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화 (1935~ )

백운리. 조용하고 깨끗한 동네였다. 방금 빗자루로 쓸어낸 듯 깨끗하고 좁은 골목길 끝까지 걸어가니 오른쪽에 빙그레 미소짓듯 살포시 열린 대문 옆에 참 아름다운 나무가 정갈하게 놓여있다. 흙에서 큰 나무가 아니라 화분에 담겨있는데 주인의 손길이 많이 가서 어여쁜 수형을 자랑하고 있다. 오늘 내가 만날 엄니도 분명히 아름다우실 거야.

“내 고생한 거 말도 말아.” 엄니들은 첫 마디가 다 똑같다. 후후후. 

나의 고향은 평안북도 초산군이야. 압록강 근처 중국 변경인데 초산이라는 이름은 궁벽한 산골에 나무가 무성하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도 그럴 것이 한겨울에는 기온이 영하 30°까지 내려가는 곳이거든. 초산읍에는 1901년에 설립된 초산교회가 있었는데, 동네 주민 한명이 중국 통화 현에 갔다가 선교사에게 전도를 받고 돌아와 설립하였다고 들었네. 

6.25전쟁 당시 국군이 북진하면서 벌인 초산 전투는, 인천상륙작전, 평양탈환 작전과 함께 3대 전투로 유명하다.  

■ 걷고 또 걸어서 속리산 보은으로

농사지어도 공산당에게 다 바치고 나서 배급 타서 먹어야 한다고, 앞으로 다 굶어 죽는다고 동네에 소문이 떠돌았다.

그래서 부모님은 오빠5명 남동생1명 그리고 나를 데리고 남한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하셨다. 6.25 나기 2년 전이었는데 식구 아홉 명이 한 달을 날마다 걸어서 아래로 내려왔다. 하나씩 얼러 맨 간단한 봇짐 속에 쑤셔 넣은 좁쌀을 냄비에 멀겋게 끓여서 온 식구가 길 위에서 나누어 먹으며 속리산까지 내려왔다. 살기 좋다는 소문에 보은 귀퉁이에 짐을 풀고 정착하였다. 

한데서 살면서 산에 쬐그만 밭떼기 일구어 조하고 옥수수를 심어서 입에 풀칠하듯 살았고 점차로 오두막도 짓게 되었다. 옛날 사람 다 그랬듯이 고생고생 이루 말할 수 없이 무지하게 했다. 

내 나이 22살 되던 2월에 한 살 더 먹은 황규진 총각과 혼인을 하고 무주구천동으로 시집을 갔다. 어두컴컴했던 방에서 시할머니, 시어머니, 시누이 3명, 시동생 1명이 우르르 나와서 나를 맞이했다. 나는 6.25 난리를 겪으면서 배를 많이 곯았었는데 시집와서도 역시나 먹을 것이 없어서 배를 많이 곯았다. 산자락에 땅이 있어도 농사를 야무지게 지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 내가 잘한 일은 애들 가르친거야

무주구천동에서 20년 쯤 살다가 시댁식구들 설득해서 살기 좋다는 교평리로 다시 이사왔다. 

시댁식구들 다 끌고 왔지만 아들 둘은 무주구천동에 남고 싶어해서 남겨두었다. 청산으로 와서 나는 딸 셋과 쫑마리 아들을 죽기살기로 가르쳤다. 청산고등학교를 졸업시켰는데, 나에겐 모두 4개의 훈장처럼 자랑스럽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백운리에서 나는 정착하고 먹고살고 가르치기 위해서 품팔이를 비롯해서 안해본 것 없이 다했다.

시집살이에다가 영감 시집살이까지 다 살았지. 내가 보니 이 세상에 제일 무서운 게 서방 시집살이다. 성격이 급했던 우리 영감은 벌기보다 돈 까먹느라 더 바빴다. 이것저것 해본다고 그나마 있는 거 다 팔아먹고 말았다. 평생 담배를 피웠는데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큰 병원으로 가라고 해서 대전대학병원으로 갔다. 폐암3기로 병원에 사뭇 있는 동안 내가 병간호를 도맡았다. 느낌이 있었는지 집에 가자고 해서 한 달 계시다가 64세로 돌아가셔서 대평리 근처 선산에 모셔놓았다. 허망하지, 어쩌겠어.

지금은 행복하고 말고, 혼자 있고, 근심걱정 없으니 제일 좋지. 나는 백운리 이사오던 처음부터 지전리 뒤 덕의산 자락에 위치한 백운사에 다녔다. 주지스님이 80세로 평생 절을 지켰는데, 절도 스님도 나도 다같이 나이 들어가는 것이 참 좋다. 우리 절은 70년이나 됐는데 해마다 거르지 않고 명절 때 쌀을 기부하면서 나눔실천을 하고 있다. 나도 매년 연등을 다는데 아들 딸 잘 되고, 손주들 다 잘되고 행복하라고, 나도 잠들 듯이 떠나가게 해달라고  소원을 달아맨다.

쫑마리 막내아들은 오산에서 차부속 만드는 직장에서 만난 아가씨와 결혼해서 자식 넷을 낳고 아직도 같은 직장에 함께 다니고 있어. 아들도 며느리도 착하고 성실하기 이를 데 없지. 4명이나 낳아서 가르치느라 돈이 많이 들어서 힘들지 뭐. 예전에는 먹고사는 문제만 단순하게 힘들었다면, 지금 세상은 가르치는 게 제일 큰 문제인 거지.

우리 이쁜 딸 셋도 전부 다 회사원들을 신랑으로 만났지 뭐야. 가르쳐 놓으니 어디 내놔도 번듯하고 보기만 해도 자랑스러운 내 딸들이지. 서울 근처에 사니 부부가 벌어서 애들 가르치고 먹고살기 힘든 것도 안타깝지만 여기보다 도시로 나가 사는게 한편으로 대견한 마음이 더 크고말고.  

■ 배 아팠던 이야기 해볼게-그 덕에 덤으로 살고 있어.

영동에 있는 병원에서 대장내시경 하는데 기구를 빼다가 걸려서 터져버렸네. 그 병원에서 꼬매줬는데 자꾸 터지는 거야. 꼬맨 창자 껍질이 터져서 배가 불룩한게, 2014년 팔순 때였는데 나더러 다 죽는다고 했었지. 3번이나 재수술하다가 할 수 없이 건양대 병원에 가서 수술하고 1달 넘게 입원해서 살아서 돌아왔지. 지금껏 덤으로 사는 거야. 

사철나무를 대문 앞 화분에 심은 지 20년이 넘었어. 남편 보내고 정을 쏟은 마음의 친구야. 대문을 드나들 때마다 한 번씩 쓰다듬으면 기분 좋다고 제 몸을 흔들어 이파리들이 내게 깔깔 웃어주는 것 같단 말이야. 용담댐 때문에 옥천에 물난리가 나서 난리인데 여기 백운리는 괜찮아. 어서 복구가 돼야 할 텐데 코로나 때문에 힘든데 물난리까지 겪는 사람들은 얼마나 기가 막히겠어. 노인네가 힘이 있나, 마음뿐이지. 그저 만사형통 두루두루 평안하라고 부처님께 기도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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