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리 송명자 어르신
(1939년 3월 己卯生 82세)

어르신께 여쭈었다.
“이렇게 가볍고 호리호리한 몸으로 어찌 그리 길고 긴 생을 힘겹게 사셨어요?”
“다들 그리 살았지. 안그랴?”
“지금도 이리 고우신데 젊은 새댁 시절에는 얼마나 예쁘셨어요?”
정말 고운 어르신. 
한번 물꼬를 트니 어르신은 지난 인생을 쏟아내셨다.
“그래도 맘 한 구석이 시원햐. 다 풀어내고 나니 속이 뻥 뚫린거 같아”.
낯선 이가 아닌 같은 여자가 되어 어르신과 주거니 받거니 흥 돋는 수다를 나눴다.

나는 청성면 소서리에서 태어난 송명자에요. 초등학교 마칠 즈음 아버지가 돌아가셨지요. 혼자서 종종걸음 치시는 어머니 도와서 동생 3명을 업어서 키웠답니다. 없는 살림에 울 어머니가 고생이 많으셨지요. 농사일 하시랴, 산에 가서 나무해 오시랴, 길쌈으로 살림에 보탬하랴, 어머니가 바쁘셨으니 부엌일이며 빨래며 동생들 챙기는 일은 모두 제 차지였지요. 아침마다 동네 샘에 가서 물을 길어 와서 큰 솥에 넣고 물을 끓였고, 보리를 절구통에 넣고 절구 공이로 오래오래 찧어서 삶아둔 보리쌀로 다시 밥을 지었지요. 바쁜 어머니는 가끔 청솔가지를 잘라오셨는데, 그 청솔가지로 불을 피우면 매서운 연기가 났지요. 매운 연기로 눈물이 나면, 아버지 안 계신 설움까지 합해져서 눈물범벅으로 밥을 해도, 그 꽁보리밥을 동생들은 얼마나 맛나게 먹던지요. 

동생들 챙긴다고 노처녀가 되었는데 내 나이 스물넷에 청산면 박씨댁에서 중매가 왔어요. 시어른 되시는 분이 총각보다 두어 살 많은 처자를 찾는데 내가 당첨이 된 거라네요. 청산면 사는 박씨 댁은 인근에 소문이 자자한 양반가문 인데다 농사도 제법 있고, 총각은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 인물까지 좋다고 해서 혼인을 했어요.

시부모님은 ‘법 없이도 사실 양반님’ 이셨지요. 인심 좋고 맘 푸근하고 남에게 잘 베푸는 어른들이셨어요. 거지가 밥을 얻으러 와도 꼭 개다리소반에 국과 김치보시기를 챙겨 드리라 이르셨지요. 어른들 말씀을 쫒아 음전하고 부지런한 며느리로 소임을 다하려 노력했어요.

마당가 우물 옆에는 큰 솥단지가 두 개 걸려있었어요. 하나는 국을 끓이거나 나물을 데칠 때 사용하는 식용전문이고 낡고 오래된 솥은 빨래를 삶거나 물을 덥히는데 사용했지요. 일년에 두어 번 읍내 잡화상에서 큰맘 먹고 몇 필 끊어온 누런 廣木을 양잿물을 넣고 오래도록 삶았어요. 뜨뜻한 광목을 우물물을 길어 올려서 빨래방망이로 탕탕 두드려 빨았지요.

그렇게 몇 번 헹구고 나서 하얗게 바랜 광목을 몇 개의 바지랑대에 걸쳐 마당에 널었답니다. 아이들은 그 광목 사이를 청개구리처럼 끼어들며 숨바꼭질을 했지요. 마당을 내다보면 그 시절 제 자식들이 어미 치마꼬리를 잡고 돌아다니던 모습도 떠오르고, 친정 동생들이 제 뒤를 졸졸 따라 다니던 게 생각납니다. 광목이 웬만큼 말랐을 때 몇 겹으로 접어 다듬잇돌에 올리고 방망이질을 시작했지요. 그렇게 다듬어 놓으면 뽀얗게 야들야들한 옥양목이 된답니다. 풀을 빳빳하게 먹인 뒤엔 이불 홑청도 만들고, 어른들의 바지저고리와 앞치마를 짓기도 했습니다.

나는 내리 딸만 셋을 낳았습니다. 시아버님이 마흔 넷에 아범을 낳으셨다하니 얼마나 孫子를 보고 싶으셨을까요? 딸을 낳을 때마다 시어른들께서는 “또 딸인가?” “아들은 언제 볼세나?” 하시며 혀를 차실 때마다 쥐구멍이 있으면 숨어들고, 친정집으로 내빼고 싶었습니다. 더욱이 이웃에 사는 사촌동서가 첫아들을 낳고 내리 둘째까지 아들을 낳으니 부러워서 숨이 넘어갈 것 같았습니다. 시부모님은 겉으로 눈치를 주시거나 구박을 하진 않으셨지만 제 속으로는 맷돌이 얹힌 듯, 절구가 들어앉은 듯, 한이 쌓였습니다. 

그 한을 다듬이질로 풀었습니다. 다듬이는 마주앉아 손 맞춰 하기도 했지만 혼자서 마루에 앉아 맺음을 풀어내듯이 두드렸지요. 옥양목을 발로 밟아 빨래의 굵은 주름을 편 뒤에 리듬에 맞춰 두드리거나, 광목을 펴고 타 온 목화솜을 누벼 두툼한 겨울 이불을 만드는 일도 했답니다. 일이란 게 한꺼번에 몰아서 하면 능률도 오르고 시간도 절약되니 시어머님이 도와주시면 둘이서 반 년 치 혹은 일 년 치를 몰아서 한꺼번에 일들을 처리였답니다. 화가 날 때는 아무거나 빨아서 다듬이 위에 올려놓고 마구마구 두드렸지요. 그 시절 안사람들은 알았답니다. 누구네 집 다듬이 소리가 거칠고 빠르게 울러 퍼지면 한을 푸는 소리였고, 부드럽고 천천히 리듬을 타고 울리는 방망이 소리는 평화와 안정을 뜻하는 거였지요.

남편이 포도 농사를 제법 지었습니다. 과수원은 일이 많답니다. 포도를 실하게 열리게 하려고 거름을 만들고 가지치기를 하고 솎아내기도 합니다. 익어갈 즈음엔 새들이 쪼거나 벌레가 못 달려들게 봉지도 씌워야 하고요. 잘 키운 포도를 청산장에 내다 팔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네 번째 출산에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동안 쌓인 맘이 다 풀려서 한 시름 놓았다고 했는데 시어머님이 쓰러지셨지요. 쓰러진 시어머님을 대소변 받아내며 3년 수발을 하고 나니 돌아가시데요. 양반댁 법도가 엄중해서 다시 3년 상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홀로 되신 시아버님을 4년간 모신 뒤에 돌아가셨는데, 이번에는 시누이가 절에 49제 모시는 것으로 대신하자고 하대요. 그렇게 시어른 두 분을 봉양하는데 세월이 훌쩍 지나가더군요.

내 자식들을 어떻게 키웠는지도 모르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내 큰딸이 동생들을 돌보고, 그 아래 딸들이 또 동생들을 챙겼으니 지들끼리 서로 나눠먹고 의지하며 살았지 싶네요. 내가 어릴 때 동생들 돌본 기억처럼 사람들은 저마다의 기억과 방법으로 삶을 엮어가는 거 아닐까요?

자식들 공부시키고 일하고 남편 시중들고 그렇게 세월을 보내고 나니, 내게 남은 건 골병든 몸입니다. 다리가 하도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무릎 뼈가 삭아서 관절에 무리가 생겼다하데요. 딸들이 걱정걱정하면서 나를 서울의 큰 병원에 입원시키고 검사하고 수술까지 다 받게 해 주더군요. 한 달 걸쳐 한 다리씩 수술을 하고 요양까지 마친 뒤 고향 집으로 돌아와서 요즘 재활 치료를 하고 있답니다. 

내 몸에 영양분은 다 빠져나가고 빈 껍질만 남은 듯 싶습니다. 바깥날은 따뜻한데 문을 열어놓질 못하겠어요. 온 몸의 뼈골이 쑤시고 바람이 드는 것이, 자꾸 오슬오슬 춥기만 하네요. 전기장판을 켜고 그 위에 몸을 노곤히 덥히면 그나마 좀 살만 하답니다. 자식들이 안마기에 온갖 보약을 챙겨 보내서 집안 곳곳이 약으로 그득합니다. 그 약 먹어서 몸이 예전처럼 돌아온답니까? 그냥 지금보다 나빠지지 않게 건사하면 다행 아니랍니까? 그저 자식들 그 마음에 뼈마디가 버텨주는 거지요. 

요새는 내가 영감님을 못 살게 구는 것 같아요. 물 떠 달라, 텔레비전 켜 달라, 양말 집어 달라, 빨래 돌려 달라, 온갖 것을 요구하면서 살고 있답니다. 옛날 같으면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일이지요. 만고강산에 가당키나 한 일이었겠어요? 남편은 하늘이요, 안 사람은 땅이라 했는데 요즘은 제가 하늘이 된 것처럼 영감님을 부려먹으니 세월이 참 요상합니다. 내 태어나 아직 100년도 안 되었는데 어찌 이렇게 세상이 변했는지 모르겠네요.

내가 “영감, 약 좀 줘요!” 하고 말하면 뒤꼍 옥수수 밭에 풀 뽑던 영감님이 얼른 달려와서 냉. 온수를 알맞게 섞은 물과 함께 약봉지를 줄 것입니다. 저는 그 약 삼키고 얼른 나아야지요. 영감 마음도 만져주고 이 골목 저 골목 마실도 다니면 좋겠지요. 지난 이야기 쏟아냈더니 오늘은 명약이 따로 없네요. 후련해요. 몸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열매가 있어 뿌듯합니다. 내 인생을 쓰다듬어 봅니다. 고생했어요.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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