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한국화 기법을 활용한 ‘도동항 전경’과 ‘손가락 바위’
안내초,중 옥천여고, 목원대 한국화전공, 충북대 석사
2000년대 옥천미술학원 운영, 죽향초 방과 후 강사 이력도

한국화 6대 화가로 손꼽히는 심향 박승무 선생(1893-1980, 군북면 국원리 출신)의 고향이라서 일까. 연일 한국화 부문에서 심향의 후예들이 수상의 낭보를 전하고 있다.  

지난주 청산 출신 박혜지 신예작가가 대전미술대전 한국화부문 대상을 받은 데 이어 이번애는 안내 출신 관록있는 정선순 한국화가가 제10회 대한민국 독도문예대전에서 특선을 받았다. 이 둘은 옥천 출신이면서 목원대 선후배라는 공통점이 있다. 

안내면 출신으로 옥천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2000년대 초까지 읍내에서 ‘옥천미술학원’을 운영하던 정선순(56, 옥천읍)씨가 제10회 대한민국 독도문예대전에서 미술 부분 특선을 수상했다. 한 남자의 아내로, 두 아들의 어머니로, 평생학습관의 강사로 살아가며 이뤄낸 성과라 더욱 의미가 크다. 정씨는 우연한 기회로 연락이 닿아서 모임을 결성한 목원대학교 동기들과 이번 대회에 출품했다. 전통 한국화 명맥을 유지하기 위한 모임 이름은 ‘독수리오형제’. 조금은 투박한 이름이고, 모임이 결성된 지 이제 일 년 남짓이 되었지만, 함께 지원한 동기들은 모두 수상의 영예를 안은 만큼 내실이 강한 모임이다. 이들은 한 가정의 어머니, 아버지로 잠시 꿈을 접어두고 살았을 것이다. 같은 이유로 꿈을 잠시 미뤄두고 살았던 이들에게 이번 수상이 큰 힘이 될 듯하다.

정씨는 지난 10일 대전미술대전 한국화 부문 대상을 수상한 박혜지씨와는 목원대 한국화 전공을 한 선후배 사이. 옥천에 예술가들이 좋은 작품과, 훌륭한 수상 실적을 내고 있는데 이를  보여줄 미술관이 없어 아쉬움이 남을 뿐이다.

■ 한국화에 대한 이유 있는 자신감

정씨는 화선지에 먹과 동양화 물감을 사용하여 ‘도동항 전경’과 ‘손가락 바위’ 두 작품을 출품했다. ‘도동항 전경’은 비록 독도에는 가보지 못했지만, 매체를 통해 만나게 된 독도에서 가장 매력적인 곳이었다. 도동항에 대해 사진과 영상을 찾아보았고 상상을 통해 재구성했다. 갈매기를 크게 그리고, 그림답게 그려냈다고 강조했다. 

‘손가락 바위’는 대학에서 배운 전통 기법을 쏟아내기에 적합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저 일반적인 한국화로 보일 거예요, 전통 한국화 기법을 통해 그림에서 느껴지는 기운을 뽑아내려고 노력했죠” 자신 있게 그림을 설명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의 화풍은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운산 조평휘 화백의 영향을 받았다. 조화백은 목원대 교수님으로 그녀의 그림의 초석을 다져 주었고, 동기 모임 결성된 뒤 주기적으로 찾아뵈어 그림의 방향을 잡는다. 김기창 선생, 조평휘 화백을 통해 내려오는 전통 산수화 기법을 표현하여 이번 문예 대선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 “예술가는 꿈을 못버려요. 나이는 중요하지 않죠”

아내이자 엄마, 미술 교육자로 살아온 정선순씨가 다시 붓을 잡게 된 계기는 대학 선배의 연락에서 시작되었다. 대학 선배는 수묵화가 박상설 화백이다. 그는 수묵화의 대가로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초청전시를 한 이력도 이력도 있다.

박 화백은 중국으로 목원대 출신 후배들을 불렀다. 전국에서 모였다. 박상설 화백과 후배 4명은 전통 한국화 먹물 기법의 맥을 지키자고 도원결의를 맺었다. 그 자리에서 탄생한 모임을 결성했다. 모임 이름은 독수리오형제. 박화백이 그림의 방향성을 잡아 주고, 조평회 교수를 찾아가 조언을 얻었다.

정씨는 대학 시절을 제외하고 옥천을 떠난 적은 없다. 안내면 정방리에서 태어나 안내초등학교(54회), 안내중학교(27회), 옥천여자고등학교(28회)로 졸업했다. 1984년도에 목원대학교 미술학부 한국화 전공으로 입학하였다. 졸업하고, 읍내에 옥천미술학원을 차렸다. 학원은 곧잘 운영되었다. 결혼도 하고, 두 아들의 엄마가 되었다. 7년간 운영하던 미술 학원은 학령인구 감소로 자연스레 규모가 줄어들어 ‘여백화실’의 이름을 가진 교습소로 바뀌었다. 혈기왕성한 두 아들을 돌보며 교습소를 운영하기란 쉽지 않았다.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판이었다. 학원 운영을 잠시 접어두고, 전업주부로 돌아가 한동안 엄마, 아내 정선순의 삶을 살았다.

■ 세번의 임용고시 실패했지만, 후회하지 않아

아이들이 조금 큰 후 방과 후 교사로 죽향초에서 방과 후 강사를 했다. 아이들과 소통하며 강의하는 것이 꽤 적성에 맞았다. 중학교 미술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2007년 충북대학교 교육대학원에 입학했다. 2007년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중등교원 자격증 2급을 취득했다. 주변에서는 늦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43세. 아이들은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자녀들이 학교를 등교할 때 같이 나와 도립대 도서관을 갔다. 큰아들이 야간 자율학습을 마칠 때까지 공부했다. 아들이 별빛을 바라보며 집으로 돌아왔다. 늦깎이 수험생 생활을 3년을 보냈다. 세 번의 임용고시를 봤지만, 결과는 불합격. 그러나 결과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는다. 실패했지만 ‘화가 정선순’으로 살아가는 삶에 미술 전공 서적, 교육학을 공부한 것이 도움 된다고. 이때 배운 전공 지식은 옥천평생학습관, 옥천노인장애인복지관에서 연필화를 가르치고, 그림의 방향을 잡는 데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정씨는 미술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 대한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정보처리기사 1급, 미술심리상담사 1급, 청소년지도사 2급을 취득하였다. 예술인과도 계속 교류했다. 한국미술협회 회원, 옥천미술협회 창립 멤버로 시작하여 3년간 사무국장을 했다. 정기전에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바쁘게 살아가는 동안 자식들도 올곧게 자라났다. 어느덧 30살이 된 큰아들은 물리치료사가 되어 서울에 살고 있고, 27살 작은 아들은 공군 중사가 되었다. 남편은 옥천 상하수도 사업소에 근무하고 있다. 두 아들과 남편은 묵묵히 작품활동을 응원해 준다. 수상에 대해 누구보다 기쁘게 축하하지만, 한국화 명인을 꿈꾸는 ‘화가 정선순’에 대해서는 조금은 어색해한다고

■ “군과 문화예술인과 소통의 자리가 필요합니다”

정씨는 옥천의 문화예술시설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한다. 전통문화체험관에서 열린 제17회 옥천미술협회 정기전을 해 보니. 전통문화체험관 전시장은 폭도 좁고 구조 또한 미술 전시에 적합하지 않다고 한다. “예술인 지원사업에 지원했다가 개인전 횟수가 달랑 한 번뿐이라고 탈락했어요.” 주부 화가로서 개인전을 개최하기가 쉽지 않다고. 우리 지역에 미술관이 생겨 제대로 된 전시장, 개인전을 개최하면 좋겠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군과 예술인과의 정기적인 소통의 자리도 필요한 점을 언급했다. 한국문화예술단체 총연합회 이범헌회장이 이원면 출신이라는 점을 언급하며, 군수와 이범헌 회장, 옥천의 예술인 단체들의 만남이 필요하고, 이를 계기로 정기적인 소통의 자리가 필요하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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