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리 이정녀 (1938년 1월 戊寅生 84세)구술 생애사

목단같이 환하고 어여쁘신 어르신
“지금 이리 고우신데 젊었을 때는 은방울꽃 같았을 거예요”
어르신을 보자마자 덧붙일 말을 찾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고운 어르신. 
곁에 계신 바깥어르신의 너털웃음이  
‘그래 고왔지’ 라는 추임새였다.

■ 고왔던 큰 애기

청산면 삼방리에는 꽃 같은 처자가 여럿
봉숭아 꽃물 들이며 같이 놀던 복남이
찔레순 꺾어 먹으며 노래하던 꽃님이
노래 잘하던 해당화 처녀 순덕이
목단을 꽃보다 예쁘게 수(繡)를 놓던 정여
우리들 얼굴은 박속같이 뽀얗게 피었지요.
우리들 모습은 붓꽃처럼 청초하게 뻗었지요.

스무 살 되던 해 
이웃 최서방 아지매 찾아와서
‘우리 일가인데 참한 신랑 있다오’ 중매를 넣었다우.
뼈대 있는 가문이란 한 마디에 
그 말만 철석같이 믿은 내 부모님
날 잡고 잔치준비로 바쁘신 동안
나는 복남이, 꽃님이, 순덕이 손잡고
헤어짐이 아쉬워 눈물바람 올렸습니다.  

연지곤지 찍고 족두리에 원삼 입고
시오리 떨어진 백운리 최씨 댁에 
얼굴 한 번 안 본 신랑을 찾아
바리바리 싸 들고 시집을 왔습니다.

약주 좋아하시던 시부님
탈도 많으시고 말씀도 많으셨습니다.
술도가에서 사 온 됫박 술보다
며느리 손으로 거른 탁주가 맛나시다며
‘고봉밥은 안 올려도 꼬두밥은 좋을터’
웃으시는 한 마디에 거역을 못했습니다.

■ 그 세월을 견뎌낸 인동초 

호리낭창한 밀을 말려 절구통에 반 홉 넣고
설설 절굿공이를 돌려 밀기울이 절반쯤 나올 때
물을 자작하게 붓고 손으로 계속 치댑니다.
밀에서 나온 풀 성분이 접착제 역할을 할 즈음
밑이 뚫린 둥근테의 도구에 삼베보를 깔고
그 안에 밀기울 반죽을 9홉 넣었습니다.
주둥이를 말아서 한 방향으로 모은 뒤
발 뒤꿈치로 자근자근 밟아 누룩을 빚고
귀한 쌀밥을 꼬두밥으로 잘 쪄내어
온종일 그늘에서 말려 吉日에 술을 담궜지요.

그 귀한 술을 드신 시아버님 
술 드신 값을 얼마나 크게 하시던지
제 신랑은 술을 입에도 대지 않게 되었답니다.
삼농사 지으면 일이 참 많았습니다.
키만큼 자란 삼을 베어 와서 마당에 솥 걸고 삶아
껍질 벗겨내고 말리고 가닥가닥 실을 뽑아
철커덕철커덕 베틀에 걸어 베를 짰습니다. 
삼실을 뽑아내느나 앞니엔 노란 물이 들고
실을 꼬느라 정강이엔 핏줄이 돋고
한 필 베를 뽑느라 날밤을 새웠습니다. 

변변한 집 한 채 없는 살림에
하루에도 몇 번씩 물동이 이고 우물가에 나서면
하얀 쌀 뜨물을 떠내려 보내던 이웃 어멈
그 함지박이 얼마나 부럽고 또 부럽던지요.
넉넉한 쌀가마니 놉에게 지게 지워 앞세우고는
딸네집 가신다던 월순 할머니 
뒷모습에 햇살이 찰랑이며 따라갔습니다.

그 세월을 어찌 견뎠는지 모릅니다.
아들을 낳았더니 좋아하시던 시어머님
청주까지 나가서 사 오신 미역단에 건홍합 꼬지
국 끓여 주시던 손길 잊히지 않습니다.
둘째도 아들 낳고, 내리 둘 딸 낳았으니
이만하면 다복하게 자식복은 있었지요.

술 , 담배 않으시고 부지런히 움직이던 내 신랑
식구들 건사하느라 바삐도 사셨네요.
나뭇짐도 팔았고 소장수도 하셨고
남의 지붕도 고쳤고 이런 저런 일도 맡아
황소처럼 묵묵히 삶의 길 걸어오셨습니다.

큰 아들 포크레인이 우리 집 마당에 버티듯 서 있고
작은 아들 특수 용접기가 창고에 들어있고
큰 딸, 둘째 딸은 공무원 하는 남편 만나
알콩달콩 의좋게 살고 있습니다.
이 나이에 바랄게 뭐가 더 있을라구요.
자식들 건강히 잘 살아가고
영감님 내 옆에서 따뜻하게 말 벗 되어주고
온 동네 사람들 웃으며 인사하고 살면 되는 것이지요.
아 이만하면 꽃길입니다.

저작권자 © 옥천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