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유지였던 화헌 송학헌씨 주도, 공덕비도 세워져
개심리 출향인 송성호씨, 조부 송학헌씨 비석 잘 보존했으면
스스로 가뭄을 해결하려했던 노력,강제 이주된 대청호와는 달라

 

대청호가 생기기 훨씬 전에 수몰이 된 마을이 있었다. 벌써 70년 전 625전쟁 나기도 전에 시작해 끝나고 마무리했다고 하니 엄청난 공사였다. 오죽했으면 자기마을을 스스로 수몰시키고 저수지를 만들었을까. 지금으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지만서도 워낙 궁벽하다보니 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달밤에도 가뭄든다’는 말이 횡행할 정도로 물이 부족해 농사를 못지었고 짓더라도 소출이 작은 ‘천수답’이라 정말 하늘에 그 운명을 내맡길 수 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혜안이 있는 자는 미래를 내다보고 현실을 타개하려고 지혜를 짜낸다. 아마도 송성호씨 조부인 송학헌 옹이 그러했을 것이다. 이원면 개심리 유지였던 송학헌 옹은 과감한 결단을 내리고 마을 사람들과 주변 마을까지 설득해낸다. 오랫동안 살고 온 삶터를 집단으로 옮겨야 한다고 하면 반발이 적지 않았을 터. 더구나 인근 마을까지 설득하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궁벽한 삶을 계속 마주할 수 없다는 마음과 평소 송학헌씨에 대한 신뢰로 주민들은 이주하기로 결심을 한다. 춘궁기에 곡식을 나눠주고, 대성초등학교를 세우는 데 땅을 희사하고, 625 북한 부역자들을 살려내는 등 인심을 잃지 않고 덕망을 쌓았던 송학헌 옹이었기에 가능한 일인 줄도 몰랐다. 내외부 인맥도 탄탄하여 당장 옥천 출신 신각휴 국회의원에게 건의하여 도내에서도 유일무이한 거대한 저수지 공사를 시작했던 것이다. 만일에 대청호가 이런 과정을 통해 아래로부터 마음을 모아 건설됐더라면 지금 옥천주민들이 느끼는 피해의식은 덜할 것이다. 전쟁통이었긴 했지만, 무려 4년에 걸쳐 주민들과 논의를 하였고 결심을 한 끝에 큰 저수지를 만들었다. 개심저수지는 그런 과정을 통해 건설된 것이다. 저수지가 마련된 후 이원면 전체의 풍경이 달라졌다. 개심리 주민들의 희생 덕분에 이원면 모든 농민들이 풍족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해마다 풍년이었다. 나랏님도 해결못하는 기근을 해결한 것이다. 스스로의 마을을 수몰시키고 모두를 살린 개심저수지의 사연은 송학헌 옹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런 사연을 문득 그의 손자 송성호(은진송씨 정랑공파 종중회장)씨가 들고 왔다. 

■ 손주 송성호씨의 할아버지 이야기

그는 자료를 모아내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할아버지한테 원망도 많았다.  도시인 대전으로 나가 고등학교 진학을 하고 싶었으나 할아버지는 한치의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로 ‘옥천실고 농과’로 진학하라고 결정했다. 사흘동안 울면서 반항을 했던 기억이 지금도 아련하다. 그런 어리광은 할아버지에게 통하지 않았다. 옥천실고 농과로 진학을 했고 저항의 의미로 학교 공부는 손을 놓았다. 반항의 계절이었던 셈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달랜다고 여름방학때 전학시켜준다는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더 공부가 하기 싫어졌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객기 어린 시절이었고 할아버지가 해준 것은 더할 나위없이 많았다. 어려서부터 학교를 보냈다.  할아버지가 땅을 희사해 만들었던 대성초등학교에 5살때부터 형들 따라 다녔다. 그러다가 마을이 수몰된 이후에 이원면 미동리로 이사를 했고 이원초등학교에 7살에 정식 입학했다. 그리고 이원중학교와 옥천실고 농과를 졸업했다. 전 산림조합장을 지낸 오갑식씨가 동기동창이다. “다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첫 계획이라고 알고 있죠. 그런데 농업개발 5개년 계획이 먼저 있었어요. 그게 실패를 하면서 경제개발 계획이 된 거죠. 그 때 할아버지가 ‘앞으로 농업이 괜찮으니까 농업학교인 옥천실고를 가라고 말씀 하셨어요”

■ 대성초등학교 설립과 개심저수지 만드는 데도 땅 희사

대전에서 한달음에 달려온 그가 옥천신문의 문을 두드린 것은 할아버지에 대한 공적이 유일하게 옥천신문에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종중회장으로 선친들에 대한 기록에 관심이 많았을 터 우연히 다음 포털에 할아버지 이름을 검색해보니 ‘옥천신문 기사’가 하나 걸려있었다. 그것은 예전 옥천신문 노인기자단을 한 김기두(작고)씨가 직접 적은 글이었다. 글의 제목은 ‘이원의 명승지 개심저수지 이야기’였다. 송학헌 옹에 대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개심리 본동만 인구가 200호가 넘었고 그 중에는 풍양조씨 자자일촌 대성촌을 자랑하는 천석군인 조중협씨가 살았다.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교육에 관심이 크셔서 대성초등학교에 토지를 많이 희사하고 그의 이웃에 거주하는 나의 선친과도 세의가 두터웠던 화헌 송학헌씨에 대한 효심 깊은 말씀을 종종 듣는다. 송씨는 그의 부친께서 별세하자 궤연(돌아가신 분의 신위 등을 모셔놓는 자리)을 떠나는 법이 없이 3년 시묘를 하였다. 또 짚신과 미투리를 삼아 장날마다 사람을 시켜 내다팔아 그 돈으로 기민을 먹이니 그 덕을 기려 1945년에 세운 선정비가 515번 지방도를 따라 서있다. 송씨가 개심리에서 이룬 또 하나의 기적으로 넓이가 39.6제곱미터에 수심이 13미터인 저수지를 만들었다는 것은 개심리 사람의 저력이면서 우리 이원사람의 힘일 것이다’ 이 글로 모자랐던 것인지 김기두 노인기자는 한편 더 연재해 개심저수지 이야기를 풀어낸다. 

■ 저수지 만들기 위해 주민과 이웃마을 설득하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백년의 종묘사직이 일순간에 물바다가 되는 일인데 아무리 나랏님이라도 주민 반발에 부딪쳣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곳에 살았던 송학헌 옹은 미래를 내다보고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본인 집도 땅도 17마지기를 개심저수지 만드는 그 자리에 희사하면서 솔선수범을 했다. 이런 행동은 주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 이야기는 김기두 노인기자가 쓴 2편에 상세하게 나와있다. ‘나 개인을 위한 것도 아니고 개심리 장래를 위한 것이고 나아가선 이원을 위한 것이니 대의를 위해서 ㅏ우리가 희생하자는 뜻에서 수년간 갑론을박, 결국 동네사람들끼리의 불화는 마무리되었으나 개심리 저수지의 가장 낮은 수문보다 아래쪽에 있는 6개 마을의 반발이 크니 큰 문제였다. 특히 지정리의 이찬녕씨, 대동리의 김기호씨, 미동리의 김학선씨, 의평리의 김문희씨, 이원리의 송기성씨, 소정리의 조월봉씨 등 6명의 유지가 반대하는 와중에 송학헌씨가 개심리 호수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여섯마을 유지들을 잘 달래니 드디어 수긍을 했다’. 정말 어렵게 만든 저수지였던 것이다. 정부 국책 사업이 이런 과정을 거친다면 주민들과의 갈등이 일어날 리 없었다. 

할아버지의 선견지명이었을까. 아니면 대를 물려 이일을 했던 것일까. 할아버지는 서울에서 공부하던 아버지 송재창을 불러 내려 농지개량조합에 취업시키며 저수지 관련 일을 하도록 했다. 개심저수지 만들 때부터 관여했던 아버지는 훗날 장찬저수지를 만들 때도 역할을 담당했다. 

“그 때는 반대가 심했죠. 장찬리 사람들이 몽둥이 들고 삽들고 쫓아와서 우리 마을을 수몰시키려 한다며 저희 아버지를 이원장터 끌고다니셨어요. 죽을 뻔 했죠. 저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사실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아버지가 그런 고초를 겪었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지사이지만, 할아버지는 꾸준한 설득과 쌓은 신망으로 이를 극복해낸 것이다. 

■ 그의 또 다른 이야기

손주 송성호(73, 대전 태평동)씨가 가져온 ‘화헌 송학헌 묘표’를 보면 그의 공적이 상세하게 나온다. 연성 박관용이 찬술한 것이라고 기록된 묘표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된다. 

‘설과 추석에는 시골 어른들에게 음식을 드렸고 왜정 말엽에 조세가 몹시 과다하여 백성들이 살아나갈 수가 없어서 굶어죽게 되었는데 공이 창고를 기울여 구제하였으므로 시골 사람들이 감복하여 비석을 세워 덕을 칭송하였는데 이에 공이 옳지 않은 일이라 하고 마침내 묻어버렸다. 공이 사는 마을이 궁벽하고 학교가 역시 멀어서 아동들의 통학이 매우 어려우므로 공이 힘을 다하여 학교를 세워 편리하게 하였다. 경인년1(950) 북비 난리에 어머니께서 연세가 높으신 어른으로 피란을 하지 못하셨는데 공이 시종 곁에서 모시고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받드니 비록 무도한 공비는 능히 해를 끼치지 못하였다. 내간상과 외간상에 있을 적에는 몹시 애통하면서 예의를 갖추었고 3년간 문밖을 나가지 않았다. 북비가 패하여 도망치니 국군이 부역자를 죽이려고 하는데 공이 힘을 다하여 구제하였으므로 온 마을이 힘을 입어 화를 면하였다’

“할아버지는 늦게 시작했지만, 공부를 많이 하셨고 사업도 크게 하셨어요. 대전 중동에서 중도건재한약방을 운영했던 할아버지는 아마 전국 최초로 약초 계약재배를 했어요. 가을되면 전부 다 걷어서 전국에 도매를 했죠. 그 당시만 해도 돈의 흐름을 읽었고 사업 수완이 남달랐죠.”
고 김대중 대통령이 언급한 ‘서생적 문제인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이 송학헌 옹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었다. 송학헌 옹은 1900년 12월12일에 출생하였고 1986년 7월18일(87세)에 별세했다. 그는 군서면 은행리 마등산 자락에 묻혔다. 

“할아버지의 역사를 다시 복원하고 싶었습니다. 지사적 풍모와 탁월한 현실감각으로 미래를 내다봤던 할아버지는 돌이켜 보면 저에게는 큰 영웅이었습니다. 할아버지의 비석 주변이 정리가 되어 있지 않은데 농촌공사와 이원면에 이야기 해서 비 맞지 않도록 비각이라도 세워달라고 요청할 생각이에요.”
대청호 이전에 개심저수지가 있었다. 대청호는 국가의 폭력적인 정책 집행으로 강제 수몰되었지만, 그보다 30년 전에 만들어진 개심저수지는 달랐다. 주민들 스스로 아래로부터 대책을 만들었고 요청했으며 끊임없는 논의와 토론을 거쳐 만들었다. 정부의 강요된 정책과 주민의 지혜로운 대책 그 사이에 대청호와 개심저수지가 있다. 지금은 이원면 전 지역이 논이 없고 전부 묘목밭이 되어서 그 쓸모가 많이 없어졌지만. 개심저수지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는 크다 할 수 있다. 주민들이 스스로의 삶터를 포기하면서까지 만들어낸 개심저수지, 그 이야기는 개심저수지 한 켠에 적어놓아도 좋을 듯 했다.

‘개심저수지에 얽힌 이야기들이 제법 많아요’

개심리 전 김기권 노인회장과 전 이상철 이장을 만나다

“당시 물이 엄청 부족했어요. 대성초등학교 밑으로 전부다 달밤에 가뭄든다고 할 정도로 물이 부족해 농사를 제대로 못 지었거든. 맨 처음에는 저수지를 지금의 홍도가든 옛날 장왜골짜기라고 부르는데 거기다 만들려고 했는데 거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담수 면적이 작은 거야. 그래서 결국 마을을 담수하기로 했지. 그 때 송학헌씨가 지역 유지였거든 그래서 신각휴 국회의원하고 같이 해서 저수지 만드는 데 앞장 섰었지”

“이사 비용은 아마 안 줬을 걸. 잘 기억이 안 나는데 그 당시에는 자재값이 귀해서 헌집 뜯어다가 다시 새집 짓고 그랬어요. 지금도 저수지 물 빠지면 집터가 고스란히 보여요. 연자 방아도 몇개 잠겨 있어서 나타나고.
김기권 전 노인회장은 또렷하게 옛날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상철 전 이장도 한마디 거든다. 

“79년도인가는 비가 많이오고 물이 샌다고 해서 오밤중에 솥단지하고 소 끌고 산 위로 피난 간 적오 있었어요. 뚝방에 물이 콸콸콸 새 가지고”

“옛날에는 개심리 아이들은 거기서 다 수영 한번씩 했지. 어른들은 가지 말라고 하는데 수영하는 재미가 솔솔하거든. 거기 들어가면 물반 고기반이라고 고기가 엄청 많았어요. 수영하러 들어갔더니 물고기 꼬리치는게 허벅지에 막 걸려”

개심 저수지 때문에 가슴 아픈 사연도 많았다. 비가 많이 올 때는 학교가다가 급류에 쓸려서 물에 빠져 죽는 것도 다반사였다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1년에 4-5명씩은 죽었어요. 물 내려오는 골짜기가 엄청 깊거든요. 거기서 물 갑자기 물 내려오면 쓸려서 물에 빠져 죽곤 했지. 손잡고 길 건너다가 그렇게 저 세상으로 간 아이들과 청년들이 제법 있었어요.”

“지금은 물이 남아요. 그 많던 논이 묘목 밭으로 바뀌었으니 수문 세개 다 열어도 3미터 정도 물이 채어 있어요. 격세지감이야. 옛날에 물이 필요할 때는 엄청 귀한게 개심리 저수지였는데. 암튼 옛날 생각 많이 나네”

‘이원면의 젖줄 역할 톡톡히 해낸 개심저수지’

마을탐방에 쓰여진 개심저수지

이제는 개심리의 대표적인 명물이 된 개심저수지는 만수면적이 36ha에 달해 군내에서는 장찬리 저수지의 37ha에 이어 두번째로 큰 규모.  현 수리면적만도 302ha에 이를 정도로 큰 규모인 개심저수지는 말 그대로 이원면의 젖줄 역할을 하고 있다. 비록 160호에 달하던 큰마을을 물에 잠기게 해 주민들의 고향생각을 간절하게 하고 경제적으로 시련을 겪게는 했다지만 그래도 주민들은 위안을 삼는 것이 있다.’우리가 희생해서 이원면 전체가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 오리골.양지오리골.가심이.뒷턱터.노루목 등 5개 자연마을에 84호가 거주하고 있는 현재 노루목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저수지의 수몰로 인해 이주해온 세대들이다.

저수지가 축조되어 옥토를 물속에 수장시킨 주민들은 모든 걸 새롭게 시작해야 했다. 논의 면적이 적었고 골짜기 골짜기를 개간하여 밭을 일구었다. 개심리가 일찍 포도 등 특수작물에 눈을 뜬 것도 어려운 환경속에서 어려움을 헤쳐나가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마을주민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다.수몰되기 전에는 아주 좋은 마을이었어. 저수지로 들어간 땅만 해도 수십정보나 되는 걸. 그것 뿐이야 어디! 골짜기 깊고 길지. 주막도 있었고 양조장 도가도 있었어.

옛날에는 노루목과 저 저수지 아래에만 마을이 있었어. 노루목에 우봉 이씨가 주로 거주했다면 저수지에는 양주 조씨 문중이 500여 년 동안 생활해 왔지. 6.25가 발발하면서 저수지가 생겨났고 그 후, 두덕터, 가심이, 오리골 등으로 이주를 했지”

김기권 회장은 개심리 마을의 이름을 가리켜 마음을 열어놓는 마을이라고 했다. 인정도 인정이지만 무엇보다도 이원지역의 가뭄해결을 위해 개심리 주민들은 마음 뿐만 아니라 마을까지 내 놓았다는 것이 김 회장의 설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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