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자, 1941년 생/ 80세

아끼며 살기에도 부족한 인생, 더 큰 마음을 나누며 살리라.
사랑은 함께하면 배가 되고, 아픔은 나누면 0이 되리니...
정갈하게 정돈된 거실에 앉아 순자 어르신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 며느리에게 걸려온 전활 받으며 어르신 얼굴에 웃음꽃이 가득 피는 것을 보았다. 그래, 누군가를 믿고 아끼고 사랑하는 일이 사람의 한 평생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는 것을.

■ 큰며느리 동렬아,

텔레비전을 켰는데 노래가 나오잖아. 제목이 ‘고맙소!’라고 하네. 노랫말을 듣는 내내 자네 생각이 나지 뭔가? 내가 평생을 두고 자네한테 해 주고 또 해 주고 싶은 말이네. 

봄볕이 다사로운 어느 오후에 말씨 고운 어떤 여인네가 내 집에 찾아오지 않았겠어? 나보고 살아온 이야기를 좀 해 달래. 절간 같은 시골집에서 혼자 공양주 보살처럼 살고 있는 내가 뭔 할 말이 있을라고. 그래서 내가 손사래 치며 거절했지. 근데, 그 여인네가 나보고 그러데? ‘제가 며느리 같지 않으세요?’ 배시시 웃는데 나도 모르게 손짓으로 집에 들였어. 자네 생각하면서 장보고 왔는데, 이것저것 자네 자랑 좀 하고 싶더라고.

연휴마다 손녀들 데리고 온단 기별이 들리면 작은 아들 내외와 외동딸 연화에게도 연통을 넣게 돼. 머릿속으로는 자네한테 해줄 음식 생각이 가득 차지. 장바구니 중에 제일 큰 걸 골라 장터에 나가서 이것저것 집어넣지. 

‘뭔 장을 그리 많이 보시우?’ 이웃 할매가 묻지만 

“나는 우리 며느리 입에 음식 들어가는 것 보면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오.”

이렇게 실없는 농담을 보태며 한참을 둘이 웃었다네. 시엄니가 며느리 낳고, 며느리는 시엄니 닮아 산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나는 알겠더라네.

■ 내 며느리 들어보시게,

요새 티비만 켜면 바이러스 때문에 전 세계에 난리가 났다 하잖나? 앞으로 외국 여행뿐 아니라 국내 어딘들 맘대로 다닐 데가 있겠나? 아닌게 아니라 작년에 연화랑 두 손녀, 우리 가족 3대가 뭉쳐 이태리 다녀온 거 정말로 잘한 거 같아. 그 나라도 요즘 바이러스 걸린 사람들 열에 한 명은 쓰러져서 다시 못 올 길로 간다지 않아? 돈도 많이 들텐데, 며느리는 일한다고 못 가는데 우리끼리 가는 게 맘이 편치 않아 내가 그렇게 거절해도 괜찮다고, 딸들 둘 딸려 보내는 게 자네가 가는 것 보다 더 행복하다며 등을 떠밀어서 보냈잖아. 여행 가서 우리 3대 여성들은 참말로 좋았어. 이태리에서 가이드가 ‘어르신 특별 대우’로 곤돌라도 공짜로 태워주고, 내가 그 머나먼 나라 타국 땅에서도 뭐든 잘 알아맞힌다고 ‘무당빤스’라고 별명도 지어주더만. 그 곳에서 뭐든 눈길 가는 것 있으면 자네 주고 싶어 주머니를 뒤졌어. 손녀 둘이 가방에 더 넣을 데도 없다고 눈총을 줘도, 할머니 돈 낭비한다고 핀잔을 줘도 나는 자네한테 화사한 스카프, 보들보들한 가죽 백, 반짝이는 브로치도 주고 싶었다네. 자네는 ‘아휴, 내 어머님이 이거 사 주셨어. 눈이 얼마나 높고 고급인지 내가 못 따라가. 멋쟁이 중에 최고셔!’ 라며 이웃들에게 자랑했을 거여. 

■ 이보시게 며느리,

대전 을지병원에서 근무할 때 두 손녀를 내가 키웠잖아, 손녀들이 ‘할머니, 할머니’라며 내몸에 착착 감겨올 때마다 얼마나 즐겁고 행복했는지 몰라. 하도 붙어 다녀서 난중에 손녀들이 ‘나는 엄마보다 할머니랑 더 잘 통해!’ 라고 매달렸어. 

“니들 엄마가 이렇게 예쁘고 참하게 낳아줘서 나는 키우는 재미가 두 곱 절이야. 늬들 엄마한테 공을 다 보낼거야.”
이렇게 되받아주면 손녀들은 또 좋아라 하면서 웃더라고. 같이 지내면서 한 번도 지청구 안 하고, 이런저런 불만 없이 항상 감사하다, 어머님 힘드시다, 쉬어가며 하시라, 고향집에 편히 다녀오시라, 아버님께 죄송하다, 은혜가 깊다, 라며 말해주는 자네가 참으로 고맙네.  

그 때 청산면 백운리에 혼자 지내던 내 영감은 또 얼마나 속정이 깊었는지 몰라. 이웃에 혼자 사시던 시누님이 오셔서 동생을 챙겨주셨으니, 나는 맘 편히 두 손녀 길러 준 게지. 내 영감은 자기 핏줄이 땡기니 손녀들 끔찍이 위하기도 했고. 영감님이야 나보다 더 살림을 잘 챙기시던 분 아니셨던가, 동네에서도 점잖은 양반이라고 소문이 자자했어. 어디 바깥에 나가셨어도 큰 소리, 욕설 한 번 내지 않는 분이셨어. 동네에 두 양반님 중에 한 분이라고 다들 믿어주셨으니, 나는 또 그 덕분에 잘난 영감님 곁에서 같이 인정받았지.

■ 그거 알지?

자네 시아버님 서울교통고등학교 나와서 천안의 충남방적(주) 공무과 근무만 23년이나 하셨잖아. 젊은 시절에 혈압이 조금 높았다고 하데. 군대 면제 받고 방위병으로 지낸 걸 두고두고 후회하신 분이야. 

93년에 고명딸 연화가 자주 피곤하고 몸살기가 있다더니 쓰러졌지 뭔가, 프랑스 유학까지 다녀온 재원으로 영어학원 유명 강사로 일하다가 그랬으니 충격이 컸지. 그 때 검사를 한 결과가 ‘다낭 신장병’이며 유전병이므로 가족력을 의심해 보라더군. 부랴부랴 가족 모두가 검사를 해 보니, 영감님과 작은 아들과 딸이 다낭신장병 증세가 있다지 않겠어? 깜짝 놀라서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95년에 귀향하게 된거라네. 선대에서 물려주신 땅에 배를 심으셨어. 봄 날 배꽃이 새하얗게 피면 친구들 불러 ‘梨花에 月白하고 銀漢이 三更인제.... ’를 소리내어 노래하며 맛난 것을 나눠 드셨어. 농약 안치고 농사지어 자식들에게도 나눠주고, 우리 내외 먹고 살자며 다정이 병이셨지. 증세가 심한 딸이 투석을 받기 시작했고, 영감님도 휴식하며 건강을 지키려 애를 쓰셨어.

■ 동렬아, 사랑하는 내 며늘아,

가족이 모두 혈액형이 0형인데, 큰 아들만 나와 같다 하네. 성격도 취미도 취향도 생각하는 것도 모두 내 판박이라잖아. 외탁한게 너무 좋다고 큰아들이 절을 하더라구. 母子가 어찌 그렇게 닮았는지 그래서 내가 자네 집에서 12년을 함께 지내도 큰소리 한 번 난 적이 없었나 봐.

우리 연화가 병마와 싸우면서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름 앞에서 다시 숙연해지고 끈끈해졌어.연화가 7년이나 투석을 했네. 양쪽 콩팥 안에 3kg씩 나가는 혹이 생겨 수술하고, 투석하는 중에도 점점 나빠져서 이식이 아니면 방법이 없다는 의사의 말이 사형 선고처럼 들렸잖아. 이식 희망자 명단에 ‘박연화’ 이름을 올려놓는데 눈물이 앞을 가리데. 내가 제일 먼저 검사를 받았는데 안 된대. 그 다음에 큰오빠(자네 남편)이 검사를 받았는데 가능하다는 게야. O형 가진 박씨네 식구 모두 자네를 쳐다봤어. 그걸 입으로 어찌 뱉어 내겠어. 그냥 고개만 돌려 자네의 답만 기다리는게지.

■ 천사 같은 내 며느님아,

자네가 선뜻 동의를 해 주더군. 우리는 가족인데, 젊은 연화 살려야 된다고, 얼른 용기내어 기증해 주라고 남편을 설득하는 자넬 보면서 나는 천사를 보았어. 자네는 남편을 설득하여 시누이에게 콩팥만 내준게 아니잖아. 콩 한쪽도 나눠먹고, 불쌍한 이웃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외로운 이들에게 인정을 나누잖아. 을지병원 검사실에 근무하면서도 얼마나 환자를 잘 챙기고 돌보는지 다들 칭찬이 자자하잖아. 간호사를 왜 백의의 천사라고 부르는 줄 나는 알겠더라구.

영감님 79세에 돌아가시면서도 자네를 부르더군. 고맙다 손 잡으며 빙그레 웃으셨어. 그 웃음 속에는 자네한테 하고 싶은 말 모두 담겨 있었던 걸. 영감 떠나고 혼자 남은 내가 외로울까봐 날마다 전화하고 매주 찾아와서 챙겨준 자네는 이 세상 최고의 며느리야. 

나는 누가 찾아와서 이런저런 얘기할 때 며느리 말이 나오면 참지를 못하겠어. 자네 얘길 하고 싶어서 말이야. 해도해도 끝이없는 자네에 대한 칭찬은 화수분처럼 솟아나와. 시어머니가 주책스럽지만 어쩌겠나? 그것이 남은 내 생의 보람이며 기쁨인 것을.

■ 천사표 내 며느리 동렬아, 

우리 남은 시간도 지금처럼만 지내기로 하고 나는 언제나 자네한테 무한 감사와 사랑을 보낸다네. 남은 할 말은 만나 밤을 새워 또 하기로 하자. 

2020년 어느 날, 시엄니 이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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