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강물처럼
흐르는 강물처럼
  • 옥천닷컴
  • 승인 2020.07.23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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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숙제 (옥천작가회의 회원,동이면 세산리)

새벽 5시 기상을 한다. 산책하기에 최적의 시간대다. 걷다 보면 들녘의 싱싱한 생기가 전신으로 흡입되는 양, 눈도 맑아지고 발걸음 가볍다. 돌아와서 샤워를 한다. 마당에 나와서 책을 접한다. 내가 책을 대하는 이유는, 알량한 지식을 축적함이 아니다. 내 안에 저장된 보물을 찾는 방도를 강구함의 방도다. 

대문에 매달린 주황빛 능소화가 쉬임 없이 뜻을 묻는다. 솔바람 하염없이 얼굴을 스친다. 뒷산의 푸른 산빛은 오늘도 선정에 든 양, 묵묵부답 말이 없기에 만고의 병풍이다. 그 누가 말했던가. “천 년을 숨어 사는 학이 될지언정, 삼춘(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를 부러워하지 말라고.” 

그렇다. 우리가 이 각박한 세상을 살면서, 스스로 만족함을 느끼지 못하는 연유는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오늘도 자연은 소리 없이 늘 상 우리들 곁에 있거늘, 그 소중함을 간과하기 쉽다. 너와 내가 비록 첨단 세상을 살아갈지언정, ‘빈몸’이라는 생각만 할지라도, 어찌 새소리 물소리를 듣지 못하겠는가. 

‘화엄세계(華嚴世界)’는 다른 곳에 있다고 나는 생각지 않는다. 내가 사는 지금, 이 순간이 화엄이요, 극락이 아닐까. 모든 사람이 주인공으로서 자신의 삶을 산다는 것. 들녘에 소리 없이 피고 지는 다양한 꽃들처럼, 자신만의 향기와 빛깔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화엄세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책장을 넘기다 문득 손길이 멈춘다. 『대학』의 전 3장(傳 三章 ) 구절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 내용은 이렇다. 

“詩云 緡蠻黃鳥여 止于丘隅라 하였거니와, 子曰 於止에 知其所止로소니 可以人而不如鳥乎아?” 

직설하면 이렇다. 시경(詩經)에서 노래하기를, 맑게 지저귀는 꾀꼬리여, 언덕 모퉁이에 살고 있구나. 공자님이 이르시되 머무름에 그 머무를 곳을, 미물들도 알고 있거늘, 어찌 사람으로서 새만도 못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세상이 요지경 속으로 치닫다 보니, 우리네 살림살이가 뒤죽박죽 되었다. 미물들도 제가 머물 곳을 알고 만족하거니와, 만물의 영장이라 치부하는 인간들이 화택(火宅)을 자초하고 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만 직성이 풀릴까? 내가 나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일까. 공자님의 탄식 소리가 들린다. 어째서 인간이 꾀꼬리만도 못할까. 그것은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천하의 모든 만물은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화답을 하건만, 유독 인간들만 그것을 거부한다. 

집이 많을수록 목숨 걸고 집, 집, 집에 목을 매고, 투기의 단맛을 아는 놈일수록 사생결단하는 부류들이 늘고 있다. 무엇인가가 커다랗게 ‘헛바퀴’가 굴러가고 있는 느낌이다. 부동산 투기를 잡지 못하는 정부는 정부가 아니다. 서민들은 평생을 근검절약해도 집 한 채 건사하기도 버거운데, 보라는 듯 투기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방조하는 정부는 존재할 가치가 없는 것 아닐까. 사람 사는 세상의 순리를 비웃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세태는 가볍게 여길 문제가 아니다. 왜, 가진 것에 만족할 줄 모르고 세상을 파멸로 이끌어 가는 것일까. 외적인 그 무엇인가를 통해서라도 자신의 존재감을 키우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다 보니, 권력과 치부와 명예에 목숨을 거는 세상이 되어 가는 것 같다. 그 길은 함께 가야 할 공존의 틀을 깨는 파멸의 길이다. 

정치는 ‘공존’이다. 바른 정치는 모든 사람이 맡은 바 임무에서, 책무에 충실함으로써 보람을 느끼게끔 하는 것이다. 공자님도 『논어』‘안연’ 편에서 말씀하신다.

“임금이 임금 노릇하고 아비는 아비 노릇, 자식이 자식 노릇하게끔 하는 것이 ‘정치’라고.” 

서민들은 그렇지 않아도 팍팍한 살림살이에 주눅이 들어 있는데, 부동산 투기로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이 보라는 듯, 활보하는 세상은 썩은 세상이다. 이것을 방조, 방치하는 세상은 존립할 하등의 가치가 없다. 위정자들은 명심할 일이다.

부처님은 사유경(蛇喩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어떤 제자가 다음과 같이 물었다. 

“부처님, 우리의 마음속의 어떤 것으로 인해 바른 생각을 잃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입니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렇다. 이 세상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실체도 없는 ‘나’에 집착 하면 항상 근심과 고통이 생기는 법이다. 내가 있으면 내 것이 있을 것이고, 내 것이 있다면 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와 내 것’은 그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세계와 내가 영원히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소견이다.” 

아침부터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너무 길게 물었나보다. 바람이 분다. 꽃잎이 날린다. 남의 보폭에 나를 맞추려고 바람결에 흔들렸나보다. 주인공으로 산다는 것은 ‘흐르는 강물처럼’묵묵히 나의 길을 가는 것 아닐까.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자신이 서 있는 곳 모두가 당당하다’, 했지 않던가. 그렇게 가는 것이다. 매사에 의연하게 강물처럼 덤덤하게 살아가는 사람 앞에 , 명성과 부와 권세는 덧없을 뿐만 아니라 물고기를 낚는 낚싯줄 같은 것. 그것에 연연하는 순간,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그들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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