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적십자봉사회 옥천지구협의회 회장권한대행 강형근씨,
옥향봉사회 회장 송유정씨에 고사미 바통 이어받아, 보일러 봉사는 으뜸 형근설비사 대표
담배원료공장 노조지부장 출신에 현재 남부3군 열관리시공협회장도

대한적십자봉사회 옥천지구협의회 회장권한대행 강형근씨.

내분과 갈등 속에서 회장 권한 대행을 맡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봉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맡아 묵묵하게 일하고 있다. 그나마 여러 이야기가 잦아드는 것은 봉사에 대한 그의 진정성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69살, 적지 않은 나이에 그는 여전히 봉사하고 있다. 지난주 만난 그 날에도 동이면 용죽리 수해 봉사 현장에 그가 있었다. 그는 옥향적십자 봉사단 회장 겸 대한적십자봉사회 옥천군협의회 회장 권한대행을 맡고 있는 강형근씨다.

송유정 회장은 어디서든 불러주면 금방 찾아와 일하는 그를 보고 많이 배웠다고 했다. 봉사하는 사람은 봉사하는 사람들을 알아보는 법이다. 적십자 봉사회에 가입한 지는벌써 7년째, 환갑이 넘은 늦은 나이에 들어와 뒤늦게 봉사의 참맛을 알게 되었다고. ‘남모르게 하는 봉사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그는 동이면 우산리가 고향이다. 묘금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영동 심천중학교를 졸업했다. 당시에는 중학교만 졸업해도 대단한 학력인지라 고등학교 진학을 생각하지 못했다. 가정 형편도 어려웠다. 오남매 중 맏이라 집안 살림도 함께 걱정해야 했다. 중학교 다닐 때 심천중 교장 선생님한테 한문은 정말 열심히 배웠다. 회초리로 맞아가면서 한문 하나만큼은 똑소리나게 배웠던 기억이 난다. 눈물나도록 배운 한문 때문에 일자리가 잡힐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때만해도 한문을 잘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추천을 받아 대전 법원에 계약직으로 취업을 했다. 호적 정리하는데 나만큼 잘 하는 사람이 없었다. 명문대 나와도 한문을 모르면 법원에서는 까막눈이었다. 위에서 나를 잘 봐줘서 계약직인데도 불구하고 특채를 했다. 정규직이 된 것이다. 그렇게 2년 동안 일했다. 실무에서는 나무랄 데가 없었지만, 명문대 나온 친구들의 질투와 시기를 받다가 국정감사에서 특채가 부당했다는 지적을 받고 그만두고 말았다. 특혜가 아니라 정말 실력으로 채용된 것이었음에도 그런 억울함이 있었다. 군대를 다녀오고 아는 사람이 법률사무소 사무장으로 오라는 것을 기다리다가 옥천의 담배원료공장에 취업했다. 

■ 노조 지부장으로 앞장서 투쟁하다

“거기 취업해보니 노동자를 너무 우습게 알더라” 법원에서 일한 경험과 보고 배운게 있다보니 가만 있을 수가 없었다. 목소리를 냈다. 무시하는 것을 못 참아 앞장섰다. “그랬더니 노동자들이 노조 지부장을 시켜주더라” 그래서 그 때부터 10년 남짓 노조 지부장을 했다. 처음 들어온 신출내기가 노조 지부장으로 장기 집권(?)까지 한 것이다. 그 때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들어서 많은 것에 대해 투쟁하고 바꿔냈다. 본사까지 가서 투쟁하며 점심 식사제공, 의료보험, 퇴직금까지 전부 마련하게 했다. 노조 일을 하면서 배움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다. 그래서 한남대학교 노사관계학과를 들어가 졸업을 했다. 당시에는 300인 이상 사업장 10년 이상 노조지부장을 했던 사람은 고등학교 동등학력으로 인정해주었다. 당시에 지도교수는 공부하는 나를 보고 대견해하면서도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었다. 교수가 되려면 박사학위까지 15년이 훌쩍 넘게 걸리는데 그 당시 내 나이가 42살이었다. 차라리 기술을 배워 보일러 공이 되는 게 미래 일자리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기술을 배워야 평생 먹고 살 수 있다고. 진심으로 하는 조언이라 받아들였고 나는 바로 대전역 앞에 있는 한국열관리냉동기술학원에 등록해 공부를 했다. 그 당시 자격증 취득은 하늘의 별따기일 정도로 어려웠다. 총 380명이 응시해 8명이 합격했는데 그 중에 내 이름이 있었다. 그래서 담배원료공장 사표를 쓰고 보일러 설비 회사를 차렸다. 이름을 내걸고 하는 일터라 ‘형근 설비사’라고 했다. 

■ 뒤늦게 대학에 다니다 보일러 기술을 배우다

잘 나갈 때는 직원이 8명까지 있었다. 수입도 괜찮았다. 지금은 한국열관리시공협회 영동, 보은, 옥천 남부3군 지회장을 10년 넘게 맡고 있다. 노조 지부장도 10년, 남부3군지회장도 10년, 그리고 뜻하지 않게 적십자봉사회 회장 권한대행까지 맡는 걸 보니 그에겐 남다른 리더십이 있는 듯 했다.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요. 당시 장애인협회 태봉열 회장이 청산에 어려운 가구가 있는데 거기 보일러 시공을 맡아달라고 해서 잘 해줬거든요. 그런데 그 분이 6년이 지난 후에 갑자기 연락이 와서 청산에 꼭 와달라는 거에요. 그러면서 곶감과 함께 5만원을 쥐어주더라고요. 그때 잘 시공해줘서 너무 고맙다고요. 안 받는다고 하니 받을 때 까지 주더라구요. 그 분은 그러고서 1년 후에 돌아가셨는데 혼자 사는 사람이 고마운 마음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는 게 너무 고맙더라구요. 그 때 봉사의 참맛을 알게 된거죠. 그 때부터 열심히 봉사에 참여했어요”

그래도 주변에 늘 등불이 되는 봉사 지인들이 있다. 그의 첫 마음을 계속 지켜주는 사람들이다. 바로 부녀봉사회 전영주 회장과 대성봉사회 김성근 회장, 군북봉사회 김금자 회장이다. 

“전영주 회장은 남편과 함께 송주철강을 하느라 바쁠텐데 묵묵하게 언제든 와서 도와줘요. 김금자 회장은 본인 집에 수해가 났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집 수해를 위해 봉사를 할 정도로 봉사 정신이 투철하죠. 김성근 회장이야 어디든지 달려가는 이름난 봉사꾼이고요. 이들 단위 봉사 회장님이 이렇게 열심히 해주는데 제가 안 할 수가 있나요”

그는 앞으로 13개 단체 380여 명의 적십자 봉사단원들과 한마음 한 뜻이 되어 봉사활동을 펼치겠다고 말했다. 내분과 갈등으로 상처입은 적십자의 명예를 다시 끌어올려 놓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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