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일 이전 개업한 문화광고마을 '판촉물의 모든 것' 걸고 제2 도약
20년 차 옥천읍 자율방범대 터줏대감, 각종 봉사 활동에도 단골손님

 

 신장 개업도 아닌 ‘이전개업'인데 사람들이 넘쳐났다. 천막을 지키고 음식 대접에 정신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꽉꽉 몰려들었고, 축하화분은 매장을 빙빙 두른 울타리가 되었다. 

 천성이 그랬다. 남을 퍼 주길 좋아했고 반면 스스로를 드러내는 일은 본능적으로 싫어했다. 생색내지 않고 남 돕는 일 하는 사람 곁에 사람이 안 꼬일 수가 없다. 사람을 많이 만나다보면 지칠법도 하고 관계에서 오는 상처도 만만찮을 텐데 그는 숨쉬는 공기처럼 사람 만나는 것을, 모임에 가입하는 것을, 봉사하는 것을 그렇게 받아들였다. 

 사회 속에 폭 들어가야 안온함을 느꼈고, 단체생활은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징검다리를 한다고 믿었다. 

 옥천군내 여러 광고홍보기획사가 즐비하지만, 그는 틈새시장을 전문적으로 공략했다. 다름 아닌 판촉물에 주안점을 둔 것. 18년 동안 몸으로 익혀온 판촉물 사업은 옥천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영업망을 넓힐 만큼 자리를 잡았다. 실질적인 직원은 아내와 본인, 부부기업이지만, 같이 얽혀있는 사람들은 제법 많다. 서울, 대전, 대구 등에 오랫동안 합을 맞춰온 디자이너들이 정민우(44, 옥천읍 장야리) 사장의 영업만 기다리고 있고, 판촉물 영업을 해오면 순식간에 맞춤형 디자인으로 전송이 된다. 물건 구입은 정민우 사장 몫이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가성비 높은 판촉물품을 구해 와서 인터넷 가격과 동일하거나 더 저렴하게 물건을 내어놓는다. 판촉물건 수량이 많으면 그의 친구들이 아르바이트 생으로 참여한다. 그는 무리하게 일을 하지 않고 관계와 신뢰를 바탕으로 일을 풀어나간다. 오랫동안 사업을 해 온 정민우 사장만의 일철학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영업을 위해 의도를 갖고 단체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는 삶을 볼모로 일을 하려는 스타일은 아니다. 본인의 성미에도 안 맞다. 모임과 단체에서 본인의 명함을 애써 줘서 홍보한다거나 일 관련한 것은 절대 입밖에 꺼내지 않는다. 자칫 그런 의도로 비춰지기 쉽고 그건 본인도 불편하기 때문이다. 

 “영업을 하려고 모임에 참가하거나 봉사도 낯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렇게 보이는 것을 경계해요. 저는 단지 사람이 좋아서, 봉사하는 것이 좋아서 단체도 많이 가입하고 봉사활동에는 빠지지 않으려 해요.” 정민우 사장의 나름 삶과 일의 원칙들이 보이지 않게 그를 돋보이게 한다. 궂은 일을 도맡아 해 힘든 단체 사무국장 자리만 벌써 여러개를 해왔다. 그의 인간됨을 알기에 사람들은 그를 자주 찾는 것이다. 좁은 지역의 특성상 신뢰를 기반으로 한 일은 사람들에게 절로 마음을 열게 만들었다. 

 대청마루 2층에서 충북산과고 정문 앞 1층 건물로 6월1일 이전 개업한 문화광고마을이 이전을 하고 제 2도약을 꿈꾸고 있다. 

 “원하는 건 모두 다 해드립니다. 저희 회사가 건 모토가 ‘판촉물의 모든 것’, ‘홍보의 모든 것’이 거든요. 상담을 하시면 양질의 제품으로 직접 보여드리려고 해요.”

힘들었던 청소년 시절

 순탄치는 않았다. 그렇다고 많이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건 아니라고 했다. “일단 제가 하고 싶은게 너무 많았어요. 요리도 배우고 다양한 것을 많이 배우고 싶었어요. 배우려면 일단 돈이 필요하잖아요. 집에서 모든 걸 해결해주기엔 제 욕구가 너무 컸지요. 그래서 스스로 일을 시작했어요. 닥치는 대로 신문배달부터 중국음식 배달까지, 대전 프레스 공장에서 일도 했지요.” 어릴적부터 갖은 일을 하면서 어디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생활력을 얻었고 특유의 낙천성과 긍정적인 세계관으로 어떤 어려움을 겪어도 일어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44년 거친 인생의 살아온 그만의 값어치가 있는 성취물이었다. 

 친구 아버지가 하는 행복장 배달원을 7년 정도 할 때도 그는 명함에 ‘행복한 사람’이라고 파고 다녔다. 배달을 하면서 틈틈히 어깨너머로 중국음식 요리법을 나름 배웠고 사람 관계를 넓혔다. 아는 형님을 통해 배달 백반 ‘감자바우'를 인수하여 직접 운영을 해보기도 했다. 서울 롯데호텔 주방에서 일한 경력이 있을 정도로 한식, 중식, 양식 등 못하는 음식이 없다. 

 하지만, 대전 동양강철이라는 프레스 공장에서 새끼와 약지 손가락이 절단되면서 잠시 잠깐 멈췄다. 큰 사건이었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게 혼자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았을 정도로 고통이나 슬픔에 오래 안주하지 않았다.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섰다. 괴로워할 시간은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손도 손이지만, 요식업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과 같이 해야 하는 일이라 쉽지 않았다. 정말 힘들었다. 그래서 부업으로 시작한 것이 홍보물 사업, 사업자를 갖고서 조금씩 알음알음 해왔는데 나름 일하는 재미가 솔찮았다. 그래서 ‘행복한 사람들’로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가 대청마루 2층으로 옮기면서 문화광고마을로 명칭을 바꾸면서 사업을 계속 이어나갔다. 

 사실 어머니도 크게 앓어 수술을 했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살리려고 산과 들로 약초를 캐러 다니면서 집안이 많이 기울어졌었다. 정민우 사장 본인도 결핵성 늑막염이란 병명으로 대수술을 받는 등 집안의 고초는 끊임없이 찾아왔다. 99년 옥천읍 동안리에 살던 집 화재는 힘든 인생의 정점이었다. 망연자실하지 않고 아버지와 동생, 친구들과 함께 재료를 구해 새 집을 직접 지었다. 병마와 화마가 끊임없이 겹쳐지면서 그는 생의 의욕을 잃을 뻔도 했지만, 그 때마다 이겨나갔다. 

 지금은 어머니, 아버지 모두 생을 달리해 혼자 남았지만, 어려운 생을 살아왔던 부모님을 공경하는 마음은 여전하다. "얼마 전에도 월남참전유공자로 현충원에 묻히신 아버님을 뵙고 왔어요. 새로 일을 시작하거나 할 때는 현충원에 가서 꼭 이야기를 나누고 와요. 아버지가 저에게 봉사하고 베푸는 삶을 살아라고 가르쳤거든요."

끊임없는 봉사활동

 그는 20대에 옥천읍 자율방범대에 들어간다. 당시 나이차가 20살 정도 나는 선배들과 함께 방범 봉사를 하면서 어찌보면 아버지같은 선배들과 교분을 쌓았다. ‘형님, 형님’ 하면서 온갖 단체 궂은 일을 하는 정민우씨가 선배들한테는 믿음직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자율방범대는 최연소 연합대장까지 맡았고,  캄보디아 해외봉사 1기인 아우름봉사단 사무국장도 하고 있고 1388청소년 지원단, 중부경제인연대 등 그가 참여하는 봉사단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옥천에 위험한 곳이 없는 지 살피는 옥천안전보안관 부대표 및 사무국장도 맡고 있다. 특히 봉사를 통해 친분을 쌓게 된 김성근 대표와는 각별한 인연이다. 

 “김성근 대표님이 옥천 봉사활동에는 정말 대단하신 분이거든요. 그 분을 도와 손발을 맞춰 열심히 봉사활동에 참여했어요. 자원봉사센터가 제 집 같은 걸요. 일주일에 2-3번은 꼭 가요. 어려운 봉사활동은 도맡아 하려고 노력하고 있구요. 봉사를 하면 맘이 편해져요. 저도 어려웠던 시절을 겪은 만큼 그런 관심과 실천이 많은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요. 특히 청소년들한테 맘을 더 쓰는 것은 방황하던 청소년기에 따스한 이웃 어른의 관심 하나하나가 삶을 바꿀 수 있거든요”

 그는 그래서 위기청소년에 더 마음이 쓰이고 돕고 싶다. 옥천 유일하게 성폭력, 가정폭력을 상담하는 충청 해바라기센터 위원으로도 참여하고 있다. 

 봉사를 생활화, 기부를 일상화하는 그는 평소에도 영생원, 영실애육원, 남부아동보호 전문기관 등에 수시로 들려 도움 줄 일을 찾고 있다. 

 이번 개업식에서 들어온 축하금도 군 장학회에 100만원과 남부아동보호전문기관에 50만원을 기탁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제 꿈은요.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제 건물을 갖고 싶은데 그 건물에 멋진 주방을 만들어서 여러 사람들과 밑반찬 등을 만들어서 음식봉사를 제대로 하고 싶어요. 그 꿈을 위해 지금 열심히 일하는 거에요.”

 “100원 벌면 10원은 꼭 나누고 싶고 50원 벌면 5원 나누고 싶어요. 제 천성인 것 같아요. 혼자 잘 나서 벌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여러 사람의 도움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죠. 그래서 저도 힘닿는 대로 돕고 싶어요. 6월16일에는 아우름봉사단에서 청성면 소서리 짜장면 봉사 예약이 잡혀있구요. 15일에는 중부경제인연대에서 군서면에 사랑의 집짓기 행사에 참여해야 해요.”

 가족 여행을 따로 간 적이 없다고 기억할 정도로 개인의 삶은 없어보였지만, 그는 사회 속으로 깊이 천착해서 확장된 개인의 삶을 이미 살고 있는 지도 몰랐다. 그렇게 어울렁 더울렁 사는 것이 힘들지 않고 참 좋다고 했다. 그리고 지역 부심이 있을 정도로 옥천을 사랑한다고 했다. 

 

*주소 : 옥천읍 중앙로 146
*문의 : 043-731-6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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