 뭘 알겠어. 말질하고 손 갈 데가 많았지. 그렇다고 눈 한번 크게 뜰 수가 있나 소리를 지를 수가 있나.

속으로 끙끙 앓고 말았지. 그런 게 속병이야. 누구한테 말하면 뭐하겠어. 혼자 삭히는 거지. 그런데 다들 그렇게 살았어.”

소쿠리 옆에 끼고 업어 키운 시동생 시누이가 둘, 우리 애들이랑 같이 컸다. 막내 삼촌하고 큰 아들이 세 살 차이였다. 

우리 아이들이 아홉 살 다섯 살이던 손 많이 가는 나이 일 때 남편은 군대에 갔다. 출생신고를 늦게 해서 서른 넘어 군대에 가게 됐다. 강원도 인제에서 군 생활하다가 뼈가 부러지는 사고가 나서 원주 병원에서 8개월을 보냈다. 

내무반에 소독차가 들어왔다가 남편이 사고를 당했는데 팔을 안 끊어내고 다른 뼈를 붙였다. 시아버님은 내가 놀랠까봐 처음에는 쉬쉬 하셨다. 물론 내 충격은 너무 컸다. 큰 아들이 9살 작은 아이가 5살, 지금처럼 의학이 발달한 것도 아니고 50년 전이다. 앞으로 어떻게 살까 눈앞이 캄캄했다. 아버님은 병문안 가실 때 나보고 “떡이나 해라” 하셨다. 

그 때는 좋은 일을 나눌 때도, 불상사를 묻어야 할 때도 떡으로 의미를 부여했다. 

남편은 불편한 채로 그 세월을 잊고 있다. 

■ 백운리에서 반백년

우리는 양저리에서 10년 살고 남편 제대 후에 고백이(백운리의 옛 이름)로 이사했다.

시골 살이는 애들 교육이 관건이었는데 아이들은 지금은 폐교된 학교, 묘곡 국민학교에 다녔다. 아이들을 남편 집안이 있는 대전으로 학교를 보내야 하나 고민도 하면서 백운리에 정착했다. 

우리 4남매도 어느덧 큰아이가 환갑이 되고 우리 부부도 여든 고개를 훌쩍 넘었다.

언제 그 세월이 다 갔느냐 물으면 나도 뭐에 홀린 듯이 왔다고 대답 할 것이다. 

우리 부부 적적 할 때도 있지만 보령사는 아들이 아예 한 달에 한번 날을 정해 집에 온다.

미안하고 고맙지만 큰 위안이다. 우리 딸이 올케보고  “언니 바보냐? 노는 날 오빠랑 놀러가야지 때마다 시골집에 오느냐” 핀잔 아닌 핀잔도 하지만 이제는 자식 발걸음이 위로가 되니 나이 들었나 보다. 

며느리가 불편해하면 아들 마음이 아무리 갸륵해도 소용없다. 그래서 며느리한테 고마움이 더 크다. 

마실 길에 동네 한 바퀴 돌면 50년 전 그 때가 새록새록 생각난다. 다들 새댁이던 우리들이 허리가 구부정한 할매가 되었다. 세월은 무심하지만 어려웠던 시집살이와 젊은 날의 고생이 꿈처럼 아득하다. 새댁 때 내가 힘들어도 참고 견딘 힘은 점잖은 친정아버지 인품에 흠집 내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루가 쌓이고 한 달이 보태져 1년이 모였다. 그리고 다시 1년이 10년이 되고 80년이 넘었다. 아무것도 한 것 없는 것 같은 인생이지만 티브이를 보다 옆에서 잠든 영감의 코고는 소리, 주말이면 찾아와 방 한가득 차지하고 재잘 대는 우리 아이들이 내 세월을 말하고 있다. 헛일이 아니었다고... 

젊을 때는 내일이 오늘과 달라지기를 바랐지만 지금은 그저 ‘오늘만 같아라.’

세월을 붙잡고 싶은 마음이 아직은 내려놔지지 않는다. 비단 나만의 바램일까?

추억의 뜰 장유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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